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난 네게 기회를 주고 있어. 얼마나 특별한 대우인지는―”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본론이나 말해. 당신의 계획에 참여할지 안 할지는 내가 선택해.”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헤르트가 후작의 말을 잘랐다.
“이젠 내 쓸모가 달라졌잖아?”
헤르트는 순순히 후작의 먹잇감이 되어줄 생각 따윈 없었다. 보르웬 후작의 개로 살아왔지만, 늘 목줄을 끊기 위해 틈을 노리던 그였다. 그리고 후작이 아쉬운 소리를 하는 지금이야말로 연을 끊을 기회였다.
“아아, 그래……. 처음부터 그걸 노렸구나. 나와 협상을 하시겠다?”
헤르트의 뜻을 대강 알아차린 베아트리체는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베아트리체는 헤르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내 제안을 거절할 경우,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러니?”
“적어도 날 손쉽게 치워버리지는 못하겠지. 당신이 그렇게 만들어놨으니까. 그 잘나신 계획에 내가 없으면 곤란할 테고. 아닌가?”
돌아오는 대답에 베아트리체는 입맛을 다시고는 다시 한번 웃었다. 그래,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주인을 잃을 뻔한 개가 이를 드러낼 때는 자극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후작은 품에서 칼리아스 공작가의 인장을 꺼내 헤르트에게 던져 주었다. 한 나라의 유일한 공작가의 인장을 취급하는 손길치고는 퍽 험난했다.
“칼리아스 공작가의 인장이다. 네게 주마.”
“……정확히 내게 원하는 걸 말해.”
“네가 칼리아스 공작이 되는 거라고 지금 말하고 있잖아.”
베아트리체는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은 오래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이라, 한 번씩 휘저어줘야 해. 그래서 나는 이 나라의 모든 것을 하나씩 무너트리고 다시 세워나갈 생각이야.”
후작의 말에 헤르트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지금 보르웬 후작의 말뜻은 이러했다. ‘내가 왕국을 내 뜻대로 재조립할 건데, 네가 공작이 되어서 내 편을 들지 않을래?’
“네가 정의로운 칼리아스 공작이 되면, 모양새가 좋지 않겠어?”
“그래봤자 눈 가리고 아웅이야. 이딴 수작에…….”
“세간이 속을 것 같냐고? 그럼, 당연하지. 속다 못해 두 팔 벌리고 환영할걸. 네게 환호의 키스를 퍼부을지도 모르지.”
베아트리체는 그럴싸한 명분과 이미지 관리가 대중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이용해 제 오라비들을 밀어내고 보르웬 후작이 되었고, 제 동생을 왕비로 올렸으며,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거니까.
“그거 알아? 모든 건 단 한 끗 차이야. 거기서 거기인 게 이 바닥이라고. 속에 든 것이 무엇이 되었든, 포장지만 잘 바꾸면 사람들은 다른 거라고 착각에 빠지지. 실상은 바뀐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세상은, 본질적으로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때때로 부조리함을 깨부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서는 이들도 결국 큰 틀 안에서는 자신의 삶에 안주하고야 만다. 이렇듯 이 세상은 둥그런 원으로 쳇바퀴가 굴러가듯 하염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 안에서 섞이고 섞여, 누군가가 누군가의 자리를 대체하고 또 대체하는 걸 반복하면서 말이다.
“사람이 모이면 당연하게도 그 무리를 통제하려는 이가 나타나. 그렇기에 권력이라는 게 존재하는 거야. 그 형태가 물리적이든 추상적이든 우리 주위에 작용하는 거지. 거부할 수는 없어. 자연의 이치이자 섭리를 인간인 우리들이 무슨 수로 거스르나?”
“그래서…… 그 더러운 당신의 놀이에 나더러 광대가 되어라?”
“그렇게 생각하나? 뭐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난 단지 말해 주고 싶을 뿐이야. 결국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내가 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그리고 그걸 지금 네게도 나눠주겠다고.”
한정적인 자리에서 정해진 순리를 따라야 한다면, 베아트리체는 자신이 지배자가 되어 세상을 제 입맛대로 바꾸겠다 결심했다.
변화란 그런 것이다.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나오는 결과물.
이 세상도 인간이 먼저 문명을 일구고 권력을 잡았기에 인간들의 입맛에 맞춘 세상이 탄생한 것일 뿐, 아니었다면 다른 형태를 띠고 있으리라.
모두가 살기 좋은 유토피아? 그딴 건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할 수 없기에 갈구할 수밖에 없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당연시 여기며 주어진 것을 누린다 생각하겠지만, 그 또한 결국 다른 누군가를 쥐어짜서 만들어진 삶일 터. 모두가 똑같은 혜택을 누리며 살 수는 없었다. 그걸 알아차린들 그렇게 얻어낸 것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니 결국은 자리싸움이었다.
누가 더 혜택을 많이 가져가고, 지키느냐의 싸움.
인간이 세상에 나타난 이후로 이 싸움의 형태와 이름은 변해왔지만, 그 본질은 똑같았다. 고로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를 잡는 것이 현명한 것이었다.
“말했지, 난 네게 기회를 주고 있다고.”
헤르트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제 손바닥 안에 있는 공작가의 인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 시선을 눈치챈 베아트리체가 유려하게 말을 이었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킬 힘을 가져야 하는 법이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원할 수 있는 권력을 길러야 하는 법이지. 그 무엇도 아무 대가 없이 얻을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그런데도 계속 그렇게 손 놓고 있겠다고?”
베아트리체는 처음부터 헤르트를 무력으로 강압할 마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상황을 만들어주고 기다려왔던 것이다.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제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애당초 그녀의 훌륭한 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스스로 목줄을 끊은 지 오래였다. 고작 새 목줄을 가져와 다시 맨다 해도 금방 끊어버리고 도망갈 터였다. 한 번 터득한 경험은 뼈대가 되어 그의 삶에 계속 함께할 테니까. 그런 개를 잡아두기란 상당히 어렵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의에 의한 것이라면?
개는 누군가 명령해서 주인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자의로 주인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목숨을 바쳐 가며 충실한 것이다. 그만큼 자의보다 단단한 목줄은 없었다. 물론 그 목줄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지금 베아트리체에게 필요한 것은 이번 일을 뒤에서 받쳐 줄 개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니까.
“헤르트, 난 네게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네게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힘과 권력. 심지어 명예까지.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를 거절하는 건 멍청한 일이야.”
헤르트는 베아트리체의 말에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떴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남의 자리를 뺏어야 하며, 지금 제게 다가온 기회가 흔치 않다는 것 정도는. 후작은 그것을 알기에 제게 이리도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후작의 태도에 대해선 놀랍지도 않았다. 이것 또한 예상하고 있었다. 쓰러진 테사를 데리고 신전에 들어와 머무르는 동안 헤르트는 보르웬 후작이 바깥에서 벌인 일들을 랑그를 통해 꼬박꼬박 보고받았으니까.
후작은 가장 먼저 칼리아스 공작을 끌어내렸고, 그를 대외적인 악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대중은 칼리아스 공작에게 분노했고, 왕 또한 공작에게 실망한 것을 감추지 않았다. 베아트리체는 언제든 칼리아스 공작가를 내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당장 공작가를 내치지 않고 보류해 두고 있는 것은 바로 헤르트 때문이었다.
왕국에서 단 하나뿐인 공작가. 칼리아스 공작가는 왕국에서 독보적인 가치와 의미가 있었다. 후작은 이 가치와 의미를 모두 없애는 것은 아깝다 생각했다. 정의로운 영웅의 이미지를 뒤집어쓴 헤르트를 앞세워 새 공작가를 세상에 내놓을 예정인 것이다.
악당이 있다면 영웅도 있어야 사람들이 열광하는 법이니까.
심지어 지금 헤르트는 정의를 위해 싸우다 큰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부상을 이겨내고 다시 사람들 앞에 나선다면 이만큼 화려하고 완벽한 데뷔가 어디 있을까. 모두가 헤르트를 우러러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을 터였다.
한 번 정의의 편으로 생각하고 공감했다면, 이후 그가 행하는 일들에도 쉽사리 비난하며 돌아서지 못할 터. 그렇게 세간의 온갖 시선을 헤르트에게 모아놓고, 이 모든 걸 꾸민 자신은 무해하게 스며든다. 그래서 자신만의 단단하고 무너지지 않는 권력의 탑을 쌓는 것이 베아트리체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내가 알던 삶과는 완전히 멀어지겠지.’
헤르트의 시선은 여전히 공작가의 인장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 선택지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이대로 죽은 척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테사와 단둘이, 그들의 오래전 소망처럼 서로뿐인 소박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서로만을 위한…….
“지금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어. 적어도 난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는 모두 마무리를 했으면 좋겠는데.”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난 베아트리체가 방과 방 사이를 이어주는 저 너머의 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에 헤르트는 고개를 들어 후작을 쳐다보며 종래에 입을 열었다.
“나는…….”
***
오전에 집에서 밀린 일들을 모두 끝마친 테사는 오후엔 번화가로 나가 개점이 얼마 남지 않은 제 가게로 향했다. 그녀의 가게는 크진 않았지만, 각종 천과 레이스, 장식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정리가 다 되지 않아 부산스럽기는 해도 테사는 제 가게를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뿌듯함이 샘솟았다.
‘다음 주에 개점이니까…… 오늘은 더 열심히 정리해야겠다!’
테사는 가장 먼저 환기를 위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앞치마를 찾아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는 밤새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기 위해 먼지떨이를 들고 가게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먼지를 다 털고 나서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짐들을 풀어 매대에 하나씩 꺼내놓았다.
“테사, 안에 있어요?”
막 새 상자를 뜯으려던 차였다. 가게 밖에서 누군가가 테사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평소 테사와 친분을 유지하는 영주의 딸 자넷이 튤립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테사가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불렀다.
“자넷……?”
“아, 다행이다! 있었네요!”
“세상에, 여긴 어쩐 일이에요?”
“가게 개점이 얼마 멀지 않았다고 들어서요. 미리 축하할 겸, 오랜만에 나들이 나왔죠. 자, 이것부터 받아요. 테사의 머리 색이랑 어울리게 주황색으로 골라봤어요!”
자넷이 웃는 얼굴로 빠르게 다가와 테사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자넷의 말대로 테사의 진저빛 머리카락과 닮은 붉은 주황빛의 튤립다발이었다. 테사는 감격하는 눈빛으로 자넷을 쳐다보며 향긋한 꽃향기에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자넷. 꽃이 정말 예쁘네요. 잠시 앉아 있을래요? 꽃병 좀 가져올게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테사는 꽃다발을 안은 채 안쪽으로 종종 걸어가 꽃병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