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늘 그래왔지만 오늘만큼은 헤르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테사의 가슴을 더욱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놨다. 자신이 좀 더 멀쩡했더라면…… 이런 모습이 아니라 예전의 모습이었다면……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후작 부인이나 자넷처럼 교육받은 귀부인이었다면 자신 있게 이 성을 위해 나설 수도 있었을 터였다.
여전히 테사는 헤르트가 왜 이다지도 볼품없는 저와 결혼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헤르트의 부인이 될 사람은 이렇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멍청한 여자가 아닌, 그를 착실하게 내조할 수 있는 능력 있고 명석한 귀부인이어야 했다. 그게 모두가 바라고 원하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그런 귀부인과 낳은 아이야말로 헤르트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이런 비루한 제 태를 빌어 태어나는 아이가 아니라…….
‘아냐, 아가야. 네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내가…….
내가 부족해서…….
테사의 뺨 위로 굵직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울어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모든 게 억울하고 분했다. 테사는 이 모든 걸 원한 적이 없었다. 이런 자괴감도 죄책감도 이제는 버겁고 숨만 막혔다. 그녀가 원했던 건 처음부터 하나였을 뿐인데.
고아원에서 독립해 헤르트와 한 가족을 이루고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왜 내가 헤르트에게 짐이 되어야만 해? 왜 헬과 내 아이를 불필요한 존재처럼…… 생각해야 하는데…….’
싫어. 이런 건 정말 싫어.
테사는 불행이 미웠다. 증오스러웠다. 자꾸만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불행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왜 나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소중한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게 그리도 잘못된 일이야? 왜 나만…… 나한테만…… 그리 모질게 굴어. 이만하면 됐잖아. 그만 나를 놓아줄 때도 됐잖아…….
테사는 손을 뻗어 창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거친 찬바람이 크게 일렁이며 방 안으로 가득 쏟아졌다. 창문 앞에 선 테사는 까마득한 아래를 쳐다봤다. 밑에는 불행이 아가리를 벌리고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널 놓아줘? 웃기지 마. 쩍쩍 벌린 입이 테사를 금방이라도 삼킬 듯이 출렁거렸다.
테사는 제 눈물이 온통 그 밑으로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아래를 쳐다봤다. 이대로 여기서 몸을 던진다면 편해질 수 있을까? 이 고통도, 죄책감도, 불행도 끝낼 수 있을까.
잠시 잊고 살았던 죽음의 충동이 일었다. 지금이라면 정말로 쉽게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끔찍하게 아플 테지만 한순간일 테니 나름 괜찮게도 느껴졌다.
반평생을 고통에서 몸부림 쳐왔는데 그 찰나의 고통쯤이야.
올리브빛의 눈동자가 거멓게 가라앉으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걸음 소리와, 그리고 바닥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 테사가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지팡이를 짚고 선 후작 부인이 있었다.
“거기서 떨어져 내리면, 편해질 것 같나요?”
“부……인.”
“그냥 죽어버리면 다 끝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나요?”
후작 부인은 신랄하게 말을 이어갔다. 테사가 방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테사는 창가에서 완전히 등을 돌린 채 후작 부인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죽으면 모든 게 끝이 나겠죠. 하지만 그 끝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으리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네요.”
“저…… 저는…….”
“죽지 말아요. 아직은 그 때가 아니에요, 테사.”
“그게 무슨…….”
후작 부인이 지팡이에 힘을 실으며 테사 앞으로 다가왔다. 지팡이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는 절도 있고 힘찼다. 지팡이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나도 한 때 그런 적이 있었죠. 죽으면 모든 게 끝이 날 거라 생각했었던 때.”
“…….”
“테사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사고로 두 다리가 망가졌어요. 타고 있던 마차가 전복되면서 두 다리가 깔려 완전히 망가졌죠. 지금은 이렇게 걸을 수 있지만…… 처음에는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 했답니다.”
후작 부인은 테사의 등 뒤쪽을 향해 불쑥 손을 뻗었다. 테사가 깜짝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자 엘레나는 창문을 닫아 걸쇠를 걸어 잠갔다. 그제야 방 안에 쏟아지던 찬바람이 뚝 멈췄다.
“날 그렇게 만든 건 내 남편이었어요.”
“그, 그런…….”
“놀랍죠? 더 놀라운 사실은 남편이 날 아예 죽이려고 했다는 거랍니다. 두 다리가 그렇게 된 게 오히려 운이 좋았던 거죠. 본래라면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으니까.”
엘레나의 목소리가 잠시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이윽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부드럽게 웃으며 의자까지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왜 남편이 날 죽이려고 했는지 궁금하죠? 그거야 뻔하답니다. 권력과 돈 때문이었어요, 테사.”
“…….”
“나와 남편은 정략혼을 했고, 나는 권세가 출신으로 남편에게는 휘두르기 어려운 여자였죠. 그때만 해도 남편은 사실 유테르트가의 후계자도 아니었답니다. 후작의 자리는 내가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었어요.”
후작 부인은 옛날 옛적에……라고 시작하는 동화를 말하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가벼웠고 손짓도 곁들여 가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테사는 그녀가 지금의 얘기를 웃으며 말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갖고 싶었던 자리를 얻게 해줬더니……. 그 이후부터는 내가 거슬렸나 봐요. 하기야 남편의 입장에선 내가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긴 했을 거예요. 가문의 권력을 반이나 잡고 있는데다가 내가 있는 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없을 테니까.”
엘레나는 일찍이 남편의 더러운 손버릇과 여자 문제를 알고 있었다. 반강제적으로 성사된 정략혼이라지만 제 남편이 될 이에 대해 모른 채로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많은 것을 알게 된 엘레나는, 그래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을 거라 여겼다. 그 정도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얼마 가지 않아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수고했다며 남편이 준비해 준 여행길에 오른 엘레나는 그대로 마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해 두 다리가 망가졌다. 그녀는 그것을 단순히 사고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둔하지 않았다. 단순히 몇 가지의 정보만으로도 이 사고의 배후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남편의 짓인 걸 알면서 왜 남편을 고발하지 않았냐고요? 왜 가문의 도움을 빌리지 않았냐고요? 나도 그러고 싶었답니다. 나는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어요. 회생이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두 다리를 가져 완벽한 장애인이 된 여자의 말을 누가 듣겠나요? 그때부터 나는 완전히 뒷방 신세가 된 거죠.”
다시는 두 다리로 설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하나 둘, 모든 이들이 자신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이 또한 남편이 계획했던 대로였다.
엘레나는 분하고 억울해서 제 가문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남편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조차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가문의 가주이자 그녀의 아버지는 엘레나를 철저히 도구로, 정략혼의 제물로 팔아넘겼다는 것을.
두 다리가 망가져 쓸모가 없어진 딸은 이제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엘레나는 제 가문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그렇게 서쪽 첨탑으로 내쫓기다시피 밀려났다.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며…….
“테사, 나는 죽고 싶었답니다. 하루아침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을뿐더러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으니까요. 더군다나 나는 다 쓰러져 가는 서쪽 첨탑에서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했어요. 하녀들도 서서히 날 떠나고 마지막 남은 하녀도 막 떠나던 차였죠. 이제 정말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답니다.”
정말로 죽어야겠다고 첨탑 밖으로 몸을 던지려다, 엘레나는 문득 이대로 죽는 게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죽어야 하지? 날 이렇게 만든 남편은 잘만 살고 있는데!
엘레나는 남편은 물론이고, 이 유테르트 가문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자신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살기로 결심했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기회를 노리겠다고. 제 죽음은 복수가 끝난 후라고.
“나는 죽지 않았어요.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거든요. 내가 원해서 이리 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그들의 뜻대로 죽어줘야 하지? 그래서 살기로 했답니다. 살다 보면 언젠간 기회가 한 번쯤은 올 테니까. 기회도 살아야 오는 거니까.”
그리고 정말로 어느 날 엘레나에게 구원줄과도 같은 이가 나타났다. 엘레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남편의 모든 것을 망가트리고 무너트릴 수만 있다면 무언들 못 할까.
그녀가 제안한 것은 정말 달콤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만족스런 얼굴로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그 기회가 오더군요.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아남기 잘했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살았기에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테사, 당신도 그러기 바라요. 살아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요.”
“……부인,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절대로 죽지 말라는 거예요. 아무리 죽고 싶어도 죽지 말라고요. 그렇게 스러져 간들 그들에게 좋은 일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쿵! 하고 성 전체에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단하고 아주 큰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였다. 테사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봤다. 다시 한번 쿵! 하고 소리가 났다.
“지금 이게…….”
“드디어…… 시작되었네요.”
“……부인?”
테사의 가슴이 마구잡이로 요동쳤다. 불길한 기분이 그녀의 몸 전체를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 때 방 안으로 한 여자가 들어섰다. 평소 엘레나를 모시고 있는 하녀였다. 그 여자의 허리에는 기다란 검이 달려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일반적인 하녀는 아니었다.
“이제 움직이셔야 해요.”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말했잖아요, 테사. 기회가 왔다고. 지금이 그 기회예요.”
성 전체에 커다란 굉음이 울리고, 성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음에도 후작 부인은 몹시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엘레나는 제 하녀에게 손짓해, 가지고 온 후드를 테사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낯으로 후드를 쳐다봤다.
“이건 왜…….”
“테사, 같이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지금 이곳보다는 안전한 곳이죠.”
엘레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더욱 커다란 소리가 콰앙! 하고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방 안으로 마니와 케니스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뛰어들어 왔다. 부인, 성에 군사들이……! 그들은 곧 방 안에 있던 후작 부인과 하녀를 보고 얼어붙었다. 왜 저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잘됐네요. 다 같이 가면 되겠어요.”
엘레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