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다리는? 걸을 수는 있겠어?”
“으응……. 조금은 괘…… 괜찮을 것 같아…….”
“못 걷겠으면 바로 말해. 무리하지 말고.”
네 다리가 얼마나 약한지 정도는 잘 안다며, 헤르트가 연신 테사의 상태를 살피면서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갓 태어난 아기 사슴을 대하는 것 같아 테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리가 몹시 후들거리긴 했지만 생각보다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헤르트는 내 몸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물론 테사도 본인의 몸이 남들보다 건강하지 못하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혼자 걷지 못해 남의 도움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다리가 이렇게 된 이유가 확실했으므로 헤르트만 자신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당분간 그러기란 힘들 것 같지만.
이윽고 테사는 제 느린 발걸음에 맞춰 걸어주는 헤르트를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잔디밭의 촉감에 무의식적으로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왜인지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날도 쨍하고 푸른 것이 현실보다는 꿈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테사는 자신이 사실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의심했다. 전후 상황을 모두 제외하고서, 이 순간만 놓고 보면 헤르트와 평화롭게 대낮에 손을 잡고 걷고 있으니까.
‘꼭 옛날에 꿈꿨던 나날 중 하루 같아…….’
어른이 되어 헤르트와 남들처럼 무난하게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것. 그때 상상했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조금 많이 다르기는 했지만 큰 결은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날 좋은 날, 헤르트와 함께하는 오후.
이런 식으로나마 한때 소망했던 것을 이룬 기분이라 좋았다.
그래서 이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 생각도, 걱정도 없이 행복한 순간만을 따와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뒤늦게 밀려오는 현실과의 괴리감에 씁쓸해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꼭 이러고 있으니까,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네.”
테사만 느꼈던 것은 아니었는지 헤르트가 문득 말문을 열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고아원 뒤에 있는 언덕 기억나? 자주 놀러 갔는데.”
“……응, 기억나.”
“네가 거길 너무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고아원에서 몰래 빠져나가 갔잖아.”
“……맞아……. 그랬어…….”
“난 그때가 가장 좋았어.”
헤르트의 대답에 불현듯 코가 시큰거린다. 테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헤르트에게 나도,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래, 그랬던 때가 있었다.
불행하여 부모에게 버림받아 불쌍한 아이였지만 그래도 그때만큼이나 행복했었던 적이 없었다. 모든 것에 만족했고, 작은 것 하나에도 행복을 느낄 줄 알았다. 앞으로 모든 것을 함께할 든든한 존재가 옆에 있었으니까. 지금의 행복이 앞으로 계속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거기 가면 꼭 화관 만들었잖아. 나는 아직도 화관 만드는 법이 생생해. 다 기억이 나.”
“…….”
“네가 처음으로 가르쳐 준 거였거든. 화관 만드는 거.”
헤르트의 말에 테사는 점차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것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화관 만드는 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헤르트의 말대로 테사가 헤르트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은 화관을 만드는 법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마땅한 것이 생각 나질 않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그를 끌고 가 무턱대고 화관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더랬지.
테사도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모든 것이 기억났다.
‘이렇게 꼬면 안 돼. 줄기가 금방 상해버리거든.’
‘어차피 꺾은 꽃은 상하기 마련이잖아.’
‘그래도 오래 보면 좋잖아. 금방 시들면 슬퍼. 꽃은 이 꽃을 피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텐데…….’
‘……다시 해볼게. 다시 알려줘.’
당시 헤르트는 제가 하는 것을 곧잘 따라 하던 남자애였다. 몇 번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홀로 척척 해내는 새 친구.
머지않아 그는 뚝딱 하고 테사보다 더욱 근사한 화관을 만들어내었다.
테사는 그런 헤르트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자신은 며칠을 끙끙거리며 익힌 기술을 그는 앉은 자리에서 금방 배우고 응용까지 했으니까.
‘너 정말 잘 만든다. 손재주가 있구나?’
‘……그런가.’
‘그럼. 다른 애들이 너처럼 만들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걸릴걸? 나도 이거 배우는데 며칠 걸렸는걸.’
테사가 감탄 어린 말들을 쏟아내자 헤르트가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화관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너 줄게.’
‘응?’
테사는 헤르트가 내민 화관을 보고 의아해 했다. 이렇게 예쁘게 만든 걸 나한테 준다고?
‘정말 나 주는 거야……? 되게 예쁘게 만들어졌는데.’
‘내가 쓰기…… 좀 그렇잖아. 너 줄게.’
‘왜에, 헬, 너한테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됐어……. 그냥, 너 가지라면 가져.’
테사는 그제야 귀가 붉어진 헤르트를 발견하고 화관을 받아 들었다. 이렇게 예쁜 화관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고마워! 근데 나도 답례를 해주고 싶은데……. 음…….’
뭐 좋은 게 없나 싶었던 테사는 남은 꽃으로 급히 반지를 만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소년이 이게 뭐냐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건 뭐야?’
‘답례야! 나도 너한테 뭐 주고 싶어서. 자 한번 껴봐. 너는 손도 고와서 뭘 껴도 잘 어울릴 거야.’
테사는 머뭇거리는 헤르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야, 그렇게 갑자기 잡으면……. 헤르트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테사에게 제 손을 내어주었다.
그는 곧 제 검지에 자리 잡은 반지를 내려다봤다. 작고 하얀 꽃이 그의 검지에 피어나듯 존재했다.
‘내가 만든 반지도 나름 괜찮지? 나도 네가 만든 화관 써봐야겠다!’
테사는 그리 말하며 화관을 머리에 썼다. 자 어때? 테사가 화관을 쓴 모습으로 헤르트 앞에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테사는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고정하기 위해 귀 뒤로 넘겼다.
‘예쁘다…….’
‘응, 네 화관 예뻐!’
‘그게 아니라……. 아니야 됐어.’
소년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버리자 테사는 고개를 꺄우뚱거렸다. 왜 그래? 됐다니까. 갑자기 소년이 어디론가 휙 달려간다. 테사는 헤르트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헤르트가 크게 놀라 뒤돌아봤다.
‘야!’
‘아야…….’
‘봐봐, 많이 다쳤어?’
‘아, 괜찮아! 이 정도는……. 아얏!’
테사의 무릎에서 피가 흘렀다. 넘어지면서 돌멩이라도 찧은 모양이었다. 헤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등을 내밀었다. 업혀.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나 무거운데!’
‘그 다리로 어떻게 걷겠다고. 나 튼튼해.’
소년의 완강한 권유에 테사는 할 수 없이 그의 등에 업혔다. 저보다 널찍한 등이 그녀의 몸을 든든하게 받쳐 주었다.
그 느낌이 정말로 신기해 테사는 지도사들 말고 누군가에게 업혀본 것은 처음이라며 킥킥 웃었다. 이에 헤르트도 덩달아 옅게 웃음 지었다. 자신도 누군가를 업어본 건 처음이라고 말하며.
그래, 그랬던 때가 있었다. 나눴던 대화마저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제는 덧없는 꿈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행복했던 나날이 테사에게도 분명 존재했다.
그녀는 떠오르는 옛 기억에 어느새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가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넌 처음 만났을 때 말이 많았어.”
“……미, 미안해…….”
“테사, 사과하라고 말 꺼낸 거 아니잖아. 난…… 좋았어. 네가 나한테 말 걸어주는 게.”
헤르트의 솔직한 대답에 테사가 멈칫했다.
“고아원에 가기까지 나는 상당히 많은 곳을 전전해야 했거든. 모두가 하나같이 날 반겨주지도, 말을 걸어주지도 않았어. 네가…… 유일했어. 웃으면서 나에게 스스럼없이 말 걸어준 사람은.”
“…….”
“그래서 버틸 수 있었어. 네가 있었기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마지막에는 헤르트가 살짝 웃음 짓는 게 느껴졌다. 테사는 다시 목이 막혔다. 그에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나날들을 망쳤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테사는 그냥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괴감에 가슴이 미어졌다. 또다시 과거의 제 선택에 대해 미친 듯이 후회가 되었다.
‘사실…… 나도 그랬어, 헬. 매일같이 학대를 당하는 날이면 너와 함께했던 날들을 떠올렸어. 그럼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었어. 아침이 되면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그만큼 슬펐지만……. 그래도 그날의 기억이 있었기에 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목구멍 바로 아래에서 수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쳤다. 테사는 결국 내뱉지 못한 말들을 꿀꺽 삼켰다.
애당초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남의 인생을 처참하게 망가트려 놓고, 자신 또한 그때의 나날들이 그립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이건 솔직해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테사.”
그 때 헤르트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테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하염없이 땅바닥만 내려다봤다. 두 사람은 어느새 멈춰 선 채였다.
“너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
“지금이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지금도 이렇게 가능하잖아. 고개 들어서 나 좀 봐봐.”
헤르트의 종용에 테사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파아란 하늘, 따사로운 햇볕 아래로 남자가 된 헤르트가 보였다.
그날의 소년처럼 그는 테사를 향해 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건 정말로 뜨겁고 강렬한 감정이었다. 나를 봐달라고, 어서 나를 선택해 달라고 그가 끊임없이 속삭이는 듯했다.
“나, 나는…….”
테사는 말을 어물어물 흐렸다. 그와 동시에 속이 울렁거렸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잘 모르겠어.
그래, 아주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자면 테사도 돌아가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정말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단순히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테사는 제 자신이 이미 멍청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선택으로 인하여 두 사람의 인생이 나락으로 처박혔으니까. 누가 보아도 잘못되었음이 저명했다.
그런데, 그런 선택을 한 사람이 이제 막 앞날이 창창한 그 옆에 당당히 서도 되는 걸까?
알아, 안다. 계속해서 제 자신이 같은 말들을 반복하고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어차피 주어진 선택지는 한 가지라고 모든 것들이 말해 주고 있는데도 이리도 망설이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헤르트를 영영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