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테사, 테사!”
머지않아 사내의 팔을 잡았던 핏기 없는 흰 손이 툭 떨어졌다. 그 기점으로 헤르트의 시간도 함께 멈춘 듯했다. 그는 먹먹한 고요함 속에 눈을 감은 채 제게 안겨 미동도 없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사랑하는 그녀가 눈을 뜨지 않는다.
헤르트는 차마 그런 테사를 흔들어 깨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등에서 계속 흘러내리는 그녀의 검붉은 피는 너무 붉어서 바라보는 이의 눈이 다 아플 지경이라, 현실과 망각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기분도 들기에. 그 어중간한 경계를 깨트리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기에.
그래, 이건 꿈일 거야.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지독한 악몽일 테지. 다시 눈을 뜨면 너는 언제 그랬냐는 양 웃으며 나를 반겨줄 거고. 그렇지? 응? 테사, 제발 그렇다고 해…….
그러면 이 짓궂은 장난 정도는 웃으며 넘어갈 테니까…….
어느덧 눈가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모든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 이 와중에도 현실을 외면하려 하는 제 꼴이 너무 우스워서.
헤르트는 차게 식어가는 테사를 안고서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테사, 네가 나였다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길 바라?
도저히 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헤르트는 테사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알고 있음에도 그는 하염없이 답을 기다렸다. 그녀가 눈을 떠서 제게 괜찮다고, 울지 말라고 말해 줄 때까지. 그 순간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아는데도 그는 그것 또한 기다렸다.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져 조금씩 먼지가 쌓이는 테사의 어깨를 적신다. 헤르트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몇 번이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한시라도 눈을 떼면 그녀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기에. 눈처럼 녹아 흔적도 없이 저를 두고 떠날 것만 같아서.
이러지 마.
제발…….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테사…….”
일어나, 제발.
내가 모두 잘못했어. 넌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다고 했잖아. 그러니, 어서 눈을 떠. 날 이렇게 혼자 내버려 두지 마. 우리 이제 함께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확실하게 마무리만 지으면 이제 끝이라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만 남았다고. 본디 제 것이어야 했던 테사의 옆자리를 차지하여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비록 작은 집은 아니겠지만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 정도는 이제부터 꾸려나갈 수 있을 거라고.
‘꼭 그렇게 살자.’
오래전, 함께 했던 약속을 이제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발…… 제발!”
넋을 잃은 헤르트는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테사의 이름을 애가 타도록 몇 번이고 불렀다. 그래서 제 목소리가, 제 부름이 그녀에게 닿을 때까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는 테사를 부둥켜안고 끊임없이 애원하고 빌었다.
제발, 제발 그녀를 살려달라고.
이 작은 여자를 그리 쉽게 데려가지 말라고.
“죽지 마! 테사, 제발…… 날 두고 가지 마. 제발, 이렇게 빌게……. 그만 눈 좀 떠……! 날 버리지 마! 제발…….”
다시 한번, 테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활짝 웃어주는 그 눈부신 미소를 다시 보고 싶었으니까. 남의 눈치를 보며 움츠러들기 바쁜 모습이 아니라, 예전처럼 당당하고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모습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그녀에게 해를 끼칠 수 없도록, 모든 걸 테사의 손에 쥐여줄 생각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그러기 위해 내가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너는 왜, 날 두고 가려 해.
어떻게 모두 끝났다는 얼굴로 눈을 감을 수가 있어.
“경!”
랑그가 헤르트를 향해 크게 소리치면서 느리게 멈추었던 헤르트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먹먹해졌던 귓가에 소란스러운 말소리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오고, 하나 둘 아는 얼굴들이 보인다. 랑그가 헤르트에게 정신 차리라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조금만 진정하십시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잖습니까!”
테사를 끌어안고 우는 헤르트 때문에 케니스가 테사를 쉽사리 진찰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랑그는 병사들에게 헤르트를 붙잡고 있으라 명한 뒤 케니스에게 진찰을 부탁했다.
“케니스 씨, 당장 테사 님을 살펴봐 주십시오!”
랑그의 재촉에 케니스가 서둘러 테사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도 테사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심박수가 느려지고 체온 또한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기에 지금 당장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살려내! 당장 살려내라고!”
케니스의 표정이 어둡게 변하는 걸 발견한 헤르트가 금방 달려들 것처럼 소리쳤다. 때문에 그의 몸을 단단히 붙잡은 병사들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 할 수 없이 랑그까지 가세해 헤르트를 막아서며 케니스에게 물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그게……. 지금 당장 치료를 할 수가…….”
테사에게는 치료가 시급했지만 그렇다고 이 바깥에서 테사의 등에 박힌 화살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약도, 수술 도구도 그 무엇 하나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화살을 뽑았다간 테사의 상태가 더욱 악화될 것이었다.
성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테지만, 성은 진즉에 무너진 상태였고 케니스도 급하게 성을 빠져나오면서 약과 도구, 무엇 하나 챙기지 못했다. 그 까닭에 그녀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는 흘러나오는 피를 지혈하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안 되는 겁니까?”
“자, 자리를…… 옮겨야 해요! 약도, 도구도 없는 이런 곳에서 부인을 치료할 수는 없어요. 화살로 인한 자상은 칼로 인한 자상보다 더 깊은 곳에 있어서…….”
“그럼 옮기도록 합시다! 이 근처에 보급 부대가 있어요, 거기엔 막사도, 약도 있을 겁니다! 당장 들것을 가져와라!”
케니스는 테사의 후송이 쉽도록 단도 하나를 빌려 등에 박힌 화살 마디를 조심스럽게 잘라내었다. 그 와중에도 테사는 미동 한 번 없이 창백한 얼굴로 줄곧 눈을 감고 있어서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제발, 부인.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이거 놔, 내가 직접 옮기겠다.”
겨우 이성을 찾은 헤르트가 자신을 붙잡는 병사들을 뿌리치고 직접 테사를 들것으로 옮기던 중이었다. 저 멀리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병사 하나가 랑그와 헤르트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와 또 다른 지원군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이윽고 교단의 깃발을 휘날리며 흰 말들이 그들 가까이 다가왔다. 하얀 망토와, 금빛의 갑옷. 교황청의 직속 성기사단이었다.
그중 가장 선봉에 있던 남자가 헤르트와 테사를 발견하곤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들에게 서둘러 다가왔다.
“제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니길 바랍니다.”
***
쏴아아아―
테사는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결에 무심코 눈을 떴다. 활짝 열린 창가 밖으로 노을이 내려앉고 있는 주황빛의 능선이 제일 먼저 보였다. 날씨가 좋아 창가에 기대어 책을 읽는다는 것이 본의 아니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상하다, 되게 긴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오늘따라 유달리 피곤하다 생각하며 저물어가는 해를 잠시 쳐다봤다. 낮에도 끝내주게 좋은 풍경이었지만 노을이 내려앉으니 또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예쁘다…….’
비록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웃돈을 얹어서 집을 사야 했지만 그래도 이곳에 자리를 잡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테사는 열린 창문을 닫았다. 곧 기사단에 출근한 헤르트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가 오기 전에 저녁을 준비해야 했다.
몇 해 전, 성인이 되어 고아원에서 독립했던 두 사람은 운 좋게도 헤르트가 한 영지의 기사단에 견습기사로 발탁되면서,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 작은 집에서 헤르트와 함께 마음대로 살고자 했던 테사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올해는 헤르트가 영주에게 노고를 인정받아 견습기사에서 정식기사가 된 기쁜 해였다. 테사 또한 일주일에 서너 번 마을 번화가로 나가 그곳에서 포목점 일을 배우다가, 이번에 자신만의 가게를 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한때 서로가 그렸던 미래대로 그들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저번에 사둔 와인이랑 어울리는 걸 만들까?”
느슨해진 허리의 앞치마 끈을 다시 동여매며 테사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능숙하게 미리 준비해 둔 반죽을 빵틀에 넣어 화덕에 굽고 재료들을 하나 둘 꺼내어 손질했다.
머지않아 집 안은 고소하고 먹음직스러운 냄새들로 가득 찼다. 무쇠팬에 야채를 올리고 볶던 테사는 불현듯 생각난 사실에 눈을 크게 떴다.
“아! 달걀 가져온다는 걸 깜박했다!”
테사는 볶은 야채를 한 접시에 담아두고 서둘러 집 밖으로 나와 닭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매일 아침 달걀을 꺼내놓는데, 오늘은 유독 늦잠을 자서 잊어먹었던 게 이제야 생각이 나다니.
그녀는 능숙하게 달걀들을 찾아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닭장에서 나왔다가 막 집 입구로 들어서는 헤르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헬!”
“테사.”
테사에게 가까이 다가온 헤르트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이마에 작은 입맞춤을 남기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테사도 그를 향해 활짝 웃으며 수줍게 뺨을 붉혔다.
헤르트는 달걀로 빵빵해진 테사의 앞치마 주머니를 보며 피식거렸다.
“웬일로 오늘 늦잠 자더니, 달걀 꺼내는 것도 까먹었어?”
“그러게, 오늘 이상해. 나 원래 늦잠 잘 안 자잖아. 그리고 낮에도 창가에서 책 읽다가 또 자버렸어. 무슨 꿈도 꿨던 것 같은데.”
“너 그러다가 밤에 못 자면 어떡하려고.”
“그건 걱정하지 마, 네가 날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것보다 배고프지? 빨리 안으로 들어가자. 음식 거의 다 했어.”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늘 그랬듯이 서로 맡은 역할을 분담하며 저녁을 준비했다. 얼마 뒤 맛있어 보이는 식사가 차려지고 언제나처럼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헤르트가 이전에 사 온 와인의 마개를 따서 테사의 잔에 따라주며 말했다.
“아까 꿈꿨다고 했잖아. 무슨 꿈이었어?”
“꿈? 아……. 낮에 그거?”
테사는 헤르트의 물음에 오늘 길게 잤던 낮잠을 떠올렸다. 그저 지나가는 말이었음에도 헤르트는 늘 이렇게 테사의 말을 모두 기억해 놨다가 하나하나 물어보곤 했다. 그의 세심함에 오늘도 감동받은 테사는 방긋 웃어 보였다.
“몰라, 이제 기억 안 나. 별로 중요한 것 같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