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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100화 (100/138)

100화

그 때 케니스가 엘레나의 말에 의문을 내뱉었다.

“마님, 지금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도저히 이해가……. 아니, 그보다 마님께서는 어떻게 이곳에 계신 거죠? 분명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헤르트의 출정 이후로 후작 부인은 움직임을 제한받았다. 그녀는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더불어 테사의 방에도 오지 못하게 영주가 단단히 일러두고 갔다. 그러나 테사의 방 앞에 쓰러져 있던 병사들……. 설마…….

케니스의 경악스런 얼굴에 엘레나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부인을 부축해 주지 않겠나? 홀몸도 아니니 도움이 필요할 거야.”

엘레나는 제 하녀에게 손짓해, 테사에게 후드를 입히라고 지시했다. 하녀는 재빠르게 들고 있던 후드를 테사의 몸에 걸쳐주고 테사를 앞으로 이끌었다. 그런 하녀의 앞을 마니가 급히 다가와 가로막으며 낮게 소리쳤다.

“안 돼요, 설명을 해주세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홀몸이 아닌 부인을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갈 수 없어요!”

“이보게, 시간이 지체할수록 상황만 안 좋게 돌아갈 뿐이야. 나중에 물어보게. 지금은 여기서 벗어나야 해.”

“아니요, 부인! 후작 부인은 무언가를 숨기고 계세요! 이상하다구요! 지금 이 일도 후작 부인과 관련된 일일지도 몰라요!”

케니스마저 안 된다는 식으로 테사를 향해 소리치자 엘레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럼 테사, 그대가 선택하는 건 어떤가요? 나를 따라갈지, 저들과 함께 여기 남을지. 테사가 선택하는 거예요.”

엘레나가 테사를 지그시 응시했다. 테사는 하녀에게 잡힌 제 팔과 하녀를 가로막은 마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선택을 하라고? 내가 어떻게……. 테사는 복잡한 낯으로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과연 내가 선택해도 되는 걸까. 이런 중요한 사안을?

“빨리 선택하는 게 좋아요.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으니까.”

엘레나의 재촉 아닌 재촉에 테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내 결심을 한 듯 가까스로 작은 목소리를 꺼냈다.

“따…… 따라갈게요.”

지금까지 테사가 보아온 후작 부인은 일관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테사에게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고작 이런 것들로 후작 부인을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후작 부인은…… 테사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하는 것도 같았다.

자신처럼 길고 긴 불행을 겪어온 사람이라 그럴까. 적어도 그녀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테사의 결정에 마니가 기겁하며 그녀를 불렀다.

“부인!”

“좋은 결정이에요. 이로써 샤인 경에게 미안해질 일은 덜겠군요.”

엘레나는 지팡이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바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를 본 케니스가 입가를 손으로 막으며 눈을 크게 떴다. 후작 부인이 걷고 있다니? 두 다리를 영영 쓰지 못하는 분 아니셨던가.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놀라는 건 다음에 하고, 어서 서둘러 움직이게. 시간이 꽤 지체되었으니까.”

엘레나가 먼저 나가고 그 뒤를 그녀의 하녀가 따랐다. 그리고 마니와 케니스가 테사를 부축하며 그들을 따라갔다.

방 밖으로 나서자 어수선한 성 분위기가 피부에 확연하게 와 닿았다. 여기저기 둔탁한 군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때문에 다섯 사람은 모두 숨을 죽이고 움직였다.

그러던 찰나 가장 아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빨리 찾지 못해?!”

실종되었던 소후작, 페르데일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테사의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반사적인 딸꾹질을 내뱉자 엘레나가 그녀를 향해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쉿.

***

느닷없는 선공이었다. 그것도 전면전에 가까웠다. 이전까지 탐색하며 소모전을 벌였던 기세와는 확연히 달랐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적들은 외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헤르트 또한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적을 상대할 준비를 끝마쳤다.

곧 드넓은 들판 위로 수많은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발사!”

신호가 떨어지자 외벽 위에 집결한 궁수들이 달려오는 기병대를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무수한 화살들이 장대비처럼 적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적의 방패가 화살을 막아내고 계속 진격해 온다.

헤르트는 양날개의 선봉에 선 기사들에게 공격의 신호를 보내며 동시에 검을 빼내어 들었다.

그의 목표는 선봉장에 선 적의 사령관이었다.

“와아아아!”

이윽고 두 개의 군대가 맞부딪혔다. 헤르트는 말을 끌고 앞으로 헤쳐나가며 적들의 기병대를 하나둘씩 베기 시작했다. 그의 날렵하고 재빠른 칼놀림에 병사들이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말 밑으로 고꾸라진다. 주인을 잃은 말들의 울음소리가 어지러이 전쟁터에 스며들었다.

한때 전장을 마귀처럼 날뛰며 병사들을 도륙했던 사내는 망설이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닥치는 대로 병사들을 베고 베었다. 얼굴에 진득한 피가 흩뿌려져도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 있는 적들은 제 동료가 몇 걸음 가지 않아 사지가 잘려져 나가자 겁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이런 전투쯤이야 지난날에 수십 번도 더 치렀어.’

헤르트가 나서는 전장은 언제나 적의 숫자가 더 많았다. 모두가 입을 한데 모아 승리는 어렵다고 말하던. 하지만 헤르트는 그 전투 속에서 살아남는 것도 모자라서 번번이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와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는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 따윈 전혀 두렵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한들 가장 중요한 우두머리를 잃으면 그 군대는 파훼된다. 대열이 무너지면 방어선이 흐트러지고,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 군대도 끝.’

전쟁에는 수많은 전략과 전술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기본적인 틀은 모두 똑같았다. 군대를 지휘하는 머리를 제거하는 것. 그것이 승리로 가는 빠른 길목 중 하나였다. 심지어 모두가 보는 만천하에서 적장의 목을 날리는 순간, 군사들은 사기를 잃게 되고 싸울 의지 또한 놓게 된다.

헤르트는 검을 쉬지 않고 놀리며 적의 사령관을 찾았다.

‘……되도록이면 한 번에 머리를 날린다. 질질 끌어서 좋을 것 하나 없어.’

머지않아 헤르트는 저 멀리 적 지휘관을 발견했다. 그는 나름 유려한 동작으로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헤르트는 제가 가는 길에 걸리적거리는 적들을 쓰러트리며 지휘관을 향해 말을 몰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검은 투구 안으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헤르트 샤인인가?”

헤르트는 답 대신 적 지휘관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남자가 퍼드득거리며 몸을 틀어 검을 피했다. 생각보다 감이 좋은데. 헤르트가 다시 검을 뒤로 빼내자 이번에는 투구 안에서 신경질적인 말투가 나왔다.

“성질이 급하군. 인사 좀 나누자는 거였는데.”

“네 배후가 누구지?”

“네가 알 것 없다.”

“그럼 죽어야겠군.”

헤르트가 적 지휘관의 목을 향해 검을 크게 휘둘렀다. 바람을 타듯 검이 곡선을 그렸다. 캉! 가까스로 헤르트의 검을 받은 적이 욕을 지껄였다.

툭, 데구르르…….

거친 바람이 분다. 적 지휘관은 바람결에 휘날리는 제 머리카락에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들이켰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투구가 벗겨져 날아갔다. 미처 받아내지 못했다면 목의 반이 날아갔으리라. 아니, 더 방심했다면 목이 이미 저만치 날아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사생아 새끼가…….”

“적어도 내 출신을 아는 이가 보냈나 본데. 역시 그자인가?”

“닥쳐라!”

적이 말고삐를 휘둘러 헤르트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헤르트는 능숙하게 적의 검을 검 옆면으로 받아내며, 스치듯 검의 끝을 몸통으로 밀어넣었다. 끼기기긱! 검끼리 부딪히는 날카로운 파찰음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는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겠다 판단했는지 적 지휘관이 황급히 검을 내리고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서는 급히 뒤로 내빼기 시작했다.

“날 엄호해라! 돌파구를 찾아!”

소리를 지르며 적 지휘관이 제 휘하에 있는 기사들을 불러 모으려고 했지만 헤르트는 기다려주지 않고 말을 가뿐히 몰아 적에게 검을 휘둘렀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적이 쥐고 있던 말고삐가 손과 함께 반쯤 뜯겨 나갔다.

“아아악!”

적이 소리를 지르며 중심을 잃자, 헤르트는 그대로 발로 말을 후려쳐 바닥으로 밀어 넘어트렸다. 그대로 적의 목을 베려던 찰나, 뒤늦게 온 적진의 기사들이 헤르트의 검을 저지했다. 캉! 검날이 막히며 끼긱, 하고 작은 불꽃을 만들어내었다.

‘죽으려고 발악을 하나 본데.’

헤르트는 다른 방향에서 날아드는 검을 피해 몸을 숙이며 말고삐를 휘둘렀다. 그는 검을 제대로 고쳐 잡고서 저를 막았던 기사들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단 한 번에 끝을 내려고 했던 건데. 한 번에 갈 수 있는 길을 돌아가려고 하니 기분이 저조해졌다.

“네가 이길 거라 생각하나?”

막아선 기사들을 모두 처리한 헤르트가 바닥을 기며 말 위에 어떻게든 올라타려고 했던 지휘관에게 향했다.

“곧 죽을 새끼가 말이 많기는.”

“이게 끝이 아닐 것이다. 너는 이길 수 없어.”

“시끄러워.”

그 순간이었다. 뎅! 뎅! 뎅! 성의 위급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헤르트는 고개를 들어 성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가 들은 것이 맞다는 듯이 여전히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적 지휘관이 헤르트를 향해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하하, 제대로 먹혀들었나 보군.”

“……뭘 어떻게 한 거야.”

“보면 모르나. 이 판 자체가 널 잡아두려는 미끼였다는 걸!”

미끼?

헤르트는 지휘관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미끼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가 현재 있는 외벽을 뚫어야만 했다. 단순히 성에 잠입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 수는 많지 못할 터였다. 그만큼 꼼꼼하게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설마…….

“이제 모두 끝났다. 어디 한 번 도망…….”

지휘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친 파공음이 들리더니 적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헤르트는 그 머리통을 말발굽을 이용해 짓밟으며 욕을 지껄였다.

“씨발, 시끄럽다고 했잖아.”

헤르트는 말머리를 돌려 크게 소리쳤다.

“후퇴하라! 전원 성벽 안으로 진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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