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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79화 (79/138)

079화

그러나 테사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헤르트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거짓말.”

단호한 음성이 테사를 짓눌렀다. 곧 헤르트가 그녀를 압박하듯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또 여길 빠져나가려고 거짓말하는 거지? 내 동정심을 이용해서 날 방심하게 하려고. 아니야? 이제 보니 다 순 거짓말뿐이야. 이런 너를 내가 어떻게 믿어?”

“……그……런…….”

“너무 억울해 하지 마. 네가 자초한 거니까. 오늘 도망만 안 쳤어도 난 네 말 믿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테사는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불행이 기어코 자신을 집어삼킨 것이다. 여기서 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네 자리는 여기가 제일 잘 어울려. 불행이 그리 속삭이는 듯했다. 테사는 숨을 헐떡거렸다. 겨우 뱉어낸 불행이 다시금 꾸역꾸역 밀려오고 있었다.

믿어준다고…… 분명 믿어준다고 했으면서……. 테사는 눈물을 죽죽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많은 말들이 입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데도 내뱉질 못했다.

왜, 왜 믿어주지 않아? 대체 왜……. 오늘 일도 내 잘못이 아닌 걸. 난 정말로 도망친 적이 없는데……. 테사는 멍하니 헤르트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캄캄한 어둠을 밝혀주었던 빛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내가 한 번에 믿는다는 것도, 사실 웃기지 않아? 널 믿었다가 오늘도 이렇게 배신을 당했는데. 나로서는 지금 당장 널 믿을 만한 이유가 없지.”

헤르트는 충격에 빠진 듯한 테사를 응시하며 말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정말로 테사의 말을 무조건 믿어줄 만한 이유가 없었다. 이미 두 번이나 배신당한 그로서는, 지금 이렇게 나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 누구라 한들 자신을 두 번씩이나 버린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날 배신한 적이 없어? 이렇게 보란 듯이 배신했으면서…….’

물론 테사의 대답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그녀도 속아서 이곳으로 팔려 왔다는 것.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말.

무시하고 싶어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을 수도 없었다. 물론 그녀가 오늘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면, 바로 믿어버렸겠지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테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내뱉는 거짓말이라고. 여기에 또 속으면 그건 정말로 상병신임을 드러내는 꼴이라고, 헤르트는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헤르트는 부하인 랑그가 돌아올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그는 차게 식은 눈빛으로 잡았던 테사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이제 그만 하자. 입만 열면 거짓말이잖아. 그런 너와 무슨 말을 하겠어.”

“……헬!”

제게서 멀어지려는 헤르트에게, 테사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기회는 아까가 마지막이었다고, 너는 그 기회를 저버렸다고 이대로 헤르트가 저를 영영 버리려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싫어. 가지 마, 헬. 테사는 울며 그에게 매달렸다.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다시 그와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 뭐, 뭘 해야…… 네게 믿음을 줄 수 있어……? 하,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제발…….”

테사는 절박했다. 헤르트에게 믿음을 주고 싶었다.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증명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으면 했다.

“제발, 헬……. 내, 말을…….”

헤르트는 구원줄이라도 잡은 양 제 옷자락을 있는 힘껏 꽉 쥔 테사의 가냘픈 손을 쳐다봤다. 그녀가 얼마나 궁지에 몰려 있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테사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헤르트는 속으로 조소했다. 애초에 이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제게서 도망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나? 자신이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는 것쯤은 예상했어야지. 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고 어떻게든 잘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정말 최악이었다.

“넌 아직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나 봐.”

“……내, 내가 뭘…….”

“끝까지 이런 식이지.”

이쯤 되면 다시금 헷갈린다. 영악한 건지, 아님 정말로 모르는 건지. 줄곧 헤르트가 원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는 눈물로 젖은 테사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술을 떼었다.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하, 할게. 할 수 있어……. 하라는 대로, 뭐든…….”

“그러면…….”

헤르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 그가 원했던 건 처음부터 오로지 단 한 가지였다.

“날 원한다고 해. 내가 없으면 안 되겠다고.”

헤르트는 테사를 원했다. 자신처럼 그녀가 자신을 원하기를.

그는 언제나 그것만을 원했다.

“날 사랑한다고. 네 입으로 말해 봐.”

테사는 일순 말이 없었다.

사랑……?

자신이 헤르트를 사랑한다고…… 해도 되나?

갑자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그야 당연했다. 지금까지 그럴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원한다는 욕심은 당연하게도 테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헤르트를 사랑해도…… 되는 거야?’

헤르트와 함께이고 싶기는 했다. 저를 향해 다정히 웃어주는 그를 매일같이 보고 싶었고, 그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으니까. 그만큼 헤르트가 좋았다. 그를 좋아했다. 그래서 욕심까지 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사랑은……. 속이 울렁거린다. 테사는 한 번도 자신이 헤르트를 사랑해도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를 지옥에 밀어 넣은 사람이, 그를 사랑해도 된다고? 아냐, 아니야.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건 정말로…… 염치가 없는 거잖아.

사랑은 숭고해야만 했다. 하다못해 더럽혀져서는 안 되었다. 서로만을 향해야 하는 그 감정은 불순해지면 오래가지 못했으니까. 그러므로 헤르트를 향한 테사의 감정은 깨끗할 수 없었다. 이미 제 모든 것이 더러워졌다고 여겼기에 그녀는 제 자신이 그 순수한 감정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테사는 헤르트를 사랑할 수 없었다.

그녀의 사랑은 그에 비해 하찮고 보잘것없기에.

“왜 망설여? 설마 죽어도 나 같은 건 사랑할 수 없어서?”

그 순간 날카로운 음성이 테사의 귀를 찔렀다. 문득 돌아간 고개를 원래대로 돌리니 헤르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화가 난 듯 보였다.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헬, 나, 나는…….”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넌 나와 결혼하게 될 거니까.”

“그게 무슨…….”

결혼이라니?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단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테사는 얼어붙었다. 내가 헤르트와 결혼을 한다고? 머릿속이 이젠 새하얗다 못해 텅 비어버렸다.

결혼이야말로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은 아예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단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미 테사는 한 번의 결혼을 했다. 원치 않던 늙은 남편은 죽어버렸지만 어쨌거나 현재 테사의 공식적인 위치는 죽은 유테르트 후작의 후처였다.

그런 자신이 앞날이 창창한 헤르트와 결혼이라니.

“뭐든지 하겠다고 한 건, 너야. 너라고. 그러니까 말도 안 된다는 그딴 빌어먹을 얼굴은 제발 좀 집어치워.”

눈에 띄게 창백해진 테사의 안색을 발견한 헤르트가 씹어뱉듯 사납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반응으로, 자신과의 결혼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하,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아무리 싫어도 넌 나와 결혼해야 해. 알았어?”

테사는 손을 떨었다. 자신은 그저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었다. 염치없게도 그를 사랑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의 하나뿐인 부인 자리를 원하고 싶진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테사는 유령처럼 조용히 헤르트만을 바라보며 살다 죽고 싶었다.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불현듯 후작 부인과 언젠간 나누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샤인 경은 훌륭한 기사랍니다, 테사. 그래서 경께서는 지금보다 앞으로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거예요. 경은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인재니까요. 경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겠죠.’

후작 부인의 말이 맞았다. 헤르트는 훌륭한 인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원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건 누가 봐도 확실했다. 따라서 그의 가치는 더욱 높아져 갈 것이고, 결국엔 테사가 쳐다보지도 못할 귀한 사람이 될 터였다.

무엇보다 헤르트는 보르웬 후작의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다. 후작이 그와 잘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 짝지어줄 것이다. 신분과 핏줄이 중요한 이 바닥에서 결혼이 그를 뒷받침해 줄 테니까.

분명 우아한 귀부인 출신에 교육을 받아 똑똑하고 명석한 여자가 그의 부인이 되겠지. 고아로 자라 교육을 받지 못해 멍청하고 무지하며, 고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자신과는 달라도 한참 다를 것이다.

‘역시 헤르트의 옆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야…….’

사람들도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할 터였다. 애당초 우스운 일이다. 후처가 재혼을 한다는 것은……. 모두가 테사를 비웃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분수도 모르는 년이 큰 욕심을 낸다고.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사내의 앞날을 막는다고. 코가 다시금 찡해져 온다.

‘내, 내가 헤르트에게…… 방해가 될 거야…….’

그건 안 돼. 그를 방해할 수는 없어.

그 때였다.

“역시 그것도 거짓말이지? 다 하겠다는 말.”

허탈한 듯 어처구니가 없다는 사내의 말이 들려왔다. 테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헬, 나는, 그저…….”

“그러면 왜 말을 못 해? 나와 결혼하는 게 그리 끔찍해 할 일이야?”

“나는 이미, 결혼을…….”

“시발, 그 뒈진 새끼는 말도 꺼내지도 마.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재혼이 별건가?”

“사람들이…….”

“핑계 대지 마. 난 지금 너랑 말하고 있잖아. 우리 사이는 알지도 못하는 그딴 놈들이 아니라.”

그 순간 헤르트의 시선이 흐트러진 테사의 옷차림에 닿았다.

“아니면 몸은 줘도 마음까진 주기 싫다는 건가?”

“……그, 렇지 않―”

“그냥 솔직하게 말해. 온갖 변명 늘어놓지 말고. 기분 더러우니까.”

“나는 정말로…….”

“그럼 증명해 봐.”

증명? 그 말을 끝으로 헤르트는 테사의 치맛자락을 들추고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사내의 뜨거운 손이 순식간에 안쪽을 헤집고 들어와 허벅지를 잡아 벌리자 테사는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그녀의 얼굴 위로 헤르트의 더운 숨이 쏟아졌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받아들여. 그러면 날 거부한 것 정도는 모르는 척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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