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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88화 (88/138)

088화

직원은 건물 주인이 페르데일을 찾는다고 했다. 페르데일은 바로 가면을 챙겨 직원을 따라나섰다.

지난번처럼 미로 같은 건물 내 길을 지나 주인의 방에 도달한 페르데일은 그곳에서 저번에 보았던 남자와 주인, 그리고 처음 보는 남녀를 발견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후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큼, 뭔데 이렇게 다들 모여 있지?”

“아주 좋은 소식이 들려와서 말입니다. 당연히 소후작님께 전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주인이 페르데일에게 앉기를 권하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

“예, 아주 좋은 소식입니다.”

주인이 서 있던 두 남녀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그 두 남녀가 쭈뼛거리며 나와 막 자리에 앉은 페르데일에게 인사했다.

“미천한 종이 소후작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래, 근데……?”

페르데일은 갑자기 튀어나온 남녀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훑어보며 주인을 돌아봤다. 얘네가 뭐? 주인이 두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소후작께서는 그자의 출신에 대해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그 미친 후작이 꽁꽁 숨겨서 드러나지 않는 걸.”

“저자들이 그자의 출신에 대해 안다고 합니다.”

“예, 소후작님. 저희가 그자의 출신과 더불어 약점까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대기 중이던 남녀 중 남자가 먼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 낮게 소리쳤다. 그는 비굴할 정도로 페르데일에게 굽신거렸다.

“왜, 그곳에 그자가 끼고 산다는 여자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여자? 아아, 걔.”

페르데일은 뒤늦게 테사를 떠올리며 은연히 이를 갈았다. 제 아비가 죽자마자 그놈한테 다리를 벌리고 붙어먹었던 년. 그래, 그년에게도 복수를 해야 했다. 제게 망신을 주는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바로 그 여자가! 그자의 약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더니, 장난하나? 그 여자가 죽어도 그놈은 눈 한 번 깜박하지도 않을 걸?”

일전에 그자가 제게 보여준 태도를 떠올리며 페르데일이 이를 박박 갈았다. 이거 완전 좋은 소식이 아니라 개소식 아니야? 건물 주인에게 눈치를 주려는 차였다. 이번에는 여자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소후작님, 저희의 말을 잘 들어주세요.

“사실 소후작님의 목표는 영지 탈환 아닌가요? 그 여자가 아주 좋은 미끼로 쓰일 수도 있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여자는 미끼조차 되지 못한다고 몇 번을…….”

“두 사람은 평범한 관계가 아닙니다. 소후작님. 두 사람은 같은 고아원 동기입니다.”

“……뭐? 무슨 동기?”

페르데일이 크게 뜬 눈으로 여자를 쳐다봄과 동시에 주인이 손뼉을 짝 쳤다. 그러자 방과 이어진 다른 한쪽 문이 열리고 직원 두 명이 손이 결박된 한 사람을 질질 끌고 왔다. 페르데일은 그 사람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그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그자의 보좌관이잖아?”

“이번에 숨어들었다가 잡힌 첩자인데 아시는군요.”

“그럼 당연하지! 저 자식이 나한테……!”

이전에 랑그에게 당했던 일을 떠올린 페르데일이 욱한 마음에 크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가면을 쓴 남자에게 저지당했다. 주인 또한 시간은 많다며, 일단 끝까지 얘기를 들어달라고 페르데일에게 정중히 간청했다.

결국 페르데일은 랑그를 노려본 채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게 가능한가?”

모든 이야기가 끝나 있을 때 페르데일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주인과 다른 이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들이 말한 대로라면 유테르트 영지의 탈환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믿기지가 않는다는 얼굴을 한 페르데일에게 주인이 설핏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믿어주시지요. 무엇보다 그곳엔 믿을 만한 저희 조력자가 숨어 있답니다. 소후작님을 그곳에서 탈출시켜 준 사람도 바로 그분입니다.”

***

그날 이후 테사는 방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헤르트에게 정신없이 시달려 울부짖다가 정신을 잃고 나면 아침이 밤이 되고, 밤이 아침이 되는 상황이 반복해서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사용인들이 날라주는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헤르트와 흘레붙기를 수차례.

테사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어제가 오늘 같았고, 오늘이 내일 같았다. 날마다 똑같은 일이 계속 되풀이되고 있었다. 테사는 이제 반쯤 포기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며 코를 훌쩍였다.

‘자넷은……. 마니는 괜찮을까…….’

이 와중에도 자신을 도와주었던 그들이 괜찮은지 걱정되었다. 혹여나 후작가에서 쫓겨난 것은 아닌지 내심 불안하기도 했지만 지금 테사로서는 그들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어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저 모두가 무사하기만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도중 불현듯 문이 열리더니 사용인들이 방 안으로 옷과 장신구를 가져왔다. 무슨 일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테사에게 하녀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부인, 치장을 도와드릴게요.”

“왜 갑자기 치장을…….”

“영주님의 명입니다.”

헤르트가? 왜? 어차피 방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을 거면서……. 여러 의문이 들었으나 일단 테사는 하녀들의 손길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들의 손길이 부담스럽고 제 등의 상처가 부끄러워 거부했을 테지만, 요 며칠 동안 이어진 정사에 테사는 기력이 거의 바닥 난 상태였다.

‘벌써 힘들어…….’

혼자서 몸을 움직이는 것에도 금방 피곤해졌고, 졸음도 자꾸만 쏟아졌다. 몽롱한 정신에 몸을 제대로 가누는 것도 어려워 사실상 누군가를 밀어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테사는 눈을 감은 채 그저 치장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하녀들은 신속하게 테사를 씻기고 옷을 입혀 치장을 해주었다.

“곧 영주님께서 오실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마지막으로 테사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며 하녀 하나가 상냥하게 말했다. 테사는 내내 감았던 눈을 떴다. 중간에 기억이 없는 걸 보아서는 또 깜박하고 잠이 든 모양이었다.

테사는 그제야 저를 치장해 준 하녀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간 마니를 도와 간간이 제 시중을 들었던 하녀들이 아닌, 하나같이 낯선 얼굴투성이었다.

‘다른 하녀들은…… 어디로 간 거지……?’

테사는 그들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헤르트가 마니와 함께 그들도 제 앞에서 치워버린 모양이었다. 테사는 다시 한번 더 기분이 울적해지고 말았다. 자넷과 마니를 비롯해, 자신이 익히 알던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테사.”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녀들의 말대로 헤르트가 방을 찾아왔다. 그는 외출복을 입고 얌전히 앉아 있는 테사를 보고 흡족해 하는 눈치였다. 그가 눈짓하자 하녀들이 고개를 숙이고서 방 밖으로 급히 사라졌다.

테사는 멀어지는 하녀들의 뒷모습을 좇다 제게 다가와 저를 가뿐히 안아 드는 헤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헬……. 갑자기 옷은 왜…….”

“산책을 좀 나가볼까 해서. 너무 방 안에만 있으면 안 좋잖아.”

테사의 한쪽 발에 채워진 족쇄마저 풀어내며 헤르트가 말했다.

“아…….”

그걸 잘 아는 사람이 밤새도록 날 그렇게 괴롭혔냐고 말하고 싶은 것을 테사는 꾹 참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부터 테사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억울함이 샘솟아 올랐는데,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생각이 종종 튀어나오곤 했다. 방금 전 헤르트를 질책했던 것처럼.

“왜, 싫어? 그냥 방 안에만 있을래?”

“아, 아냐……. 나갈래……. 나가고 싶어.”

“거봐, 너도 좋아할 줄 알았어.”

“근데…… 신발을…….”

아직 안 신었는데. 테사는 아직 아무것도 신지 않은 제 맨발을 내려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헤르트가 그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 내가 안고 움직일 거니까. 어차피 제대로 걷지도 못할 텐데.”

헤르트의 대답에 테사의 얼굴에 화악하고 열이 올랐다. 지난밤, 그에게 내내 벌어져 있던 제 다리가 상기되었다. 지금도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뒤늦게서야, 제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을 저를 씻긴 하녀들에게 고스란히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사는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하녀들에게 몸을 맡겼을까. 안에 고여 있던 양도 상당할 텐데. 씻는 내내 음부에서 정액이 줄줄 흘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흐윽, 너무해……. 다 알면서 일부러…….’

테사는 짓궂은 헤르트의 행동에 대해서 그가 미워지려고 했다. 대체 왜 그는 자신이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저를 괴롭히고 싶은 걸까. 후자라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헤르트의 화가 아직 덜 풀렸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니까.

“산책 한 바퀴 하고 오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응.”

테사의 빨개진 얼굴을 못 본 척하며 헤르트는 그녀를 안고 방을 나섰다.

테사는 방을 나오자마자 성 내 분위기가 이전에 비해 확연하게 달라졌음을 느끼고 말았다. 긴 복도를 걷는 내내 사용인들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고, 경비를 서는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삭막하고 엄중한 분위기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다.

자신이 방 안에 갇혀 있는 동안 성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듯 했지만, 무슨 일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테사는 자신과 다르게 성내 분위기를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헤르트의 모습을 살피다 이내 자신도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엔 너무나도 피곤했다.

두 사람은 이전에 걸었던 정원으로 나왔다. 테사는 오랜만에 쬐는 햇빛에 저도 모르게 내내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나른한 숨을 내뱉었다. 하루에 한 번씩 산책이 가능했다면 이 무기력한 느낌은 덜했을지도 몰랐다. 독방에 갇힌 것처럼 방 안은 너무나도 답답했다.

“헬, 나 걷고 싶어……. 내려주면…… 안 돼?”

신발을 신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 밑은 잘 가꿔진 잔디밭이었다. 맨발로 걷기에는 좀 까슬까슬해 보이지만 걷다 보면 나름 푹신할지도 몰랐다. 사실 이보다 더 거친 곳도 고아원 시절에 누비고 다녔던 테사였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르트는 그런 테사의 요청이 탐탁지 않은 듯했다.

“그러다가 네가 도망가면?”

“……도망 안 가……. 나는 정말로 도망치려고 한 적이…… 없단 말이야…….”

“좋아, 대신 저기까지만이야.”

헤르트가 한 발 물러서며 손끝으로 정원 안쪽에 있는 정자를 가리켰다. 어차피 테사도 오랫동안 걷고 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 헤르트가 테사를 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대신 그는 테사의 손을 꼭 마주 잡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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