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너 하나 못 지킬 놈으로 보여? 몸조리하면서 쉬고 있어. 아프지 말고.”
푸른 눈동자가 다정하게 빛났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또한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서 테사는 괜시리 코끝이 찡해졌다. 때때로 테사는 헤르트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돌아왔을 때, 네가 건강한 모습으로 날 반겨줬으면 좋겠어.”
헤르트의 소박한 부탁에 테사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신이 그의 발목을 잡기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계속 헤르트 곁에 머물고 싶다는 욕심이 끊이질 않았다.
이 행복한 순간이 계속되기를. 그와 더 이상 헤어지지 않기를.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헤르트는 테사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맞대었다. 그리고는 한 차례 숨을 고른 후에야 마저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네게 정식으로 청혼할거야.”
“…….”
“우리가 정식으로 부부가 되는 거야.”
테사는 헤르트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아직도 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헤르트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좋다고, 고맙다고 해야 할까? 욕심 낼 수 있게 해주어서. 아니면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앞이 창창한 네 발목을 잡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만해 달라고 부탁해야 할까? 이러지 말자고. 너에게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나는 여기서 만족한다고.
테사는 그 무엇도 말하지 못했다.
입 안에서 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쳤다.
“헬…….”
“안 된다고 하지 마. 싫다고도 하지 마. 이미 정해진 거야.”
헤르트는 한 번도 좋다고 말하지 않는 테사가 야속하기만 했으나 그녀도 알고 있을 터였다.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제가 원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것을 위안 삼으며 헤르트는 이마를 떼고 고개를 들었다.
“비록 네 첫 번째 남편 자리는 물 건너갔지만, 이제 네 남편은 오로지 나 한 명뿐이고 내가 마지막이 될 테니까 여기서 만족할게.”
“…….”
“그러니 너도 여기서 만족해. 알았어?”
헤르트가 테사에게 대답을 재촉하듯 엄히 물었다. 하지만 테사의 입에서는 쉽사리 그러겠노라 하는 대답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헤르트는 다시 끓어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눌러 담으며 말했다.
“넌 진짜 이상해. 남들은 날 남편으로 맞이하고 싶어서 안달인데, 넌 싫다고만 하잖아.”
“싫…… 싫은 건 아니야.”
“그러면 받아들여. 네 입으로 직접 알겠다고 말해. 날 먹고 버리려는 거 아니라면.”
“먹고 버…….”
“그래, 날 이용하기만 하고 도망가지 말란 소리야.”
됐어, 그만하자. 헤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이 자리에 있다가는 아픈 테사에게 한소리할 것만 같았다. 왜 나를 받아주지 않냐면서. 그러기는 싫었다. 애초에 잠든 테사의 얼굴만 잠시 보고 갈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헤르트는 탁자에 올려둔 건틀렛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급한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사람을 통해 나를 불러. 당장 네 곁으로 돌아올 테니까. 괜히 눈치 보면서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헤르트의 매서운 눈초리에 테사는 혼이 나는 학생처럼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하난 잘 끄덕이지. 대답은 하나도 안 해주면서.”
헤르트의 심술이 넘치는 말에 테사가 얼굴을 굳혔다. 그것을 본 헤르트가 아차 하며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이 입이 문제인가. 아니면 이 못되어먹은 고약한 성질머리 탓일 수도 있었다.
진심으로, 자신의 이러한 점들 때문에 테사가 결혼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헤르트는 수습하듯 재빠르게 변명을 덧붙였다.
“……그냥 한 말이야. 일일이 담아두지 마.”
“…….”
“진짜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소리야.”
“……응.”
헤르트는 이번에 고개는 끄덕이지 않고 소리 내어 대답하는 테사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해야 할 말이 있고 안 해야 말이 따로 있는데. 병신도 아니고. 그는 스스로 자책하며 테사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테사, 나 좀 봐봐.”
테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올리브빛의 눈이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헤르트는 그 눈을 보자 저도 모르게 혀를 짓씹었다. 아랫도리에 열이 몰리는 것이 느껴진 탓이었다. 씨발, 발정이 아니고서야…….
헤르트는 급히 테사를 제 쪽으로 끌어와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아…….”
다소 거칠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테사는 조금 버거워하는 기색이었으나 헤르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팔을 뻗어 헤르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질척이는 침 소리와 숨소리가 한데 뒤섞인 채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 긴 입맞춤이 끝나고서 두 사람은 말없이 색색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헤르트는 침으로 번들거리는 테사의 부드러운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하아……. 넌 항상 나를 미치게 만들어.”
“…….”
“그래서 네가 좋아. 네 마음도 내 마음 같으면 좋을 텐데.”
그 말에 테사는 가슴 한쪽이 찌르르거리며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간결한 대답이 아니라 나도 널 좋아한다는 말을 헤르트에게 해주고 싶었다. 그 언제보다 제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헬, 나도 네가 좋아……. 너와 함께이고 싶어. 내 마음도 네 마음과 같아.’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테사는 다시금 제 욕심이 헤르트를 더 불행하게 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다. 또다시 제 선택이 좋지 못한 상황을 가져오게 된다면? 그리고 만에 하나 이렇게 모든 걸 말했다가, 그가 제게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녀는 그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테사는 대답 대신 헤르트를 향해 애써 환하게 웃어 보였다. 헤르트는 그마저도 기쁜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래, 네가 계속 내 옆에만 있어준다면 뭐가 중요하겠어.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 바라는 모든 걸, 모두 얻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헬…….”
“난 이만 갈게. 더 자.”
헤르트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며 건틀렛을 손에 다시 끼었다. 테사는 그런 헤르트를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다른 말을 했다.
“잠이 안 올 것 같아…….”
“하녀에게 잠이 잘 오는 차를 가져다달라 할게. 그거 마시고 자.”
“배웅…… 나가면 안 돼?”
“안 돼. 그 몸으로 어딜 나가. 얌전히 여기에 있어.”
헤르트는 한 번 더 테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몸을 돌렸다. 테사는 그런 헤르트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이윽고 용기가 나지 않아 다시 손을 금방 거두었다.
결국 테사는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헤르트를 배웅하는 수밖에 없었다. 곧 돌아오겠다 말하는 헤르트의 뒷모습을 담은 채, 테사는 그가 방에서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만 바라보았다.
“부인, 창밖으로 각하께서 보여요. 이리 와서 보시겠어요?”
얼마 뒤 차를 가져온 마니가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창가 앞으로 다가간 테사는 머지않아 저 멀리 망토를 펄럭이며 말 위에 오르는 헤르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본 헤르트가 테사를 발견하고는 그녀를 향해 짧게 손을 흔들어주고, 이윽고 말을 출발시켰다. 그를 따라 상당히 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인, 영주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마니의 말에 테사는 점점 멀어지는 헤르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
거세게 흩날리는 바람에 들판 위에 세워진 천막의 자락들이 펄럭이며 요란스런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중 가장 커다란 천막 안에서 두 남자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작전대로 하면 충분히 성을 탈환할 수 있는 거 확실한가?”
페르데일은 저 멀리 보이는 영지의 외벽에 저도 모르게 손톱을 이로 뜯었다. 잘되어야 할 텐데. 아니, 잘될 텐데도 왜 이리도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역시나 그들의 상대가 후작의 미친개인 헤르트 샤인이기 때문일까.
그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많은 군대를 준비해서 온 것이 아니었던가.
“소후작, 너무 그리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그리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페르데일의 불안함을 눈치챈 다른 남자가 그를 엄히 꾸짖듯 입을 열었다. 통 진정을 못 하는 페르데일이 거슬린다는 기색이었다.
“하, 그건 알긴 아는데…….”
“제가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유테르트 성은 비옥한 평야 위에 세워진 성입니다. 그 말은 퇴로를 막고 지원이 오고갈 모든 길을 끊어놓으면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이 없다는 겁니다. 후방에서 이를 알아채고 지원이 오는 게 아니라면 모두 지옥행입니다. 성을 탈환하는 데 있어서 문제는 시간뿐입니다.”
“아아, 그래. 그건 잘 알고 있네.”
배우기도 했고, 몸소 겪기도 했으니까.
페르데일은 제가 나고 자란 유테르트 성의 특징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알았다. 훗날 영주가 될 몸이라 가신들에게 몇 번이고 교육받았던 것들이니까. 하지만 배우면서도 확신하지 못했다. 이 유서 깊은 유테르트 영지를 감히 그 어떤 이가 공격해 올까 의문이었다.
그러나 있었다.
그 미친놈이.
후작의 미친개라 불리우는 헤르트 샤인이 작정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자 유서 깊은 유테르트 영지와 성이 손 쓸 틈도 없이 함락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유테르트 가문의 후계자인 페르데일이 제 가문과 영지를 돌려받기 위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고.
“그러면 아무리 후작의 미친개라도 오래 버티기는 무리란 것도 잘 아시겠군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둘 중 하나입니다. 성을 버리고 달아나거나, 아니면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무엇보다 인질만 확실하다면 더욱 우리와 협상을 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남자의 말에 페르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기는 한데……. 과연 그자가 자신들의 계획대로 움직여줄지가 문제였다.
‘그 새끼가 함정에 걸려들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