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느지막이 동이 떠오른다. 엘레나는 후작가의 일대가 서서히 밝아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서늘한 아침에 뿌연 입김을 내뱉고 있는 병사들이 한껏 날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지난밤에 일어난 일 때문이겠지. 그들의 주인이 더 이상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저치들 또한 아는 것이다.
엘레나는 벽 너머로 힘이 실린 발걸음을 느꼈다. 머지않아 문이 발칵 열리고 그녀가 그토록 기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정확히 내게 원하는 게 뭡니까?”
엘레나는 뒤를 돌아봤다. 면바지와 셔츠 위에 얇은 가운만 걸친 헤르트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엘레나는 손가락 끝으로 제 휠체어의 손받이 부분을 어루만졌다.
“경,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때론 작은 것을 버려야 하는 법이랍니다. 이번 일을 통해서 경께서는 조금이라도 깨닫는 게 있었을까요?”
“말장난은 집어치우고 당신이 원하는 바만 얘기하란 말, 못 알아들었습니까?”
“제가 원하는 건 이전에 모두 말씀드렸다고 생각하는데요. 오히려 경이야말로 제 물음에 답을 회피하는군요.”
엘레나는 휠체어를 끌어 완전히 헤르트와 마주 보았다. 화가 잔뜩 난 듯한 그는 여러 의미로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 보면 좋은 신호였다. 화가 났다는 것은 엘레나가 던진 덫에 그가 제대로 반응을 했다는 거니까.
“뭐, 좋아요. 아직 모든 게 끝이 난 건 아니니까.”
엘레나는 대답대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제 청을 들어주실 건가요?”
“……당신을 감시할 겁니다. 이 성안에서 당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고.”
“그렇게 하세요. 상관없으니까.”
엘레나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정말로 뭘 원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건 쉽게 이뤄질 수 없을 겁니다.”
“그것 또한 두고 보면 알게 되겠죠.”
여유로운 후작부인의 대답에 헤르트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눈에 그녀는 하나도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이미 제 목표는 이루어졌다는 양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으나 사실 헤르트의 입장에서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루 사이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후작부인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기에.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야.’
헤르트는 이제 이 성과 영지를 관리하고 통솔하기에 앞서 자넷과 테사가 도망칠 수 있도록 도운 조력자들을 걸러내어 정리한 후에 병력들을 다시 배치해야 했다. 그리고는 외부에서의 침입과 기습 또한 대비를 해둬야 했다.
이렇게 일손이 하나라도 소중한 마당에 후작부인의 도움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괜찮아, 그리고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잖아.’
어차피 후작부인이 맡게 될 일은 전반적으로 원래 이곳의 안주인인 그녀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헤르트가 생각하기에 대다수는, 별다른 영양가 없는 일들로 단순한 노동에 지나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감시역이 따로 붙을 예정이었다. 허튼짓은 용납되지 않았다.
물론 후작부인을 신뢰할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헤르트도 나름 고심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사실 그는 현재 테사의 일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음 같아서는 후작의 명도 집어치우고 오로지 테사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이깟 유테르트 영지가 어떻게 되든지에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내 귀에 별다른 말이 들려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단 한 번이라도 허튼짓을 하려다간…….”
“걱정 마세요, 경.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요.”
헤르트는 의미심장하게 웃는 엘레나를 두고 등을 돌렸다. 서둘러 다시 테사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 때 엘레나가 불현듯 그를 불러 세웠다.
“경.”
“……뭡니까.”
“항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나요?”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바람이에요. 바람이 있어야 돛을 펼치고 배를 움직일 수 있는 거죠. 그 넓은 바다에 바람이 없다면 제아무리 노력을 한들 항해는 불가능하답니다. 정체되어 그저 물길을 따라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게 될 뿐이죠.”
어느새 후작부인은 다시 창밖으로 후작가 일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떠오르는 해에 언뜻 빛을 받은 후작부인의 얼굴은 기묘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얼굴을…… 헤르트는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흘러가는 대로…… 우리는 그 자리에 있으면 되는 거예요.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
‘불쌍한 것.’
테사는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고아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노부인에게 들은 말이었다.
그 당시 테사는 불쌍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고작 다섯 살이었고, 불쌍하다는 말은 고아원 내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노부인이 그 말과 함께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기에 그저 칭찬인 줄로만 알았다.
‘지도사님, 불쌍한 것이 뭐예요?’
‘……테사,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들었니?’
나중에 지도사에게 물어 그 뜻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가 단번에 와 닿는 것은 아니었다. 테사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아무렴 뭐 어떤가 싶었다.
‘우린 불행해.’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그녀보다 몇 살은 더 많은 여자애가 말했다. 테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불행해? 왜? 그 물음에 여자애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우린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니까.’
‘……으응…….’
‘넌 네가 왜 부모한테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여자애의 물음에 테사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왜 갓난아기 때 버림받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벙어리가 된 듯한 테사의 반응에 여자애가 재차 말했다.
‘불행하니까 갖다 버린 거야.’
불행하여 부모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아이.
그것이 제 처지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기까지 테사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테사는 알게 되었다. 날 때부터 제게는 불행이 가득했음을. 중간에 빛을 만나 느끼지 못했을 뿐, 불행은 아직도 그녀의 곁에 남아 있음을 테사는 알 수 있었다.
‘날 두고 행복해질 생각 따윈 하지 마. 넌 영원히 불행해야 해.’
헤르트가 죽은 줄로만 알았을 때, 꿈에 나타난 헤르트는 늘 피를 흘리며 테사에게 그런 원망 어린 말들을 내뱉었다. 그래서 테사는 그에게 목이 졸려 괴로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헬, 네 말이 맞다고. 나는 여전히 불행할 거고, 앞으로도 불행할거라고. 내 불행이 너까지 모두 망쳐 버렸다고. 그렇게 헤르트에게 목이 졸리다 악몽에서 깨어나면, 테사는 어두컴컴한 독방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럴 때는 등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길 바랐지만 또 살아남았음에 안도하며, 헤르트와 한 약속대로 아직 제 곁에 불행이 있음을 안심하며 말이다.
그래, 자신은 계속 불행해야만 했다. 불행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날 원한다고 해. 내가 없으면 안 되겠다고.’
나는 널 원할 수 없어, 헬.
‘날 사랑한다고. 네 입으로 말해 봐.’
널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어.
내 사랑은 널 불행하게 만들 거야.
테사는 헤르트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서둘러 그에게 멀어져야만 했다. 제 불행이 그를 다시 좀먹어 불행하게 만들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가 않는다. 오래도록 헤르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사실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고 목덜미를 둘러 그를 껴안고 너를 원한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하지만…….
‘이제 보니 다 순 거짓말뿐이야. 너를 내가 어떻게 믿어?’
테사는 숨을 들이켰다. 헤르트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겠다 하는, 그 말들이 가슴을 비수로 마구잡이로 찔러대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시 속삭였다.
내가 삼키라고 했잖아. 네 불행은 네 선에서 끝내라고. 너만 없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러니 네가 모조리 삼켜! 그 지긋지긋한 불행도, 욕심도 네가 모두 끌어안고 사라져!
사라지라고!
귓가를 찌르는 날카로운 고함에 테사는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심장이 거세게 쿵쿵 뛰었다. 이어 거친 숨소리와 함께 희미한 촛불 빛이 일렁이는 방 안이 보였다. 마지막에 보았던 방과는 또 다른 방이었다.
테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윽고 제가 얇은 드로어즈를 입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정사의 흔적으로 더러워졌을 몸이 방금 흘린 식은땀을 제외하면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에 난 땀을 훔치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려 애를 썼다.
‘내가 이번에는…… 얼마나 잔 거지……? 그리고 여기는…….’
테사는 무의식적으로 마니를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마니가 병사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는 것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테사는 직접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다리에 힘이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를 부르기도 애매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테사는 큰 문제에 봉착하고야 말았다. 그녀의 한쪽 발목에 무언가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테사는 믿기지 않는 듯한 눈빛으로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단단한 가죽으로 만들어져 안쪽에 부드러운 천을 덧댄 그것은, 죄수들에게 흔히 쓰이는 차꼬는 아니었지만 발에 차는 족쇄인 것은 분명했다.
당황한 테사가 족쇄를 풀기 위해 그것을 잡아당겨 보았지만 역시나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단단한 가죽띠는 그녀의 발목에 맞게 꽉 고정된 상태였다.
때문에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가죽과 이어진 사슬이 찰랑거리며 금속음을 내었다. 테사는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 손이 떨려 왔다.
그 때 방과 이어진 문 바깥으로 여러 말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뒤 문이 슥 열리면서 테사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어 보자 그곳에는 헤르트가 서서 테사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멀끔한 차림새를 한 그는 테사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헤, 헬……. 이게, 이게 대체…….”
“신경 쓰지 마. 안전장치 같은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