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페르데일은 분개하며 집무실을 뒤엎었다. 그가 찾는 물건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인장이 없지? 분명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그는 초조해져 엄지손톱을 이로 뜯으며 발을 탁탁 굴렀다.
‘그 자식이 내가 올 줄 알고 숨겼을 리는 없는데.’
영지전이 발발한 상황에서, 다른 가문의 인장을 숨긴다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었다. 가문에 소속된 사람 손에서나 중요하게 작용하는 인장이지, 상관없는 사람에게는 굴러다니는 금속뭉치나 다름없었다.
애당초 인장이 있는 장소도 어딘지도 모를 터였다. 대대로 가문의 주인들만이 인장의 위치를 알고 있었으니까.
페르데일은 씩씩거리며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애꿎은 의자를 발로 찼다.
“씨발!”
외벽 바깥에 헤르트 샤인의 발을 묶어두고 그사이 성에 몰래 침투한 것까지는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익명의 조력자가 성의 동태를 자세하게 알려주고, 침입을 돕는 일처리가 능숙하기도 했고, 페르데일 또한 지난 몇십 년간 성에서 나고 자라면서 익혀왔던 정보들을 십분 활용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성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였다. 가장 먼저 손에 넣어야 할 인장이 보이지 않자 페르데일은 화를 참지 못했다. 본래대로라면 챙겨야 할 것만 챙기고 서둘러 다시 성에서 빠져나갈 예정이었으므로, 지금의 상황은 페르데일의 예상에 없었다.
‘이래서는 시간만 지체될 텐데……!’
사실 페르데일은 자신이 앞장서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하나뿐인 목숨은 소중한 것이었다. 괜히 헤르트 샤인 앞에 나서서 제 아비처럼 목이 날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계획에서 페르데일의 역할은, 혼란을 야기한 뒤 필요한 물건들을 빠르게 챙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다였다. 성을 장악하고 싸우는 것은 다른 이들의 일이었다.
‘여기서 내 역할은 명분만 빌려주고 사라지는 거라고!’
그런데 챙겨야 할 물건 중 제일 중요한 인장을 챙기지 못하게 생겼으니 괜한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입에서 욕이 막 튀어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소후작님!”
그를 따라온 병사 중 하나가 집무실 안으로 뛰어들어 오며 페르데일을 급히 불렀다.
“그년은 찾았나?”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보는 페르데일에게 병사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아무리 성을 뒤져도 보이질 않습니다!”
병사의 말에 페르데일이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보이지 않아? 그는 당장이라도 병사의 멱살을 쥐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페르데일은 사나운 목소리로 병사를 다그쳤다.
“뭐?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 밖으로 나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텐데? 이 성은, 지금만큼은 완전히 우리 손바닥 안이라고! 분명 이 안에 있어! 다시 찾지 못해? 빨리 찾아서 내 앞에 데려다 놓으라고!”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혹, 벌써 비밀통로로 빠져나간 건 아닐까요?”
병사가 곤란하다는 기색으로 페르데일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페르데일은 그 말에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비밀통로? 그년이 거길 어떻게 알고? 네가 못 찾는 거겠지!”
성안에 숨겨진 비밀통로는 여러 개였지만 무엇 하나 남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가문의 인장의 위치와 함께, 비밀통로의 위치도 대대로 가문의 주인과 그 일가만이 알 수 있는 거니까. 팔려온 계집에 불과한 테사가 그걸 알 리 없었고, 그 통로를 통해 도망쳤을 수도 없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서둘러 움직여! 그 여자도 끌고 가야 하니까!”
페르데일이 다시 한번 더 사납게 소리치자 병사가 급히 고개를 숙이고서 집무실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이 와중에도 집무실 바깥에서는 여전히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끊이질 않았다. 페르데일이 몰래 데리고 온 병사들이 이곳에 남아 성을 지키고 있던 헤르트의 병사들과 싸우는 소리로, 그건 곧 페르데일이 성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란 얘기였다.
“찾았습니까?”
페르데일이 마지막으로 집무실을 초조하게 뒤집고 있을 때, 한 남자가 피로 범벅이 된 검을 들고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에 섬뜩해 하며 페르데일이 낮게 소리쳤다.
“아, 아니, 아직일세!”
“빨리 찾는 게 좋을 겁니다.”
“알아, 안다고! 그보다 자네도 가서 그 여자나 찾게나!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럼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
남자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다시 집무실 바깥으로 향했다. 페르데일은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소름이 돋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페르데일에게 따로 붙은 남자는 일반적인 병사가 아닌 자객에 가까웠는데,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질 경우 움직이게 될 최후의 수단이기도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빌어먹을, 이러고 있을 시간 따윈 없어.’
페르데일은 집무실 뒤지기를 그만두고 바깥으로 향했다. 친모라면 혹시라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여자도 엄연히 가문의 일원이었으니까. 조력자에게 듣기로도 서쪽의 첨탑이 아닌 성으로 들어와 지내고 있다고 하니, 물어봐서 손해 볼 건 없을 터였다.
‘문제는 그 여자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건데…….’
페르데일이 제 친모의 행방을 찾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병사 하나가 페르데일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페르데일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소후작님!”
“뭔가?”
“지, 지금 적들이 성벽 안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외벽을 지나서 지금…….”
“뭐?”
페르데일은 병사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다시 돌아오고 있다니? 그게 무슨……. 설마, 죽였나?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페르데일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외벽이 보이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병사의 말대로 저 멀리 헤르트의 군대가 성벽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전진 속도에 페르데일의 얼굴 또한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씨발, 어떻게……!”
다소 우려하던 제 말을 거들먹거리며 거만하게 받아쳤던 기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더니, 결국 헤르트 샤인에게 목이 날아간 모양이었다. 그것도 예상보다 빠르게.
페르데일은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손톱을 세워 창틀을 긁었다.
‘빌어먹을 새끼……. 이렇게 빨리 눈치채고 올 줄은…….’
하지만 제 계획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이렇게 밀고 들어오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이미 뚫린 성 안으로 무작정 후퇴라니. 자충수를 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령관이 죽었다 해도, 밖에 있는 페르데일의 군대는 아직 해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령관이 부재할 상황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대비해 두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지금 성안으로 돌아오면 모두 죽는 꼴이라는 걸 알 텐데? 일부러 양면 포위를 선택하다니, 무슨 생각인 거지?’
유테르트 성은 요새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헤르트 샤인이 이대로 성으로 돌아온다 해도, 이미 페르데일에게 한번 뚫린 성은 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의 발목을 붙잡을 터였다. 결국 페르데일이 원하는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성을 버리고 달아나거나, 아니면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그러나 상대는 그 헤르트 샤인이었다. 페르데일이 입어야 할 손해도 만만찮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하나뿐인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빌어먹을……. 당장 움직여! 일단 빠져나가야…….”
쿠르릉! 병사를 밀치고 앞으로 나아가려던 페르데일의 발걸음과 그의 뒤를 따르려던 병사들의 발걸음이 커다란 소리에 뚝 멈췄다.
순간 성안이 조용한 적막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서로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성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후작님, 지금…….”
“씨발, 이게 뭐야…….”
왜 성이 흔들려?
페르데일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모두가 현재 성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땅이 울리는 것이 아닌, 성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들 모두가 온몸으로 알아차렸다.
성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부턴 모두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소후작님, 당장 탈출해야 합니다!”
“성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 알아, 나도 아는데……. 대체 무슨…….”
성이 무너지는 건 그 어떤 계획에도 속해 있지 않은 일이었다. 페르데일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했다. 그래, 지금은 가문의 인장이고 뭐고 당장 이곳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천 개의 돌덩어리에 깔려 죽을 테니까.
“제, 젠장, 여기서 나가야……. 비, 켜! 비키라고!”
그 때였다. 도망치려는 페르데일 앞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여전히 그 방정맞은 성질머리는 못 버렸구나.”
***
하녀를 따라가는 내내 테사는 은연히 뒤를 슬쩍 돌아봤다. 성에 두고 온 후작 부인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후작 부인은 테사를 비롯하여 마니와 케니스를 비밀통로 앞까지만 데려다주고는 더 이상 함께 가지 않았는데,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며 성에 남기를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후작 부인의 하녀가 그녀를 대신하여 그들을 밖으로 인도하는 중이었다.
“잠깐만요…….”
테사는 어느 순간부터 미세하게 흔들리는 벽을 느끼고는 앞서가던 하녀를 불렀다. 대체 이 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말로 이대로 두고 가도…… 되는 건가요?”
“신경 쓰지 마세요. 마님께서 그걸 원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서둘러 움직여야 합니다, 부인. 시간이 얼마 없어요.”
하녀는 테사의 말을 일방적으로 잘라내며 더욱 빠르게 앞으로 움직였다. 때문에 테사는 할 수 없이 입을 다물고 하녀를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고 있는 건 하녀뿐이었으니까.
“그래요,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후작 부인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니 남으신 걸 거예요.”
테사의 어깨가 움츠러든 것을 발견한 마니가 작은 목소리로 테사를 달래듯 말했다.
“그보다 조심하세요. 앞이 잘 안 보여서 부인께서 넘어지실까, 저는 그게 걱정이네요.”
그들이 걷고 있는 성안의 비밀통로는 성만큼이나 오래되어 여기저기 무너져 있었다. 게다가 미로같이 복잡하여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무엇보다, 테사가 하녀를 놓치면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케니스와 마니도 함께 길을 잃게 될 것이기에 테사는 마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얼마나 걸었을까. 머지않아 통로 끝으로 희미한 빛이 흘러들어 오고 있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출입구에 가까워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