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일어나세요, 부인.”
테사는 저를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그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집 근처에 사는 이웃집 아주머니, 마니였다. 그녀는 테사와 헤르트가 이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마니는 깨어난 테사에게 빵이 한아름 담긴 바구니를 흔들어 보였다.
“마니……?”
“안에서 자지,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날 저물면 입 돌아가겠다, 얘.”
“네? 아…….”
테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자신이 집 바깥에 있는 의자에 기대어 깜빡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언제 잠들었담. 그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요새 가게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근데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
“응? 여기서 자다간 입 돌아가겠다구.”
“아뇨, 그전에요. 저 깨우면서 부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마니가 제게 존댓말을 하며 저를 부인이라고 불렀던 게 갑자기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테사는 의아한 얼굴로 마니를 쳐다봤다. 그러자 마니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를 쳤다.
“어머, 얘는 무슨 소리야. 잠결에 헛것 들은 거 아니야?”
테사의 말을 가벼운 농담 취급하며 마니는 벌목한 나무 밑동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갓 구워서 가지고 왔는지 빵 위로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우리 아가씨가 좀 크더니, 벌써부터 부인 소리 듣고 싶은가 보네? 그래요, 샤인 부인. 잠 좀 깨시고, 이것 좀 맛보시겠어요?”
마니가 빵 하나를 집어 반을 갈랐다. 그러자 뽀얀 김과 함께 고소한 향이 터져 나왔다. 마니는 빵 반쪽을 테사에게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마니가 준 빵의 일부분을 찢어 입 안에 넣은 테사는 휘둥그레해진 눈으로 재차 마니를 쳐다봤다.
“너무 맛있어요!”
“그치? 작년에 수확한 밀로 만들었어. 여기에 우유랑 치즈도 아낌없이 넣었지. 신나서 이것저것 구웠더니 많이 남아서 말이야. 이왕 나눠 먹으면 좋잖아.”
“역시 마니의 요리 실력은 대단해요. 저도 마니의 요리 실력의 반이라도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 얘. 아부는. 하기야 내가 왕년엔 후작가에서 주방 하녀로 일했잖니. 그 실력이 어디 가겠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마니를 보며 테사도 덩달아 함께 웃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묘한 기분에 평소보다 마음껏 웃을 수가 없었다. 뭐지? 아까부터 계속……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듯한 이 기분은?
테사는 애써 껄끄러운 마음을 떨쳐내려 노력하며 빵을 조금 뜯어 다시 입 안에 집어넣었다. 적당히 짭쪼름하고 고소한 빵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아 잠시나마 기분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보다 샤인 경은? 아직 안 왔어?”
“아, 오늘은 월례회의 때문에 조금 늦는다고 그랬어요. 곧 사교 시즌이라 영애께서 왕도로 떠나셔야 하잖아요.”
나머지 빵이 들어간 바구니를 챙기며 테사가 마니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맛있는 빵을 받았으니 차라도 한잔 대접할 겸, 이전에 만들어둔 산딸기잼이라도 답례로 선물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샤인 경도, 자넷 아가씨를 따라 왕도로 가는 거야?”
“……네?”
“왜 그렇게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야? 이번에 정식 기사가 되었으니, 한 번쯤 왕도에 갈 만하잖아. 기사 서임도 제대로 확인받아야 할 테고.”
“……그렇네요. 저도 잊고 있었어요. 지난 몇 년간 영지를 떠나 본적이 없다 보니……. 오늘 회의한다고 했으니, 곧 결정되지 않을까요? 그보다 마니는 저보다 잘 아네요. 저는 기사 서임을 한 번 더 확인받아야 하는 것도 몰랐어요.”
탁자 위에 빵 바구니를 올려놓고 찬장을 열어 찻잔들을 꺼낸 테사가 지나가는 투로 차분히 대답했다. 그런 테사를 지켜보며 마니가 적당히 의자를 끌어 앉으며 경쾌하게 말했다.
“나는 후작가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니까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것도 많지. 아, 그러고 보니 옛날 생각나네. 그때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내가 그 얘기도 했던가?”
“아직 풀 게 더 남으셨어요?”
마니는 종종 옛날 생각이 난다면 후작가에서 일했던 이야기들을 테사에게 말해 주곤 했다. 대개 그녀의 경험담은 이곳에서 잘 벗어날 리 없는 테사와는 거리가 먼 얘기들이었기에 테사는 마니가 겪었던 하녀 시절의 일들을 흥미롭게 듣곤 했었다.
“그럼, 거기서 일한 시간이 몇 년인데. 아직 안 푼 이야기들이 엄청 많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이번 이야기는…….”
“어머, 세상에.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네. 나 이만 가봐야겠다.”
날이 저무는 것을 발견한 마니가 화들짝 놀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테사가 선물로 준 산딸기잼을 옆구리에 끼고서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 마니를 배웅하기 위해 테사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아무튼 잼 고마워. 잘 먹을게.”
“저야말로 빵 맛있게 먹을게요. 고마워요, 마니.”
“이웃 좋다는 게 뭐야. 그럼 나중에 봐.”
테사는 멀어지는 마니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다가 이내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연거푸 빵을 먹었더니 저녁을 먹지 않아도 벌써부터 배가 불렀다.
‘헤르트가 좀 많이 늦네…….’
테사는 찻잔들을 치우며 시계를 확인했다. 늦는다고 아침에 전해 듣기는 했으나,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헤르트의 귀가 시간이 많이 늦어지고 있었다. 자넷의 호위 문제 때문에 회의가 길어지고 있나? 테사는 괜히 창가를 기웃대었다.
“별일 없겠지…….”
날이 더 어두워지자, 테사는 할 수 없이 그를 기다리는 것을 멈추고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면 진작에 연락이 왔을 터였다. 헤르트는 이런 면에선 테사를 걱정시키지 않는 편이었다. 걱정을 해도 자신이 하는 게 낫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기도 했다.
다행히도 테사가 다 씻고 욕실에서 나올 쯤에 헤르트가 집에 돌아왔다.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선 모습 그대로 멀쩡한 헤르트의 모습에 테사는 머리 말리는 것도 잊은 채 그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헤르트가 옅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려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생각보다 회의가 길어졌어.”
“아냐,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어.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연락했을 거잖아.”
“그래도 미안해. 걱정하게 했네.”
“괜찮다니까.”
헤르트를 직접 보고 만지고 나서야 테사는 그제야 마음 한편으로 불안했던 게 가라앉으면서 안도감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이렇게 조금 늦는 것도 마음이 불안한데, 만약에 헤르트가 왕도에 간다면 그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어떻게 지내야 하나 걱정도 들었다.
“너 감기 걸리겠다. 앉아봐, 머리 말려줄게.”
수건을 챙겨 든 헤르트가 테사의 젖은 머리를 보고 그녀를 소파로 이끌었다. 늘 그랬듯이 테사는 헤르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사내는 곧 익숙한 손길로 테사의 진저빛 머리를 정성껏 말려주기 시작했다.
머리를 말리는 동안 테사는 길고 풍성한 제 진저빛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잡아 배배 꼬다가 별안간 헤르트에게 물었다.
“헬, 나 머리 자를까?”
테사의 머리는 한 번도 짧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고아원 시절부터 늘 긴 머리였다. 머리를 자르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머리를 짧게 자를 필요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제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땋기 놀이를 하는 것도 나름 좋아하기도 했고.
“왜? 자르고 싶으면 잘라. 넌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릴 걸.”
“음, 정말? 단발도 잘 어울릴까?”
“뭔들 안 어울리겠어. 난 네가 마음에 들기만 한다면 다 좋아.”
“……뭐야. 맨날 내가 뭐 할지 물어보면 다 좋대. 가끔 보면 헬은 나에 대해선 분별력이 떨어지는 것 같애.”
다 마른 머리카락을 능숙하게 빗으로 빗어 정리하는 헤르트를 거울에 비쳐 보며 테사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헤르트는 비죽 튀어나온 테사의 입가를 보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너 내가 오늘 늦게 들어와서 삐졌지.”
“뭐? 아니거든?”
“그럼 그 입은 왜 나와 있는데.”
턱 끝으로 테사의 튀어나온 입가를 헤르트가 짓궂은 투로 지적하자 테사가 저도 모르게 눈이 동그래져서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이, 이건! 요즘 내 버릇이야. 가끔 이래.”
“네 버릇이랑 습관은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꿰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역시 삐진 거 맞네. 말해 봐. 내가 뭐 잘못했는지.”
손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 테사의 작은 허리를 감싸 안아 제 쪽으로 꽉 끌어온 헤르트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그 뜨거운 숨결에 테사의 발끝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
“잘못은 무슨…….”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니까 그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너랑 같이 지내다가 살 부대끼며 살기 시작한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어. 네 반응도 모르면 그건 등신이지.”
“…….”
“뭔데.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테사가 좀체 입을 열 생각을 안 하자 말캉한 입술이 목덜미를 물더니 서서히 목선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곧 귓가에 작은 바람과 함께 질척이는 혀가 닿자 테사가 펄쩍 뛰어오르듯이 몸을 비틀었다.
“흣, 너……!”
“그러니까 빨리 말해. 여기서 덮쳐 버리기 전에.”
“이 변태……! 알았어, 말할게. 말한다니까!”
“그럼 빨리 말해. 지금 네 옷 안으로 손 넣기 일보 직전이거든.”
그 말대로 테사는 커다란 손이 언제든지 제 상의를 들추고 안으로 들어올 듯 굴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낮게 소리쳤다.
“너 이번에 왕도로 가야 한다며? 기사 서임 다시 확인받아야 한다고. 왜 말 안했어?”
테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헤르트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훤히 드러났다. 그냥 말 한번 꺼내본 건데 진짜였나? 테사는 헤르트의 반응이 진지해지자 도리어 제 마음이 불편해졌다.
“……누구한테 들었어? 아직 정해진 건 없어. 최대한 안 가는 쪽으로 밀고 있기는 한데. 걱정 마. 너 혼자 두고 갈 일 없게 만들 거니까.”
“왜 안 가. 가도 돼. 나 때문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너 나 없으면 못 자는 거 다 알아.”
테사의 말을 자르며 헤르트가 단호히 대답했다. 이에 테사는 불편해졌던 마음이 다시 녹아들며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
“나도 너 없으면 못 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