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거친 바람결에 나뭇가지들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바깥과 다르게 방 안은 수북하게 쌓아 올린 장작을 때어 훈훈한 공기가 맴돌았다.
헤르트는 창가에 비켜서서 잠든 테사와 그녀를 진찰하는 의사를 쳐다봤다. 팔짱을 끼고 선 모습에서 초조함을 애써 감추려는 심리가 언뜻 드러나는 듯했다.
“……어떻지?”
케니스가 청진기를 내려놓자마자 헤르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물었다. 케니스는 집요한 영주의 시선에 머뭇거리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적당히 내놓았다.
“이상 없습니다, 각하. 피로가 쌓이신 거니 얼마간 푹 쉬고 제때 식사하고 약만 잘 챙겨 드신다면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수고했네. 이만 나가봐.”
헤르트가 손을 까닥이자 케니스는 청진기와 제 진료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헤르트는 침대에 누워 있는 테사에게 다가갔다. 유령처럼 하얗게 파리해진 안색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숨소리는 얼마나 작은지 집중하고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몸은 또 그새 얼마나 말랐는지…….
‘조금만 참을 걸.’
헤르트는 제 자신을 질책함과 동시에 후회했다. 뻔히 저 작은 몸이 얼마나 여린지 알면서 제 심술에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한 번도 버거워하는 것을 여러 번 치대었으니, 당연히 테사는 쓰러지지 않고서는 못 배겼을 터였다.
그는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앉아, 테사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정리해 주었다. 사락사락, 곱슬기가 있는 진저빛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다 네가 자초한 거야.”
불현듯 아직 남아 있는 심술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번 내뱉어 보았다. 헤르트는 사탕을 빼앗겨 버린 어린애처럼 입가를 삐뚜름하게 비틀며 아무렇게나 뇌까렸다.
“네가 날…… 그렇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나도 그 정도까진 안 했어. 네가 날 처음부터 받아줬더라면…….”
환희에 차, 입을 맞추었을 텐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본심에 헤르트가 일순 눈살을 찌푸렸다. 씨발, 아픈 사람 앞에서 혼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헤르트는 급히 테사에게서 손을 거두고 마른세수를 했다.
제가 생각해도 여전히 자신은 못난 점투성이였다. 이쯤 되면 이 괴팍한 성질을 받아주는 테사가 있어 다행일 지경이었다.
‘가만, 그래서…… 도망치려고 했었나?’
날 더 이상 감당하기 버거워서? 헤르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의구심으로 심경이 복잡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련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태였다. 대체 뭐 하자는 건지.
“……안.”
그 순간이었다. 테사의 메마른 입술이 조금 벌어지더니 작은 음절을 내뱉었다. 헤르트는 테사가 깨어났나 싶어 그녀를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눈꺼풀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때 또다시 그녀의 입가가 열리고 이번에는 작은 단어가 톡 구르듯 튀어나왔다.
“……미안해.”
“……테사.”
헤르트는 테사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답 대신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흘러나왔다.
“헬, 미안해……. 정말…….”
잠꼬대인가? 헤르트는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잠자코 테사를 내려다보았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입가에서는 희미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그것도 모두 사고를 담은 채.
“미안해, 미안…….”
“…….”
“나도 그러고 싶었던 게……. 미안해…….”
헤르트는 아주 잠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미안하다는 말. 대체 테사는 무엇이 그리도 제게 미안하다는 걸까.
그때도 지금도 테사의 입에서는 오로지 사과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연거푸 사과만을 하며 이따금 얼굴을 일그러트릴 뿐이었다.
“……미안해…….”
“……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하다는 거야.”
헤르트는 움찔거리는 테사의 손을 잡아주며 낮게 중얼거렸다. 자꾸만 사과를 하는 테사의 모습에 괜스레 짜증이 났다. 사과할 거라면 잠에서 깨어나 내 눈을 똑바로 보고 할 것이지. 왜 매번 나는 알 수 없는 그 꿈속에서 용서를 바라는 건지. 한편으로는 그 꿈속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지도 궁금했다.
“설마…… 나랑 결혼할 마음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 아니지?”
헤르트는 잠든 테사에게 불평을 하듯 투덜거렸다. 사실은 꿈속에서 자신이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테사는 그것을 거절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토록 하염없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그녀의 속마음이라면 어떡해야 할지, 가슴이 막막해졌다.
“……미안해.”
“사과 좀 그만해. 꼭 그게 맞는 거 같잖아…….”
헤르트는 테사의 달싹이는 입술을 바라보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이상하게도 자신과 그녀 사이에서 주도권은 자신이 가져야 하는데, 왜 매번 그녀의 말을 따르고 주도권을 넘기게 되는 것 같은지 찝찝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다. 빌어먹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헤르트는 테사를 노려보다 이내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밖에는 모젠이 대기 중이었다. 헤르트는 조용히 침실을 나서, 이어진 응접실로 향했다.
“전체적인 진행 상황입니다.”
헤르트가 소파에 앉기 무섭게 모젠이 고개를 숙이며 미리 탁자 위에 올려둔 서류를 가리켰다. 헤르트는 능숙하게 그것을 집어 들어 대강 살펴보았다. 그와 동시에 모젠이 말로 한 번 더 보고를 올렸다.
“지시하신 대로 후작의 입김이 닿은 이들은 최대한 성벽과 외곽으로 차출했습니다만, 아직 내부에 더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속 탐색 중입니다. 그리고 앞서 부탁하신 후작 부인의 감시역으로는 추려주신 후보 중 지타젠 경을 택하여 일임하였습니다. 경의 말로는 아직까지 수상한 점이나 별다른 낌새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여자들은?”
“네, 벨로뎀 부인 같은 경우에는 전처럼 별관으로 이동시키고 방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조치했습니다. 부인의 하녀 같은 경우에는 실력자로 의심되어 따로 격리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테사 님의 장물을 빼돌렸던 하녀는 그것 외에는 이력이 없어서 이전의 역인 주방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들 또한 감시역을 따로 붙여놨으니 수상한 동태를 발견할 시에 바로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머지는 말한 대로 잘한 것 같고…….”
모젠의 보고는 그가 지시한 대로였다. 원래 그의 보좌관인 랑그만큼이나 일처리가 매끄럽고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손색없는 일처리였다. 덕분에 헤르트는 바짝 조이고 있던 긴장의 끈을 살짝 늦추며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테사가 도망을 시도하다 잡힌 이후로, 급한 대로 후작의 입김이 세게 닿은 이들을 고르고 골라 성 바깥으로 배치하기 위해 며칠간을 머리를 붙잡고 분투했다.
마음 같아서는 완전히 그들을 내치고 싶었으나 사실상 그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초에 그가 유테르트 영지에 끌고 온 군대의 반 이상이 보르웬 후작의 것이었으니까.
고로 지금 상황에서 헤르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거르고 걸러서 성 내부만이라도 믿을 수 있는 이들만으로 메꾸는 것이었다.
물론 그중에도 자신이 아직 찾아내지 못한 후작의 첩자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 보르웬 후작이 이런 상황에 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테니. 여러모로 찝찝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빌어먹을 여자.’
괜히 무력한 기분에 욕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헤르트는 분하지만 당장은 보르웬 후작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사이가 정리되지 않았을뿐더러 그 여자는 분명히 그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후작이 저를 놓아줄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살해당했으리라. 보르웬 후작은 쓸모없다고 생각하면 바로 뒤처리부터 고민하는 자였으니까.
‘그래도 그 여자와 손을 잡은 걸 후회하지는 않아.’
손을 잡지 않았다면 테사를 만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 뻔했으니까. 헤르트도 나름대로 제 이익을 위해 보르웬 후작을 이용한 입장이었다. 물론 후작도 그것을 뻔히 꿰뚫어 보고 있기에 제게 그 값을 치루라고 하는 것이고.
‘하지만 이래서는 나도 순…… 그 여자의 장기말에 지나치지 않아.’
헤르트는 보르웬 후작에게 거두어진 뒤로 1년간은 살아남기 위해 전쟁터에서 고군분투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살아 돌아가야 어쨌거나 테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후작이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운운하며 자신을 사지에 몰아넣을 때에도 오로지 적장의 목을 베고 살아 돌아오는 데에만 급급했다.
머리를 굴릴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헤르트는 어느새 미친 후작의 미친개가 되었고, 그의 주변은 온통 보르웬 후작의 사람들로만 가득했다.
보르웬 후작을 상징하는 기사가 되었음에도 그는 대우받지 못했다. 날 때부터 후작에게 선택되어 그녀를 위해 일해 온 이들은 늘 헤르트를 감시하며, 수틀리면 금방이라도 후작에게 달려가 목을 자르고 내치라고 할 것처럼 굴었다. 그렇기에 헤르트는 후작의 개가 되었으면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힘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보르웬 후작의 세력 안에서 자신만의 군대와 부하를 가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후작에게 반기를 드는 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헤르트는, 최대한 경계선상에 가까운 범위 안에서 사람을 구하고 제 편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후작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애를 써야만 했다.
때때로 비참하고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테사를 찾기 전까지, 헤르트는 후작의 명을 거스를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헤르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후작의 옆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것들을 참고하며 조금씩 제 세력을 넓혀나갔다. 수는 적었지만 저를 위한 군대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숨통이 조금씩 트여 왔다. 테사만 찾는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테사를 데리고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테사를 다시 만난 순간, 헤르트는 더 이상 보르웬 후작에게 휘둘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애당초 그의 목표는 테사였고 이제는 그 목표를 이루었으니까.
하지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보르웬 후작의 꿍꿍이.
보르웬 후작은 헤르트를 쓸모 있는 개새끼로 만들기 위해 테사를 빌미로 그를 쥐락펴락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헤르트의 출신을 알고서부터는 더욱 그를 제 개로 붙잡아 두기 위해 머리를 굴렸을 터였다.
게다가 그 빌어먹을 여자는 허튼짓을 벌이는 이가 아니었다. 지난 2년간 헤르트가 그 여자에게서 굴려지면서 깨달은 것은, 후작의 행동에는 모두 목표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여자가 그에게 쉽게 테사를 내어줬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