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너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손 집어넣지 마.”
어느새 헤르트의 손이 테사의 옷 안으로 들어와 살결을 지분대고 있었다. 아 간지러워! 장난기 넘치는 사내의 손짓에 테사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헤르트는 테사를 아예 소파 위로 드러눕히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테사.”
헤르트가 짐짓 목소리를 낮게 깔자 그를 올려다보는 테사의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고아원을 졸업하고서 한 집, 그것도 한 방을 같이 쓰게 된 이후로 테사는 이다음에 벌어질 일에 대해 모를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처음에 두렵기만 했던 잠자리는 이제 서로의 심장이 뛰며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하고 소중한 행위였다.
“내가 널 떠날 일은 없을 거야.”
“…….”
“그러니까, 너도 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커다란 손이 테사의 작은 뺨을 감싸 안듯 어루만졌다. 여전히 그 뜨거운 손에 제 손을 겹쳐 잡으며 테사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쿵쿵 뛴다.
“……응.”
자신이 어찌 헤르트를 떠날 수 있을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문득 테사는 왜 결혼식을 올리지 않느냐는, 자넷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윽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조급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헤르트와 이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천천히 즐기고 싶었다. 간혹 시간에 쫓기다 보면 놓치는 것도 분명 있을 테니까.
오늘처럼 헤르트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청혼을 받고, 결혼식을 올리고……. 그렇게 그와 남은 일생을 모두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 과정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누가 뭐가 되었든 자신과 헤르트가 행복하면 그만이니까.
“약속할게, 헬. 널 떠나지 않겠다고.”
그녀의 대답에 헤르트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 웃음이 조금은 슬퍼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테사가 다른 한 손을 뻗어 헤르트의 뺨을 매만지려는 순간이었다.
“테사.”
“응?”
“넌…… 지금 행복해?”
헤르트의 물음에 테사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응, 행복해.”
이게 꿈이라면 절대 깨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
왕도엔 때 아닌 피바람이 불었다. 보르웬 후작은 칼리아스 공작을 시작으로 그의 세력들을 하나 둘 처리해 나갔다. 오랜 시간 전부터 작정하고 모아둔 증거와 약간의 조작된 정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심지어 중상을 입어 쓰러졌다던 선대 공작의 사생아는 보란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 앞장 서 그들을 처단했다.
대중들은 새롭게 나타난 영웅에 열광했고, 내막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자들은 얼음장 위를 걷는 듯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 제 목을 지키기 위해 몸을 사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암묵적인 공조 아래, 므슈 왕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단단하고 견고한 탑이 쌓아 올려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자리싸움이 끝을 보는 순간이었다.
“끅, 으……. 우어…….”
헤르트는 사슬에 거꾸로 허공에 매달린 채 도저히 인간이 내는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괴상한 소리를 내는 두 남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지조차 멀쩡하지 않은 그들은 이제 사람이라고 하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팔다리는 짝을 잃은 채 남은 하나조차 온전치 못했고, 머리카락은 모두 뽑혀 머리 가죽이 드문드문 벗겨졌고, 이는 몽땅 빠져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동공은 풀린 채 초점 또한 잡지 못했다. 한 마디로 짐승보다 못한 모양새였다.
그들은 7년 전, 테사와 헤르트를 팔아넘긴 중개인과 고아원 원장이었다. 협력하기로 한 헤르트에게 후작이 선물이라며 던져준 것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여자답게 빌어먹을 선물이었다. 그리하여 헤르트는 아주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복수를 시작했다.
그는 매일 그들을 죽지 않을 만큼만 고문하고 살려두었다. 처음에는 살려달라 소리치던 그들은 시간이 흐르자 죽여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죽여달라고 하지도 못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싫은 헤르트가 이를 모두 뽑고 혀를 잘라 지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헤르트의 허락이 있지 않는 한 쉽게 죽지 못할 터였다. 죽더라도 가장 마지막에, 최고로 고통스럽고 잔인한 죽음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그것이 헤르트가 원하는 바였고, 그들이 치뤄야 하는 죗값이었으니까.
“경, 오늘은 이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랑그가 헤르트에게 젖은 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그의 얼굴부터 온몸에 검붉은 피가 잔뜩 튀어 있었다. 그런 상관의 모습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섬뜩했는데, 테사가 쓰러져 깨어나지 않은 후로 그의 행보는 더욱 잔인하고 과감해지고 있었다.
“신전에서 연락은.”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합니다. 오늘도…….”
“……그래.”
젖은 수건을 받은 헤르트는 근처 의자에 앉아 얼굴을 문질렀다. 차가운 물기가 열기로 가득 찼던 얼굴을 조금이나마 식혀주는 듯했다. 그는 작은 숨을 내뱉으며 수건을 이마에 댄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그날로부터 테사가 깨어나지 않은 지도 어언 두 달이 넘고 있었다. 그동안 헤르트는 많은 변화와 많은 일들을 감내해야 했다. 가장 먼저 보르웬 후작에게 협조하여 칼리아스 공작의 세력을 정리하면서, 새 칼리아스 공작으로서 그 입지를 톡톡히 다져나갔다.
사람들은 후작이 말했던 대로 새로운 공작이 될 헤르트를 정의로운 영웅이라 찬양하며 크게 환호했다. 헤르트는 그런 대중들을 보며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힘겹게 삼켜야만 했다. 권력과 명예. 이 두 가지 모두 이다지도 쉬운 것이었다니. 기쁘지 않았다. 도리어 모든 것이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그는 점차 냉소적이고 비관적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자의 반, 타의 반 헤르트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하루바삐 누군가를 처단하고 숨 막힐 정도로 수많은 계약서와 서약서에 지장을 찍어가며 공작이 될 준비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정신을 계속 다른 곳에 두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테사 앞에서 목을 매달고 죽어버릴 것만 같았기에.
테사가 눈을 뜨지 않는다는 것은 하루에도 여러 번 헤르트의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고 망가트렸다. 때문에 매일 밤부터 아침까지 테사의 곁을 꼬박꼬박 지키면서도 헤르트는 수십 번씩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테사는 헤르트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테사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녀의 인생에서 헤르트를 만났다는 것뿐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난 후, 헤르트는 무너지는 제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그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소리 내어 울음을 토해 냈다.
미안해.
미안해, 테사.
내가 잘못했어.
내가 모두 잘못했어…….
왜 일찍이 테사의 억울함을 알아주지 못했을까. 테사가 자신을 배신할 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왜 그렇게 테사를 몰아붙였을까. 마지막에 테사의 말만 믿어줬더라면, 그녀의 말에 한 번이라도 더 귀를 기울여주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후회의 연속이었다. 테사가 쓰러진 것도, 깨어나지 않고 있는 것도 모두 제 잘못 같아서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눈가를 비집고 나왔다.
그가 테사를 붙잡고 할 수 있는 말은 잘못했다는 말과, 제발 눈 좀 떠달라는 말밖에 없었다. 헤르트는 정말로 미치고 싶었다.
헤르트는 7년 전, 자신과 테사의 일에 연루된 모든 이들을 찾아 무차별적으로 징벌하기 시작했다. 고아원 원장의 행태를 뻔히 알면서도 눈을 감아준 당시 고아원 지도사들과 그 지역의 영주. 더 나아가 테사가 팔려가듯 입적된 세테비얀 남작가의 사용인들과 그 일원들…….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후작과 손을 잡길 잘했다는, 웃기지도 않은 생각까지 했다. 지금 이 권력이 없었더라면 복수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들에게 복수를 했음에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한 느낌은 채울 수가 없었다. 그 빈틈으로 한기가 계속 몰아닥쳤다.
헤르트는 무릎을 꿇고 잠든 그녀에게 애원했다. 제발 일어나, 테사. 제발……. 어서 일어나서 날 보고 뭐라고 해. 미쳤냐고……. 제정신이냐고…….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냐고. 정도를 지키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그냥 아무 말이나 해봐. 날 미워해도 좋으니, 날 말려줘.
그러나 테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색색 작은 숨소리를 내며 기나긴 잠에 빠져 있을 뿐. 헤르트는 다시 한번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하얀 얼굴은 정말로 죽은 자처럼 평온해서, 언뜻 보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리라.
마치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마냥…… 편안해 보였다.
‘그 얼굴은…… 반칙이야.’
헤르트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몸을 꾸역꾸역 웅크렸다. 그렇게 동이 트고 사람들이 그를 찾아올 때까지 헤르트는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그 뒤로는 반쯤 포기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 어떤 감정에도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오색빛깔로 물들어 있던 그의 세상이 온통 회색빛으로 점철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헤르트는 빛바래진 세계를 맞이했다.
“……가봐야겠어.”
미지근해진 수건을 뗀 헤르트는 그것을 랑그에게 던져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랑그가 수건을 받아 들며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테사 님께요……?”
“그래.”
“그럼 옷부터…….”
랑그의 말을 무시한 채 헤르트는 밖으로 나왔다. 한낮이라 쨍한 햇빛이 내려쬐고 있었지만 그에게 보이는 것은 그저 평면적인 풍경뿐이었다.
그는 말을 몰아 신전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피를 반쯤 뒤집어쓰다시피 한 헤르트를 본 사람들이 경악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신전에 도착한 헤르트는 테사가 누워 있는 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헤르트를 그 누구도 가로막지도, 불러 세우지도 않았다. 워낙에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모두가 그를 알고 있었다.
헤르트는 익숙한 길을 지나 익숙한 방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하얀 침대에 곤히 누워 잠든 테사가 보였다. 그는 능숙하게 의자를 끌어와 그녀 곁에 앉으며 혼잣말을 했다.
“내 꼴이 우습더라도 참아줘. 너도 매번 그 얼굴…… 하고 있잖아.”
피가 묻은 손으로 차마 테사를 만질 수는 없어서 헤르트는 하염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건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다.
긴 침묵 끝에 헤르트가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테사, 넌 지금…… 행복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