115화
“나는…….”
테사는 이번만큼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행복하다고, 그렇노라고 말해야 되는데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테사를 향해 헤르트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넌 잊고 있어.”
“…….”
“……모두.”
헤르트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덩달아 벙긋거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조차 희미해져 갔다. 테사는 사라져 가는 헤르트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머지않아 그는 연기처럼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테사는 멍한 얼굴로 헤르트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봤다.
‘내가 모두 잊고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혼란에 빠져 있던 테사는 어느덧 자신이 딛고 선 자리도 흐물거리며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지 끝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녀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물감처럼 흘러내려 암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테사는 겁에 질려 고개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싫어, 제발 그만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녀는 집 밖으로 도망치려 급히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자리 잡은 무언가.
‘저건…….’
붉은 눈동자가 테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테사를 삼킬 듯이 아가리를 쩌억 벌린 채. 테사는 다시 집 안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푹푹 꺼지면서 그녀의 몸을 삼키기 시작했다. 아래로 빨려드는 느낌에 테사는 안간힘을 써 손을 위로 뻗었다. 하지만 그녀를 구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붉은 눈동자가 테사에게 가까워진다.
“싫어, 누가 나 좀……!”
곧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고 테사는 정신을 잃었다.
“테사!”
절박한 목소리에 테사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활짝 열린 창가를 통해 지저귀는 새소리와 쨍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테사는 두 눈을 천천히 껌벅이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별다른 것 없는 침실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보는 풍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테사는, 그 모든 모습에 이질감을 느꼈다.
‘뭐지……. 뭔가 잊은 것 같은데…….’
테사는 무의식적으로 뒷목을 쓸었다가 흥건하게 묻어나는 식은땀에 저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밤새 악몽이라도 꾸었나?
달라붙는 잠옷이 불편해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벗는 와중이었다. 테사는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의아해졌다.
“배가…….”
나온 것 같은데. 아닌가? 평소와 다른 느낌에 테사는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 조금은 나온 것 같은 제 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랫배를 살짝 눌러보니 단단하면서도 조금 부푼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예전에 제가 알던 몸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뭐지? 살이 찐 건가……? 근데 이렇게 갑자기…….’
테사는 괜히 불안한 기분에 방 밖으로 나가 헤르트를 찾았다. 헤르트는 테사보다 그녀의 몸을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의견을 물어 정말로 이렇게 급격히 배가 나온 게 맞다면, 아무래도 의원을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헬, 나 몸이…….”
방 밖으로 나온 테사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게도 침실에 이어 거실에서도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들었다. 대체 뭐지? 아까부터 뭘 잊은 듯한데……. 문득 테사는 거실에 놓인 장식장의 한 공간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는 종종 헤르트가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상들을 모아뒀었다. 그 많은 조각상들이 어디 갔을까. 테사는 사라진 조각상들을 찾다가 이어 헤르트의 물건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이질감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집 안에서, 헤르트의 물건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테사는 온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헤르트의 흔적을 하나라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집에 살았던 건 오로지 테사뿐이라는 양 그녀의 물건만 존재하고 있었다. 헤르트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테사는 믿기지가 않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루아침 새에 한 사람의 흔적이 모조리 사라지는 게? 무엇보다 집 안에는 침입의 흔적이나 급하게 누군가 물건을 챙긴 흔적도 없었다. 정말로 헤르트의 물건만 쏙 사라진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테사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테사는 한동안 넋을 잃은 채로 허공을 쳐다봤다. 제게 일어난 일을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았다.
밖으로 나가서 헤르트를 찾아보기로 한 테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배에서 느껴지는 작은 움직임에 멈춰서고 말았다.
“이건 또…….”
뭐지?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자연스럽게 배를 두 팔로 감싸 안은 테사는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익숙하고 낯익은 목소리를 시작으로 수많은 목소리들이 그녀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헬, 너는 나중에 뭘 하고 싶어?’
‘기사가 되어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거야.’
‘나는…… 그냥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이 고아원을 나가 작은 집에서 내 마음대로 하며 살 거야.’
‘그래, 꼭 그렇게 살자.’
꿈과 희망에 부풀었던 어린 날의 헤르트와 나누었던 대화들.
그리고…….
‘순진하긴.’
절대 잊을 수 없었던 그날.
‘멍청한 년. 아직도 그 짝이니 읽지도 못하는 계약서에 순순히 지장이나 찍었겠지.’
‘아니야! 아니라고! 당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이거 놔! 이거 놔! 못 가, 난 못 가! 헬! 헬!’
처절하게 내뱉는 제 울부짖음에 테사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나 환청들은 계속해서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싫어, 그만해……. 그만…….
‘너 진짜 순진하구나? 너 같은 고아를 왜 내 하녀로 쓰겠니. 넌 그저 내 대신일 뿐이야.’
‘나약한 소리 좀 하지 마. 현실을 받아들여. 그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야.’
이어지는 다른 목소리들. 테사는 그것들이 듣기가 싫어 한없이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아도 한때 그녀의 심장을 날카롭게 헤집었던 음성들은 자꾸만 들려왔다. 절대 잊지 말라고, 이 현실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것처럼 테사를 계속 흔들어놓았다.
‘쓸모없는 년 같으니라고.’
‘건방진 년, 팔려 온 주제에! 네년이 뭔데 나를 무시해!’
숨이 막힌다. 테사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그 목소리를 덮으려 비명을 질렀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하지만 테사가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과거의 목소리들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것들은 테사의 귓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테사는 이제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제발, 그만해!
‘뭐, 검투사 노예로 팔려갔으니 당연한 일이죠. 안타깝게 됐습니다. 그러니 이만 잊으시죠.’
‘멍청한 년, 주제를 알아야지.’
‘도와주세요! 제발요!’
‘어차피 팔려 온 거잖아요, 당신. 이것도 당신의 몫이에요.’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렇게 소리쳐 봤자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몇 번을 말해. 네 말을 들어줄 사람은 여기에 없다고 했잖아, 이 개 같은 년아!’
짜악! 날카로운 소리에 테사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한번 저도 모르게 제 배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야, 테사. 왜 날 배신했어?’
아아…….
테사는 이제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눈가에서는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더는 제게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심하게 몸을 떨며 소리 없는 울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대신 이거 하나만 약속해.’
‘다시는 나 배신하지 마.’
‘7년 전에 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 잊어볼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그러니까 그거 하나만 약속하자, 우리.’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은 채였지만 그 손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래서 테사는 그와 함께하고 싶다고 욕심을 내었다. 다시 한번 그와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리하여 약속을 했다. 어렸던 그날처럼,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굳게 맹세했다.
그런데…….
왜 나는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넌 항상 나를 미치게 만들어.’
‘네 마음도 나와 같으면 좋을 텐데.’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 바라는 모든 걸, 모두 얻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 왜 말하지 못했을까. 나도 너와 같다는 것을. 테사는 눈물을 죽죽 흘리며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 벌어진 틈새로 후회가 계속 흘러내렸다.
미안해, 헬. 내가 정말로 미안해, 헬. 말해야 했어. 너에게 그 말만큼은 직접 말해 줬어야 했어. 그런데 나는…… 지금 여기에 있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쳤어. 무서워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모든 걸 잊었어.
모든 걸 잊고, 여기에 남으려고 했어.
‘넌…… 잘못한 거 없어.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죽지 마…….’
‘제발…….’
‘테사…….’
네가 죽지 말라고 했는데.
살아달라고 부탁했는데…….
내가 그걸 저버렸어.
심지어…….
우리의 아이조차도.
테사는 제 배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제 뱃속에 그동안 잊었던, 외면했던 헤르트와 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살겠다고 지금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라고. 모든 걸 기억해 내라고.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어미를 위해 아이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미안해, 아가야……. 엄마가 너무 미안해…….’
모든 것이 다 생각나자 테사는 도망치기만 했던 자신이 너무 밉고 원망스러워서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행복했다고? 깨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행복해? 그저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헛된 망상이었을 뿐인데. 그 가짜의 달콤함에 속아 이곳에 영영 남으려고 했다니. 테사는 여전히 미련하고 멍청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욱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제 목숨보다 소중했던 그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들을 잊을 수가 있지? 어떻게 여기에 계속 남아 있을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이윽고 테사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었다.
지금이라도 모든 걸 바로 잡아야만 했다.
더는 도망치지 말자고.
사랑하는 그들의 곁에 머물기로,
테사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난 테사는 바깥과 이어진 문을 열었다. 그러자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환한 빛이 그녀에게 쏟아져 내렸다. 테사는 망설이지 않고 빛을 따라, 그 빛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는 드디어 꿈에서 깨어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