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이만 일어나.”
슬픈 목소리에 테사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활짝 열린 창을 통해 지저귀는 새 소리들과 쨍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테사는 느리게 기지개를 피며 옆을 살펴봤다. 옆에 있어야 할 헤르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가운을 꿰어 입고 뻐근한 두 다리를 애써 무시한 채 침실 밖으로 나왔다.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났어.”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헤르트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테사는 종종걸음으로 헤르트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가득 껴안았다. 등에 코까지 박으며 얼굴을 파묻자 헤르트가 옅게 웃음을 터트린다.
“뭐 만들어?”
“내 수제 토스트. 저번에 이거 먹고 싶다며.”
“응, 먹고 싶었지!”
“가서 앉아 있어. 금방 끝나.”
헤르트의 지시에 테사가 순순히 식탁 근처에 앉았다. 미리 세팅되어 있는 식기와 주스에 테사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머지않아 헤르트가 계란물을 입혀 구운 토스트를 가져다주었다. 노르스름하게 잘 구워진 토스트와 그 위에 뿌려진 설탕은 벌써부터 테사의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진짜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뜨거우니까 조심.”
“또 애 취급 한다니까.”
“그거야 네가 워낙 덤벙대서 그렇잖아.”
“요즘은 안 그래.”
툴툴거리면서도 내심 싫지만은 않은 듯 테사가 토스트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속살에 테사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역시 아침에는 이게 최고지. 헤르트도 제 토스트를 가져와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밥 먹고 이따가 뭐할까.”
“가게에 잠시 들러야 할 것 같아. 두고 온 게 있어서.”
“그럼 나가면서 장도 보자.”
“좋아. 맛있는 것도 해먹자.”
오랜만에 찾아온 헤르트의 비번이었다. 테사는 오늘만큼은 느긋하게 헤르트와 하루를 즐길 생각이었다. 다음달에 자넷이 영지를 떠나면 헤르트가 더 바빠질 테니 당분간 이런 여유를 즐기리란 어려울 터였다.
토스트를 반쯤 다 먹어갈 쯤이었다. 테사는 이상하게도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에 물을 찾았다. 그 때 헤르트가 불현듯 물었다.
“너 요즘 낮잠 많이 잔다며.”
“아……. 그거. 이번에 가게도 시작하면서 몸이 피곤했나 봐. 종종 깜빡 잠이 들더라고. 곧 적응하면 괜찮아지겠지.”
근래 가게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헤르트에게 말한 듯싶었다. 테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헤르트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오늘 나가는 김에 의원에도 들리자.”
“갑자기? 아냐, 나 괜찮은데…….”
“오늘 가. 시간 있을 때 가야지. 나 없을 때 너 갑자기 아플까 봐 그래. 저번에 나 없다고 혼자 몰래 앓다가 너 정신 잃은 건 기억도 안 나?”
“으응……. 알았어.”
헤르트의 가벼운 질책에 테사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헤르트는 제 몸보다 테사의 건강을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테사는 그런 헤르트의 세심함이 좋으면서도, 그도 제 몸을 더 적극적으로 챙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혹 커다란 부상을 입고 와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태평한 태도 때문에 테사의 속이 뒤집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벌써 배불러?”
테사의 접시에 반쯤 남아 있는 토스트를 보며 헤르트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평소라면 맛있다고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할 그녀가 오늘은 한 개도 다 먹지 못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진 것 같았다. 테사는 이번에도 별일 아니라는 양 입을 열었다.
“어? 어. 이상하게 오늘은 금방 배가 차는 것 같아서.”
“너 진짜……. 요새 몸 아픈 거 나한테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니야. 진짜 오늘은 배가 불러서…….”
테사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난 며칠 동안 유독 잠이 쏟아지던 제 몸 상태와 오늘 일에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닐 수도 있었지만 또 예외인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는 법이지 않은가.
“저기, 헬…….”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그게 아니라……. 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한테 아이가 생기면 어떨 것 같아?”
아이라는 단어에 헤르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럴 일 없어.”
“그래도 만약에…….”
“만약에도 없어. 아이가 생길 일도 없을 테니까.”
테사는 일순 차갑다고 느껴질 만큼 헤르트의 단호한 음성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들 사이에 아이가 생기는 것은 어렵다는 것 정도는 테사도 잘 알고 있었다. 고아원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은 이미 일찍부터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약속하기도 했고, 그만큼 피임도 철저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헤르트는 테사의 몸에 피임약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그녀를 대신하여 본인이 직접 남성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극악의 확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테사는 무언가, 그에게 섭섭해지려고 했다.
정말로, 만에 하나 극악의 확률을 뚫고서 아이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럴 리 없다고 단호히 말하는 건, 아이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헤르트는 테사가 아까부터 통 말이 없자, 재차 입을 열었다.
“테사,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아. 하지만 그 주제의 이야기는 이미 우리 사이에서는 완전히 끝난 거 아니었어?”
“나도 알아, 그래도…….”
“그만하자. 아침부터 너랑 그 주제로 말하고 싶지 않아.”
테사가 붙잡기도 전에 헤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접시를 치우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테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들 사이에 아이가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테사는 아무런 말 없이 밖으로 나가버린 헤르트의 태도에 점차 화가 나려고 했다.
‘내가 화를 내면서 말을 꺼낸 것도 아니고……. 그냥 단지…….’
이윽고 테사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접시를 치우고는 침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화가 났다는 걸 증명하듯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헤르트가 먼저 사과할 때까지 그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10분, 30분, 한 시간이 지나도 헤르트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뭐야……?”
테사는 다시 한번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이내 몸을 웅크리고 누워 눈을 감았다. 지금 당장 헤르트를 찾아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헤르트도 예민한 주제인 만큼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자. 그러면…… 조금이라도 나아지겠지.’
테사는 화를 진정하려 잠을 청했다.
툭, 투툭…….
쏴아아아아―
“그만 일어나, 테사.”
테사는 창문을 연신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을 보니 어두워진 하늘 아래에서 비가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테사는 급히 창문을 닫고서 방 밖으로 나왔다.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집 안에 깔려 있었다.
순간 번쩍 하고 커다란 소리와 함께 천둥이 쳤다. 테사는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두 팔을 안았다. 이상하리만큼 집 안이 춥고 어두웠다.
“……헬?”
테사는 헤르트를 찾아 그를 불렀다. 그러나 집 안 그 어디에도 헤르트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은 걸까? 테사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서 우산을 든 채 집 밖으로 나와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함께 가꾸었던 작은 텃밭에도, 닭장에도 헤르트는 보이지 않았다.
“……헬!”
헤르트의 이름을 크게 소리쳐 보지만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곧 먹히고 말았다. 테사는 덜덜 떨며 마니가 사는 이웃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집을 나서는 길목 내내 이상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을 전체가 침묵으로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어두운데도 불 하나 켜진 집이 없었다.
“마니? 마니!”
마니의 집에 도착한 테사가 다급한 마음에 문을 쾅쾅 두들기며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집 안에서는 어떤 소리도,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테사는 몇 번 더 마니를 부르며 문을 두들겼지만 아무도 없는지 집은 조용하기만 했다. 결국 테사는 마니의 집에서 벗어나 다른 이웃집 문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 어느 집 하나 인기척이 없었다.
“이게 무슨…….”
테사는 돌연 두려움이 들었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 혼자만 덩그러니 놓여진 기분이 들 리가 없었다. 테사는 울상을 지은 채 헤르트를 찾아 마을을 누볐다. 그럼에도 헤르트는 보이지 않았다.
테사는 할 수 없이 아무 집 마구간에 들어가 말을 끌고 나와 그 위에 올라탔다. 마을 어귀나 번화가에도 나가볼 생각이었다.
낯선 사람이 등에 올라타자 말이 히이잉거리며 푸레질을 했다.
“쉬이……. 미안해. 하지만 조금만 도와줘.”
테사는 말을 달래며 빠르게 마을 어귀로 나가보았다. 저 멀리 번화가가 보였지만 그곳도 마을처럼 불 하나 없이 모두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다.
테사는 이상하다 생각하여 더 멀리, 영지 성벽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그러자 정말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또렷하기만 했던 풍경이 조금씩 이질적으로 변하더니, 영지 끝에 도달할 쯤에는 유화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건…….”
테사는 유화처럼 흐르는 풍경 끝에 아주 새카만 어둠을 발견했다. 그 어둠 속에서 붉은 무언가가 저를 노려보는 것 같아 테사는 급히 말머리를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대체 이 모든 일들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디 가고, 왜 영지 끝은 저런 모습인지. 테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도망치듯 말에서 내려와 집으로 들어온 테사는 거실 한가운데 낯익은 인영이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헬?”
테사의 부름에 헤르트가 고개를 들어 테사를 바라봤다. 그는 전에 보았듯이 어딘가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테사는 그런 헤르트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헬, 이상해. 사람들이…….”
“다시 할래?”
“……무슨.”
“이거 말이야. 네 꿈.”
헤르트의 마지막 말에 테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하며 그를 쳐다봤다. 헤르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테사.”
“이상해, 정말 다 이상…….”
“우리한테 아이가 생기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지?”
어느새 헤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몹시 빨랐기에 테사는 도망치기도 전에 그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헬, 하지 마. 나 무서워……. 테사는 자신이 도망치지 못하게 꽉 잡고 있는 헤르트의 손을 보며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우리한텐 아이가 생기면 안 돼.”
“헬,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 모르겠어…….”
“왜냐면…….”
헤르트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테사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테사, 넌 지금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