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그나저나 가게가 참 예쁘네요. 개점하면 종종 찾아와야겠어요. 그때마다 나 반갑게 맞이해 줄 거죠?”
“그럼요. 자넷은 제 친구잖아요.”
꽃병을 찾아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옮겨 넣으면서 테사가 대답했다. 이윽고 꽃병을 들고 돌아온 테사는 햇빛이 길게 드리워진 창가에 꽃병을 놔두었다. 그러자 물기를 머금은 꽃잎에 햇빛이 내리쬐며 반짝반짝 빛이 났다.
“거 봐, 잘 어울릴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게요. 정말 고마워요, 자넷. 아, 이 앞에 나가서 차 한잔 할래요? 가게는 지금 정리가 덜 끝나서 마땅히 대접할 게…….”
“차는 됐고, 이 앞에 잠시 같이 걸어요. 호수 앞에서 나랑 피크닉 즐기면 더더욱 좋고.”
“아하, 이제 알겠어요. 피크닉이 목적이었군요!”
“알면 따라와 줄 건가요?”
자넷의 뻔뻔한 물음에 테사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가게 정리야 저녁까지 하면 되니까, 뭐. 테사의 승낙이 떨어지자 자넷이 작은 환호성을 지르며 테사를 밖으로 이끌었다. 결국 테사는 가게 문을 다시 닫고 자넷이 타고 온 마차를 이용해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수로 향했다.
두 사람은 호숫가에 돗자리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앉아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었다. 대개 서로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아무래도 다음 달에는 왕도로 출발할 것 같아요. 하, 준비할 게 얼마나 많은지. 피곤해 죽겠어요. 그냥 안 가고 싶은데. 솔직히 가봤자 할 거 진짜 없거든요.”
곧 사교계 시즌이 다가온다면서 자넷이 한숨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유독 사교계 시즌에 왕도로 올라가는 것을 견디지 못했는데, 가서 하는 일 없이 지루하게 시간만 버리고 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테사는 그런 자넷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직도 마음에 드는 영식은…… 못 찾으신 거예요?”
자넷처럼 지방의 젊은 귀족 영애가 사교계 시즌 때마다 왕도로 올라가는 목적은 대체적으로 한 가지로, 좋은 혼처를 찾기 위함이었다. 사교계 시즌은 어떻게 보면 젊은 귀족 남녀의 선 자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 거기서 거기라니까요, 테사. 하나같이 맹하고 못생긴……. 이럴 때면 테사가 너무 부러워요!”
돌연 자넷이 테사를 휙 쳐다보며 낮게 소리쳤다. 덕분에 당황한 테사가 눈을 깜박거렸다.
“……제가요?”
“테사는 이미 하나 있잖아요. 샤인 경이요.”
“아…….”
자넷의 말에 테사는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테사를 놀리듯 자넷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을 계속 이어갔다.
“샤인 경은 운도 좋지. 이렇게 이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온갖 매력은 다 가지고 있는 테사를 얻고 말이에요.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하여간 샤인 경은 평생 테사에게 잘해야 해요. 진짜 이런 여자를 어디서 만나?”
자넷의 말이 이어질수록 테사의 얼굴도 더욱 붉어졌다. 화끈거리는 열에 얼굴이 다 익어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테사가 그만하라며 앓는 소리를 할 때까지 자넷은 킥킥거리며 테사를 놀려먹었다.
“근데 진짜 거짓말 아니에요. 매번 테사랑 샤인 경 볼 때마다 이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은 처음 본다고 생각하거든요. 두 사람 고아원에서 만나서 같이 컸다고 했죠?”
“네, 거의 같이 자라다시피 했죠. 그래서 서로 가족이나 마찬가지예요.”
고아원에서 서로를 만난 이후로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늘 함께했다. 그건 고아원을 벗어나 독립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온갖 불안과 걱정에 떨면서도 그들은 서로가 있기에 버텨낼 수 있었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자넷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뭔데요……?”
“두 사람, 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예요?”
“……네?”
자넷의 물음에 테사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결혼식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미 결혼을 한 부부처럼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테사와 헤르트였기에 그 누구도 두 사람에게 결혼은 언제 하냐며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을 굳이 올려야 할 필요성을 딱히 느끼지 못하기도 했고.
“설마, 한 번도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죠?”
“…….”
“정말? 진짜로?”
부정하지 않는 테사의 반응에 자넷이 혀를 내둘렀다. 이에 변명하듯 테사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굳이 결혼식을 해야 하…….”
“굳이 해야죠. 이제 샤인 경이 정식으로 기사가 되었잖아요. 이제 평민이 아니라 준 귀족이 된 거라고요. 테사만 평민으로 남을 수는 없잖아요. 샤인 부인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으음…….”
자넷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정식 기사가 된 헤르트는 이제 평민이 아닌 준 귀족에 해당했다. 왕에게 직접 작위를 인정받은 귀족은 아니더라도, 영주처럼 높은 귀족 옆에서 가장 가까이 일하고 그에 맞는 대접을 받는 자가 바로 헤르트였다. 여기서 공이라도 세운다면 영지를 운영하는 귀족이 될 수도 있었다.
“샤인 경한테도 별다른 말 없었어요? 청혼이라든지…….”
연이은 자넷의 물음에 테사는 고개를 저었다. 헤르트가 정식 기사가 된 일은 몹시 기뻤으나, 그날 이후 그들의 생활에서 별달리 달라진 점은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그들은 얼굴을 마주 보고 식사를 하고 함께 잠이 들고, 같이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헤르트의 태도도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청혼도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니 테사는 헤르트에게 핀이나 팔찌 등의 장신구들은 종종 선물받았어도 반지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스갯소리로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말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늘 함께하자는 말은 했어도.
물론 테사는 그 말이나 저 말이나 모두 똑같았다고 생각해서 크게 고민해 본 적도 없었던 까닭에 새삼 그것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럼 제가 한번 운 띄워볼까요? 몰래 계획 중일 수도 있잖아요. 아, 이러면 깜짝 청혼이 아니려나. 아무튼, 오늘부터 유심히 살펴봐요. 난 샤인 경이라면 청혼은 당연히 벌써 하고도 남았을 것 같았는데. 이런 면에선 테사는 좀 안일하다니까요.”
자넷의 말에 테사는 정말로 자신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지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애써 헤르트도 지금까지 자신처럼 별다른 생각이 없었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그가 제게 청혼을 하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머릿속이 점차 복잡해져 가고 있을 때쯤이었다.
“제발 일어나, 테사.”
누군가 그녀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테사가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자넷이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자넷, 방금…….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넷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낮고 무거웠기 때문에 테사는 금방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짓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일 터였다. 이에 자넷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에 추기경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석상 앞에 서 있는 베아트리체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아까부터 줄곧 석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날개를 넓게 펼치고 있는 신은 자애로운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엄중하기도 했다.
“여기 계셨군요.”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 생각해?”
“어떤 형태로든 우리 주변에 계시죠.”
“그래, 너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석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을 까닥까닥거렸다. 남자는 이어질 그녀의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왜 그녀가 깨어나지 않는 거지? 네 신성력이면 웬만한 상처나 병은 모두 치료가 되었을 텐데. 너무 오랫동안 자고 있잖아.”
“리의 말대로 제 신성력은 웬만한 상처와 병을 치료하지만, 따지고 보면 만능은 아니라서 말이죠. 가장 중요한 걸 치료하지 못할 때도 있고요.”
“그게 뭔데?”
베아트리체가 추기경을 향해 돌아봤다.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마음이요.”
“마음?”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온전히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의 몫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거죠.”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영역이기도 했다.
감히 신이라 할지라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녀를 치료하는 순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어요. 홀로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어했을지……. 상처에서 고독함이 흘러나오더군요. 그를 대신하여 죽겠다고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겠죠.”
추기경은 석상 아래로 줄지어 놓아둔 양초 하나를 집어 들어 불이 꺼진 양초에 불을 붙여주었다. 곧 불붙은 초에서 주황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벗어날 마음이 없다면, 벗어날 수 없을 거예요. 마음에 심어진 심연은 정말 깊고 깊어서……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힘들거든요. 그 안락함은 모든 걸 다 잊게 만들어줘서, 모두들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어하죠.”
때때로 현실이 버거워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사람이 생겨난다. 그들은 대개 체념에 가까운 포기를 해버리는데 슬프고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더 이상 버틸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공허한 마음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마음이 마모되었기에 감정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한없이 침잠하는 기분. 무언가를 하려 해도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좌절감이 사람을 밑으로 끌어당긴다.
물론 이를 벗어나기 위해선 몸부림을 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머지않아 포기해 버린다. 그 발버둥 또한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테니까.
그저 이대로 가장 밑까지 가라앉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들은 죽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죽는 것조차 용기를 내어야 하기에, 그저 죽어도 괜찮다고 고요히 생각할 뿐이었다.
사내를 대신하여 화살을 맞은 그녀도 그랬으리라.
“그러면 영영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그것도 그녀에게 달려 있겠죠. 그 안락함을 놓지 못한다면 계속 그곳에 남아 있을 테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에요.”
남자는 석상을 올려다봤다.
신이 자애롭고 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긴 시간이 될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