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저기 출구예요!”
빛을 발견한 마니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그들은 머지않아 어두운 통로에서 바람이 불고 있는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성의 뒤쪽 숲과 연결되어 있는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사!”
자넷이 테사를 발견하자마자 크게 안도하며 그녀에게로 단번에 뛰어왔다. 테사는 예상치 못한 자넷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자넷……? 테사의 바로 앞에 선 자넷은 테사의 두 손을 꽉 잡아 들어 올리며 반가운 기색을 표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늦기 전에 이렇게 빠져나와서요.”
“자넷도…… 무사했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맞잡은 손에서 자넷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테사는 괜히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자넷이 감옥에서 나와 별관에 갇혔다는 사실 외엔 별다른 근황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난 게 너무나도 반가웠다.
“누가 늦지 않게 데리러 와준 덕분에요.”
자넷이 제 뒤에 서 있는 이를 가리키듯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 아니, 테사 님.”
랑그가 앞으로 나오며 테사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테사는 자넷에 이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랑그를 발견하자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이리로 안내한 하녀를 돌아봤다. 하녀는 다른 이들의 등장에도 놀란 기색 없이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하녀를 통해 테사를 이곳으로 보냈던 후작 부인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걸까? 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그녀가 성에 남으면서까지 해야 한다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더불어 헤르트의 보좌관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그도 이 상황을 알고 있다는 걸까.
많은 생각과 의문이 뒤죽박죽이 되어 테사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테사가 용기를 내어 이 상황에 대해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랑그가 모두에게 재촉하듯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다들 움직이시죠.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랑그가 가리킨 곳에는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마차에 닿은 순간, 성에서 굉음이 났다. 이전에 테사가 들었던 것과는 결이 다른 소리로……. 이전의 소리가 무언가를 부수는 것처럼 들렸다면, 지금은 마치 거대한 절벽이 무너지는 것에 가까웠다.
“뭐, 뭐죠?”
“성이…… 무너지고 있어요!”
당황한 마니의 물음에 케니스가 성을 바라보더니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거대한 성이 조금씩, 위에서부터 뭉그러지듯 옆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에 랑그는 여자들을 서둘러 마차 쪽으로 이끌었다.
“어서 움직입시다! 여기에 있으면 위험해요!”
“테사, 제 손 꼭 잡아요.”
“잠깐, 자넷……. 안에 후작 부인이……!”
“후작 부인은 괜찮을 거예요.”
자넷에게 반쯤 끌려가듯 이끌려 마차 쪽으로 향하던 테사는 문득 후작 부인의 하녀가 자신들과 같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녀는 누군가 붙잡기도 전에 다시 통로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역할은 그들을 데려다주는 게 마지막이라는 양.
“자넷,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그리고 헤르트는…….”
테사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자꾸만 일이 커지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아 불안함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 없는 헤르트가 걱정되었다. 헬은 아직도 싸우고 있을까. 그는 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만에 하나 저 성 안에 헤르트가 있다면…….
그 순간 테사의 상념을 깨우는 자넷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인 경도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 테사, 지금은 우리를 믿고 따라와요. 알았죠?”
자넷의 단호한 음성에 테사는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이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마차는 빠르게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간발의 차로 성벽의 문을 닫고 들어온 헤르트는 곧장 내성으로 달렸다. 그리고 성에 도착하자마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쿠쿠쿵, 성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 징조에 헤르트가 욕을 짓씹으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성 안에 있는 이들을 밖으로 대피시켜! 자네들은 내 뒤를 따라와!”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헤르트는 말에서 뛰어내려 빠르게 성으로 진입했다. 성 내부는 이미 어수선한 상태로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흔들리기 시작한 성을 빠져나가기 위한 사람들의 발버둥과 비명 소리가 적나라하게 다가왔다. 그중에는 몰래 성에 침입한 것으로 보이는 적들도 더러 있었다.
‘뭐지?’
헤르트는 그런 적의 모습에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어 망설이지 않고 적들을 베어 넘겼다. 피가 촥! 하고 바닥에 흩뿌려지며 적이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렇게 적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헤르트와 그의 휘하 병사들에게 검을 몇 번 휘두르지도 못한 채 하나둘 쉽게 쓰러졌다.
헤르트는 더 이상 적이 보이지 않자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미간을 찡그렸다. 패닉 상태에 가까운 적들의 모습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성이 무너지는 건 이 새끼들한테도 예상 밖의 일이었나? 그러면 대체 누가…….’
헤르트는 적의 시체를 가볍게 발로 치우고 앞으로 뛰다시피 걸으며 저를 따르는 병사들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흩어져서 귀부인을 찾아라! 찾으면 당장 내게 보고해!”
상관의 명령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흩어졌다. 헤르트 또한 누구보다 먼저 테사가 머무는 방을 향해 달렸다. 성이 큰 소리를 내며 흔들릴 때마다 입안이 바짝 마르며 손끝이 떨렸다.
‘제발, 테사…….’
혹여 일이 잘못될 때를 대비해 자넷 벨로뎀을 비롯하여 성에 남겨둔 제 휘하 기사들에게 테사를 부탁하기는 했으나, 예외적인 상황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법이었다. 따라서, 테사가 성을 탈출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적의 침입과 동시에 느닷없는 성의 붕괴로 인해 모두가 혼란에 빠진 상황이라면 더더욱.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 성에서 나갈 수 없어.’
헤르트는 테사가 이 성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성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는 성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해도 나갈 수 없었다. 다시는 테사를 놓지도, 잃지도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돌에 깔려 죽는 허무한 죽음이라도 테사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은 최후였다.
‘빌어먹을…….’
헤르트는 테사의 방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습격을 받은 듯 널브러져 있는 병사들이 늘어나는 것을 발견하고 심장이 크게 내려앉은 듯한 기분을 겪었다. 그것만큼은 아니기를, 제발 무사하기를.
떨리는 마음으로 테사의 방 앞에 도착한 헤르트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열린 문을 통해 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테사!”
방 안은 비교적 깨끗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테사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에 헤르트는 안도해야 할지, 불안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테사가 자의로 방을 나가 성을 탈출했을지, 아니면 타의로 방에서 끌려나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을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성 안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테사, 나야! 들려?!”
방에서 나온 헤르트는 발걸음 닿는 대로 테사를 부르며 그녀를 찾았다. 아주 만약에, 테사가 탈출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제 목소리를 듣고 나와 주기를 바랐다.
얼마 후 헤르트는 저 멀리서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두 명의 병사와 함께 뜀박질을 하듯 가쁘게 움직이고 있는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저 새끼는…….”
그토록 잘근잘근 밟아 죽이고 싶었던 유테르트 소후작, 페르데일이었다. 전장에서도 통 보이지 않아 제 몸만 쏙 뺀 채 군대만 대신 보냈나 싶었더니만, 이런 곳에서 쥐새끼 짓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헤르트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고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활과 화살을 집어 들었다.
성이 흔들리며 중심을 잡기 불안정한 바닥 위에서도 능숙하게 활에 화살을 잰 헤르트는 페르데일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두 명의 병사 중 아무에게나 향해 활시위를 겨냥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소후작의 머리통에 화살을 꽂아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죽여줄 마음 따윈 눈꼽만큼도 없었다.
가장 마지막에 끔찍하게 죽여버릴 생각이었으니까.
피슉―!
헤르트가 활시위를 놓자마자 파공음과 함께 정확히 이마에 화살을 맞은 병사가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계단으로 굴러떨어졌다.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던 페르데일이 완전히 사색이 되어서는 소리를 지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씨, 히, 히발! 뭐, 뭐야!!”
헤르트는 다시 화살 하나를 주워 들어 남아 있는 다른 병사도 깔끔하게 맞혀 쓰러트렸다. 저를 보호하던 두 명의 병사가 순식간에 죽어 나자빠지자 페르데일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들고 있던 검을 뽑아 허공을 향해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비겁하게 숨어서 공격하지 말고, 나와서 더, 덤벼!”
활을 던져 버린 헤르트는 성큼성큼 페르데일을 향해 다가갔다. 머지않아 페르데일은 헤르트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는, 놀란 얼굴이었다. 헤르트는 그 얼굴을 칼로 후비고 쑤셔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너, 너, 너……! 어떻게……!”
“그 검, 제대로 휘두를 수 있기는 하고?”
“오지 마!”
헤르트가 거리를 좁혀가자 페르데일이 다시 한번 검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소리쳤다. 누가 보아도 엉성하기 짝이 없는 공격에 헤르트는 다른 의미로 속이 뒤틀리며 끓어올랐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저런 새끼한테, 테사가 오랫동안 학대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화가 솟아올랐다.
“시발, 오지 말라고―”
“닥쳐.”
퍽! 헤르트는 페르데일의 다리를 걷어차 가뿐히 그를 넘어트렸다. 기사도 아니고 제대로 훈련받은 적도 없을 사내 하나 제압하는 건 헤르트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같잖으니까.”
“아악!”
훅 들어온 공격에 페르데일은 볼품없이 바닥에 코를 박고 넘어지며 자연스럽게 손에서 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헤르트는 넘어진 페르데일의 흉부를 발로 꾹 짓밟으며 그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버러지 같은 등신 주제에―”
“컥, 흑……. 비, 악!”
“목숨 하난 끈질기지.”
“크윽……. 수, 숨이…….”
“그때 그냥 죽여버렸어야 하는 건데.”
벌레만도 못한 것을 쳐다보듯 헤르트는 페르데일을 내려다보았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푸른 눈동자는 어느새 살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 아득한 살의에 페르데일은 정말로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벌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