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유테르트 성이 무너지고 난 자리에는 마치 안개처럼 흙먼지가 한가득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문드문, 성의 잔재들이 보였다.
성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이전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붕괴된 성을 허망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수백 년간 한 자리를 지켜온 개국공신 가문의 성이 사라지는 것은.
뒤늦게 성에 도착한 모젠은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제 상관이 통 보이질 않자 주변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샤인 경은 어디에 계시나! 경을 당장 찾아라!”
자욱한 흙먼지 때문에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일일이 얼굴을 들여다보며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젠은 흙먼지 속으로 파고들며 병사들과 함께 헤르트를 찾아 나섰다. 그 때, 한 병사가 모젠을 향해 소리쳤다.
“보슈 경, 찾았습니다!”
모젠은 병사가 소리친 곳으로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는 먼저 도착한 병사들의 부축을 거부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헤르트가 있었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그는 얼굴과 몸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상태였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경, 괜찮으십니까?”
“시끄러워. 그보다 얘부터 끌어다가 묶어놔.”
헤르트가 옷에 묻은 먼지를 거칠게 털어내며 땅바닥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가리켰다. 모젠은 시선을 돌려 바닥에 있는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자는…… 유테르트 소후작 아닙니까?”
정신을 완전히 잃은 채 기절한 페르데일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작은 거품이 일었던 흔적까지 있었다.
“그래, 머저리 새끼지.”
“이자가 왜, 여기에…….”
“잔말 말고 묶어서 어디에 가둬놔. 일이 정리되는 대로 처리할 거니까. 그리고…….”
헤르트는 몸을 돌려 어느 한 곳을 쳐다봤다.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당신은 내게 말해 줄 게 있을 텐데? 안 그렇습니까, 후작 부인.”
성이 무너지기 직전, 헤르트가 선택을 내리려던 순간에, 후작 부인 엘레나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하녀에게 부축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엘레나는 헤르트에게 이 성에 테사가 없으며, 일찍이 그녀를 대피시켜 놓았다고 했다.
그제야 헤르트는 테사의 안전을 확신하고 미련 없이 성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을 무너트린 범인이 후작 부인임을 알아차렸다.
만약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헤르트는 꼼짝없이 무너지는 돌 속에 파묻혀 죽었을지도 몰랐다.
“왜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
“거래였으니까요.”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머리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닦은 엘레나가 헤르트의 물음에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 빌어먹을 보르웬 후작과 거래를 했겠지. 그게 아니라면 당신 혼자 이 모든 걸 준비하진 못했을 테니까.”
“잘 아는군요. 맞아요, 경. 이 모든 건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답니다. 나는 줄곧 오늘만을 기다렸고요.”
엘레나는 폭삭 주저앉은 성을 돌아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칫하면 자신도 저 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을 뻔했으면서도 그녀는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제 노력의 산물을 보니 기쁘기 그지없군요. 샴페인이라도 있었으면 축하주를 들었을 텐데.”
하하. 이윽고 엘레나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실성한 사람 같기도 했다. 헤르트는 그런 엘레나의 태도에 이를 악물었다.
“장난하나? 당신 때문에 지금 다 뒤질 뻔한 거 안 보여? 이딴 식으로 어떻게―”
“경, 미리 말하지 못한 건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군까지 속여야 할 때가 있는 거랍니다. 경에게 말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고요.”
웃음을 뚝 그친 엘레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헤르트의 말을 끊으며 답했다. 그 까닭에 헤르트는 더 따지는 것을 포기하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서 이 거래로 당신이 얻는 건 뭔데?”
“저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딴 말도 안 되는…….”
“복수와 자유.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거래였답니다. 경이 보르웬 후작의 사냥개가 되는 대신 그녀를 되찾은 것처럼요.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거지요.”
엘레나의 말에 헤르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수 없었다. 후작 부인의 말대로 자신도 후작의 미친개를 자처하는 대신에 테사를 찾을 수 있었던 거니까.
상대적인 가치를 지녔다는 말도 맞았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헤르트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터였다. 테사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무엇이든 바쳤을 테니까.
헤르트는 호흡을 가라앉히며 물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를 물었다.
“……대체 언제부터?”
“2년 전, 경이 후작과 만났을 때부터.”
테사를 돕기 위해 자넷이 유테르트가에 들어왔던 2년 전, 엘레나는 자넷을 통해 가주 자리를 꿰찬 조카와 연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제 남편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안받았다. 늘 그 기회를 기다렸던 엘레나는 그것을 놓지 않았다.
당시 조카가 거래를 앞세워 엘레나에게 요구한 것은 유테르트가의 모든 것이었다. 말 그대로 그녀는 ‘유테르트’라는 패를 원했다. 엘레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엘레나 또한 제 조카에게 거래의 대가로 요구했던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유테르트가의 몰락과 제 자유.
그리하여 거래가 성사된 그날 이후부터, 엘레나는 무해한 척, 아주 천천히 후작의 도움을 받아 유테르트가의 모든 것에 파고들었다. 사람, 권력, 치부, 재산, 이름……. 그 모든 것은 철저히 후작이 앞서 걸어갈 길의 초석으로 이용되었다.
“하……. 아주 제대로 놀아났군.”
“후작은 그걸 필연이라고 말하더군요. 경을 만난 건 그녀가 얻어야 했던 열쇠 중 하나였다고. 덩달아 나 또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니, 경에게는 고마워하고 있어요.”
엘레나는 말하고 있었다. 보르웬 후작의 계획은 그를 만난 순간부터 시작되었노라고. 또한 그들의 계획에서 헤르트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고.
헤르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확인을 받으니 기분이 더럽기 짝이 없었다.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당신들한테 사람이 아닌 패로만 이용당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으니까.”
“경, 누구나 패가 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버려지느냐, 쓰여지느냐랍니다. 모두가 서로를 패로 이용하는 거예요. 후작도, 나도, 경도 서로에겐 아주 유용한 패인 거죠. 그 패가 모이면 얼마나 큰 힘을 내겠어요?”
엘레나는 헤르트를 설득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것이 헤르트의 속을 살살 긁어놨다. 엘레나는 다시금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경도 알고 있을 텐데요. 이 이상 발을 빼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경의 출신에 대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모를 리가. 그것 때문에 일이 이렇게 꼬였는데. 헤르트는 속으로 자조적으로 웃으며 볼 안쪽을 짓씹었다.
“잘 알고 있어. 내가 칼리아스 공작가의 사생아이기에 가질 수 있는 것들과, 그로 인한 나의 쓰임새가 얼마나 대단할지는.”
그간 보르웬 후작이 헤르트를 물심양면으로 밀어주었던 것은, 그가 독보적으로 잘 날뛰는 사냥개여서가 아니었다. 애당초 보르웬 후작은 고아 출신의 평민에게 제 다음 가는 권력을 쥐여줄 만큼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후작이 헤르트를 거두고 마음껏 날뛰게 뒤에서 손을 써주었던 것은, 그가 칼리아스 공작가의 숨겨진 사생아였기 때문이었다.
즉, 헤르트는 현재 칼리아스 공작을 갈아치우게 된다면, 그를 대신해 칼리아스 가문을 맡게 될 가장 효율적인 패였다.
“그러면 경의 역할도 알겠군요. 왜 내가 소후작을 이 성으로 불러들였는지, 그리고 유테르트 성을 무너트렸는지.”
엘레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 지원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이에 헤르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정말로 빌어먹을 여자다.
***
왕국의 하나뿐인 공작가가 쑥대밭이 되기까지는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른 새벽부터 왕비를 통해 받은 어명까지 내세워가며 공작가를 습격한 베아트리체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강제적으로 공작가의 정문을 열고, 그 안을 벌집처럼 들쑤셔 놓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는 개미 한 마리조차 살아서 공작가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공작가는 누군의 것인지 모를 피로 흥건했다. 베아트리체가 예상했던 모습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든 검에서 뚝뚝 흐르는 피를 내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에게 기사 하나가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각하, 모든 정리가 끝났습니다.”
“안내해.”
베아트리체는 기사를 따라 한 방으로 들어섰다.
오늘 벌어진 습격에서는 단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공작가의 주인이자, 국왕의 사촌인 칼리아스 공작이었다.
그는 양손과 양발이 포박된 채로 의자에 앉혀져 있었다. 핏줄이 터져 충혈된 두 눈은 베아트리체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칼리아스 공.”
베아트리체는 부하 기사가 가져온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자연스럽게 검을 제 옆 바닥에 찔러 세워놓았다. 그리고는 웃는 얼굴로 공작과 마주 보았다.
늘 눈이 부셨던 공작의 레몬빛 머리카락은 드문드문 피로 물들어 더러워져 있었다. 사실 공작의 얼굴과 몸 모두 검붉은 피로 더럽혀진 상태였다.
“이런. 얼굴을 보아하니, 내가 별로 달갑지 않은가 봐? 나는 공을 만나기 위해 이만큼이나 수고를 들였는데 말이야.”
베아트리체는 어깨를 으쓱이며 주변에 눈을 뜬 채 죽은 이들을 대강 훑어보았다. 그들은 제 주군을 어떻게든 지켜보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베아트리체가 나름 탐을 내었던 자들도 몇 명 있었다. 지금은 모두 죽어버렸지만.
“이런 짓을 하고도…… 천벌이 두렵지 않나?”
베아트리체를 노려보던 칼리아스 공작이 마지못해 입을 열어 갈라지고 깨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공작의 말에 베아트리체는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고작 그런 것이 두려웠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겠지. 내 손으로 내 아비를 죽이는 일도 없었을 테고.”
“이, 이런 간악한…….”
“공작, 그대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라고 보네. 그동안 나 몰래 깜찍한 짓들을 저질러왔잖아?”
베아트리체는 대기 중인 기사에게 손을 까닥여 무언가를 가져오라 명했다. 그러자 기사가 그녀에게 기다란 두루마리를 건네주었다. 베아트리체는 그것을 공작 앞으로 툭 던져 주었다.
“공작의 죄목이네. 내 특별히 국왕 전하께 말씀드려 정리해서 받아왔지. 고맙지? 하도 많은 일들을 저질러 다 기억나지도 않을 텐데, 이렇게 손수 정리해 줬잖아. 걱정 마. 이 은혜는 갚지 않아도 되니까. 알다시피 내가 워낙 아량이 넓은 사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