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머리가 울린다. 얻어맞은 뒷목부터 온몸이 뻐근하기 그지없었다. 랑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마구잡이로 기침을 쏟아냈다. 그의 머리에 씌운 낡은 천에 먼지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얼마간 기침을 하다가 이윽고 제 상태를 천천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불구가 되기 전인가 본데…….’
손발이 의자에 꽁꽁 묶여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몸은 멀쩡했다. 자고 일어나 보니 팔 다리 하나쯤은 사라져 있는, 그런 무서운 상황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일단 안심이 되었다.
팔다리가 멀쩡하니 운이 좋으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이곳에서 어떻게 탈출하느냐, 겠지만.
‘시야가 확보가 안 되니까,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그의 얼굴 전체를 뒤덮은 천 때문에 앞이 좀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헤진 천 사이로 붉은 촛불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니 적어도 창문이 있는 방 안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조금 내어 말해 본 결과 말이 울렸다. 텅 빈 창고 같은 개념의 방일 수도 있었다.
‘아직 날 살려둔 걸 보면, 역시 내 배후가 누군지 알아내려고 하는 거겠지?’
랑그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손발에 묶인 밧줄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했다. 역시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묶인 밧줄은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듯했다. 빌어먹을. 랑그는 저도 모르게 욕을 뇌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맨손으로 묶인 밧줄을 끊어내는 초인적인 힘은 없었다. 즉 이대로 가다간 그들에게 흠씬 얻어맞다가 뒈지게 생겼다는 소리였다.
‘아냐, 정신 차리자.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나. 정신만 바짝 차리면 솟아날 구멍 하나쯤은……,’
그 때였다. 덜커덩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게 느껴졌다. 이어 얼마 뒤 랑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천이 쑥 하고 벗겨졌다. 그제야 제대로 앞을 볼 수 있게 된 랑그가 확 쏟아지는 불빛에 눈을 찡그렸다.
“윽.”
“정신 차려, 첩자 새끼야. 우리 사이에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철썩! 랑그의 뺨으로 두터운 손이 날아들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적인 상대방의 행위에 랑그의 온몸이 뒤흔들렸다. 그는 곧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그제야 저를 때린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얼굴 위로 길쭉한 상처가 난 남자였다.
“이봐, 우리 좋게 좋게 말로 해결하자고. 다짜고짜 사람한테 손을 날리면 쓰나.”
“흥, 여유로운 척하기는. 두고 보자고. 이따가도 계속 그런 태도일지.”
남자가 랑그에게 멀어져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 책상 위에는 고문 도구로 보이는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때문에 랑그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에게 저 고문 도구들은 익숙했다. 이곳에서 잡히지만 않았다면 저 고문 도구를 만지고 있을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하, 모든 건 다 돌아온다더니.’
운도 지지리 없지. 랑그를 스스로를 애도하며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그간 행했던 제 죄가 돌아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사실 솔직하게 말해서,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그저 먼 훗날 미래의 일이라고만 막연하게 생각했지. 이렇게 가까운 미래일지는 누가 알았나.
“저기, 이봐. 우리, 말로 해결하자니까? 나한테 묻고 싶은 게 있지 않아? 물어봐, 말해 줄게.”
“그래, 묻고 싶은 거 많지. 근데 재미 좀 볼까 하고. 어차피 말할 입만 멀쩡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하, 무서운 소리를 잘도 하네.”
저 개새끼. 미처 말하지 못한 단어를 목구멍 안으로 쑤셔 넣으며 랑그가 어색하게 하하 웃어 보였다. 여기서 나가면 넌 죽었어. 그는 상대방의 얼굴을 기억하려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머지않아 남자가 기다란 쇠꼬챙이를 들고 랑그 앞에 섰다. 랑그는 다시 한번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고서 식은땀을 흘렸다.
“오른손?”
남자가 쇠꼬챙이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뭐가?”
“오른손잡이냐고.”
“미친 새끼.”
랑그는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남자가 이다음에 제게 할 짓이 대충 예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남자가 눈치챘냐며 비릿한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그래도 배려해 주잖아. 오른손잡이면 왼손을 못 쓰게 해줄까 했더니.”
“참 눈물 나는 배려네. 그딴 거 필요 없거든.”
“이런 안타깝군. 그럼 내 마음대로 정하지 뭐.”
남자가 쇠꼬챙이를 세워 들었다. 그리고 랑그의 오른손을 향해 내려찍으려던 차였다. 똑똑,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남자는 잠시 뒤를 돌아봤다. 이에 랑그가 반색하며 그를 부추겼다.
“손님이 찾아왔나 본데. 가보지 그래?”
“좋아하지 마. 마저 하고 갈 테니.”
“아악!”
남자가 순식간에 랑그의 오른손에 쇠꼬챙이를 꽂아 넣었다. 불붙듯 뜨거운 고통이 손바닥으로 몰려들었다. 랑그는 비명을 지르며 오른손을 벌벌 떨었다.
정확히 손바닥 한가운데를 관통한 쇠꼬챙이가 보였다. 눈물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겪어왔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방심하기는.”
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랑그를 내려다보며 한마디 했다. 그리고는 방문 앞까지 걸어가 문을 열고 나갔다. 열린 문틈 사이로 작은 말소리가 오갔다. 랑그는 최대한 그것을 엿들으려 노력했지만 오른손 때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윽고 대화가 끊기고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랑그에게 쇠꼬챙이를 꽂아 넣었던 남자가 아닌 흰 가면을 쓴 사람이었다.
랑그는 그자를 유심히 쳐다봤다. 걷는 자세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 사람은 직전의 남자처럼 책상 앞에 가 서더니 날카로운 칼 하나를 집어 랑그 앞으로 다가왔다.
“……이봐, 지금 내 손에 꽂혀 있는…… 이거 안 보여? 동시에 그러는 건 좀 반칙―”
그러나 이번 상대는 그것으로 랑그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발이 묶여 있는 밧줄을 끊어주었다. 랑그가 얼떨떨해 하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상대는 그의 오른손에 꽂힌 쇠꼬챙이를 빼냈다. 랑그가 다시 한번 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입만 살기는.”
챙그랑! 쇠꼬챙이가 바닥을 뒹구는 것과 동시에 랑그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상대가 가면을 벗어 보이며 그에게 얼굴을 드러냈다.
“랑그 제프리, 꼴이 우습구나.”
“……각하!”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밖에 대기 중이던 후작의 부하가 남자의 얼굴 위로 천을 덮어 의자에 앉혀 손발을 묶어놓는 동안 랑그는 제 오른손에 붕대를 칭칭 감으며 책상에 기대고 앉은 베아트리체를 쳐다봤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얼굴이었다.
“네 행방쯤이야 늘 주시하고 있단다.”
“그걸 묻는 게 아니잖습니까. 왜 각하께서 여기까지 걸음하셨냐고 묻고 싶은 거예요.”
“겸사겸사라고 해두자. 다른 건?”
지금 어서 마저 물어보라는 식으로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까닥였다.
“이곳에 대해 예전부터 알고 계셨어요?”
“알다마다. 내 계획의 일부인 걸.”
“……설마.”
랑그가 경악하는 사이에 그녀가 재차 고개를 까닥였다.
“다음.”
“……왜 지우셨어요?”
“내 개새끼의 과거 말이야? 그야 중요하니까.”
“각하!”
마지못해 랑그가 낮게 소리치자 베아트리체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품 안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모든 일처리를 끝낸 부하가 다가와 그녀의 시가에 불을 붙여주었다. 시가의 끝에서 한줄기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베아트리체가 시가를 입에 물었다.
“제프리, 내가 왜 너를 그놈한테 붙여줬다고 생각하니?”
후, 연기를 내뱉으며 질문하는 후작에게 랑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샤인 경을 감시하기 위해서였죠. 그분을 보좌할 마땅한 사람이 없기도 했고.”
“그래, 내가 그놈한테 널 붙여준 건 감시가 필요해서였지.”
“하지만 감시라는 목적치고는 제게 따로 내리시는 지령이 없지 않습니까. 보고도 제때 받지 않으시고. 감시는 그저 명분이고 목적은 따로 있으셨던 거죠?”
랑그의 질문에 베아트리체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눈치 빠르기는. 그녀는 기댔던 책상에서 떨어져 의자에 묶여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제프리, 네가 앞으로 내 밑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다.”
“그게 무슨…….”
“네 소속이 그놈 밑으로 바뀐다는 소리지.”
“설명이 더 필요합니다, 각하. 저는 임시적인…….”
그 때 베아트리체가 뒤돌아 랑그를 쳐다봤다. 그녀는 꽤나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임시적인 건 없어. 모든 건 현재에 한정되어 있지. 지금이 없으면 그 다음이 없는 거니까. 제프리, 너는 나와 그놈을 잇는 통로가 될 거다. 네 역할은 그거야. 그놈의 과거를 왜 지웠냐고 물었지?”
“……네.”
“요 몇 년간 칼리아스 공작은 내 눈엣가시였다. 내가 그 새낄 얼마나 족치고 싶어 하는지는 너도 잘 알겠지. 하지만 명분이 없었어. 그래서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그 새끼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번번이 내 계획에 어깃장을 놓은 쓰레기들 치울 명분 말이야.”
하나의 쓰레기를 치우는 것에는 그깟 명분 하나쯤은 없어도 되지만, 그 쓰레기가 산을 이루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베아트리체는 쓰레기산을 치우기 위해 지금까지 산 전체에 뿌릴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름과, 그리고 횃불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불씨를 키울 단계였다. 불씨만 던져 주면 그간 놓았던 덫이 그들을 삼키고 삼켜 커다란 불꽃이 될 테니까.
“아직 이 나라는 건재하다. 왕실에 대한 왕국민의 충성도 또한 높아. 그렇기에 왕의 힘은,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나온다. 쓰레기를 그저 보이지 않게 치워두기만 해봤자 소용이 없단 소리야. 그러니 그들에게 보여줘야 하지 않겠니. 커다란 불꽃을 말이야.”
“각하, 그게 무슨…….”
“그놈은 내 중요한 패야. 내 승리를 위해서 내 발밑으로 스스로 굴러들어 온 행운 같은 거라고. 그러니 그 행운을 나는 절대 놓을 생각이 없어. 오히려 잘 구슬려서 내게 헛된 마음을 먹을 수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어?”
베아트리체는 시가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끄며 말했다.
“개새끼는 다음 대 칼리아스 공작이 될 거란다.”
물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공작을 바닥으로 끌어내야겠지. 이곳은 그런 곳이란다. 제프리.
후작의 웃는 얼굴에 랑그는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