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헤, 헤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테사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헤르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 작은 신음 하나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는 지금 몹시도 화가 난 상태였다. 속이 엉망으로 엉켜들어 배가 아플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알아?”
“……헬, 나, 나는―”
“그 여자들을 두둔하는 것도 모자라서 나한테 거짓말까지 하잖아. 그래놓고 부탁? 시발, 너는 내가 안중에도 없지?”
테사가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기를 바랐다. 그랬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백번 양보해서 이곳은 그녀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심어준 곳이니까. 자신을 학대한 소후작이 떠올라서 이곳에서 지내기 싫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헤르트는 테사에게 화를 낼 수 없었을 터였다. 오히려 별관으로 그녀의 거처를 옮겨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놓고 거짓말을 해?
역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데 도가 튼 여자다.
게다가 거짓말이 발각되자 제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들의 안위부터 챙기다니. 정말로 자신이 그 여자들을 해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 점이 헤르트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았다.
‘테사, 너에게 나는 뭐야? 하녀보다 못한 놈이었던 거야? 어떻게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 여자들을 두둔할 수가 있어? 나는? 네가 사라져서 불안에 떨었던 나는 안중에도 없어?’
헤르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테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테사도 제게 마음이 있다고…….
자신이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큼 그녀도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고…….
분명 그리 생각했는데.
“날 이토록 무시하는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너는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헤, 르트……. 그게 무슨…….”
“그 하녀가 그렇게 소중해? 그 여자가 나를 두고, 버리고 함께 떠날 만큼 중요해? 나는…… 정말 네 안중에도 없어?”
저도 모르게 말아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헤르트는 씨근덕거리며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양 당황해 하는 테사를 노려봤다.
“말해 봐, 처음부터 나한테 미안한 감정이 단 한 톨이라도 있긴 했어? 아니다. 있었으면 거짓말하는 것도 모자라서 내 앞에서 감히 그 여자들을 감쌀 생각은 못 했겠지.”
미친 듯이 화가 났다. 테사가 제게 되먹지도 않은 작별 편지 한 장만 두고 사라졌던 그 순간보다도, 그 이상으로 화가 났다. 지금까지 테사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음을 확인받는 것 같았기에 참을 수가 없었다.
더불어 저 혼자서만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매번 생각하고 고민했던 것 같아서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그저 날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거였어…….’
테사에게 헤르트란 존재는 이용해 먹을 존재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와중에 제 앞에서 남을 감싸고 돌기 급급했던 거고.
제게 노력하겠다고 한 것도, 배신하지 않겠다 한 것도 그저 자신을 방심시키기 위해 마음 없이 내뱉었던 말이 분명했다. 제 앞에서 눈물을 내비춘 것도 그와 같은 행동이었을 터였다.
헤르트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너무나도 순진했다. 다시 한번 그녀를 믿고 그녀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꿈꾸었던 자신이 병신이었다. 제 앞의 여자는 한 번도 그런 것 따윈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 텐데……. 그저 저 혼자서 헛된 꿈에 부풀어 망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뻥하고 뚫린 기분이었다. 꾸역꾸역 구멍으로 밀어 넣었던 것들이 모두 모래가 흘러내리듯 빠져나가 다시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맙소사. 헤르트는 문득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 모든 걸 다 바쳤는데,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까.
겨우 지옥에서 살아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지옥은 그에게 아주 가까이 있었다.
“차라리 거짓말을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너는 어떻게…….”
테사가 그에게 지옥이었다.
“매번 이리 나에게 잔인하게 굴어…….”
헤르트는 테사를 아예 침대 위로 밀어 넘어트렸다. 점점 정상적으로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제게 대놓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끔찍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헤르트는 테사를 향한 분노를 더 이상 눌러 담지 않고 쏟아내기 시작했다.
“왜 도망가려고 했어? 대체 뭐가 부족했는데? 잘해줬잖아. 7년 전 일도 내가 잊겠다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잖아! 그냥 내가 싫었어? 그래서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그 마음에도 없는 말들까지 내뱉으면서 기회를 기다렸던 거야? 어?”
“아파, 헬……. 난 정말 도망간 적 없어……!”
“그러면 그 빌어먹을 부인과는 왜 같이 있었는데! 그것도 한날 한시에 같은 곳에서!”
“말했잖아, 제발, 헬……! 우리는 우연히…….”
사내가 꽉 쥔 어깨가 너무 아파 테사는 반쯤 울다시피 낮게 소리쳤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질식해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제발, 헬……. 정말로 나, 납치를 당했어……. 그 사람들한테서 도망치다가…… 만난 것뿐이야. 마니가, 마니한테 돈을 빌려준 자들이…… 나, 나를 납치했어! 정말이야, 흑, 정말로…….”
“웃기지 마. 이 성 안에서 누가 널 납치해? 그딴 새끼들이 있었음 진즉에 내 귀에 들어왔어. 애초에 살아서 널 만날 일도 없었다고. 내가 널 보호하려고 얼마나 많은 인력을 네 주위에 갈아 넣었는데.”
발각되는 간첩이란 간첩은 모조리 목을 베어 처리했다. 남겨두면 반드시 탈이 되어 돌아올 테니까.
그 결과 웬만한 자들은 테사의 치맛자락도 보지 못했다. 새로이 영주가 된 헤르트가 끼고 살다시피 하는 여자가 성 안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여자가 테사인지, 다른 누구인지 그들은 몰랐다.
그런 테사를 그들이 어떻게 알고 납치한단 말인가? 애당초 테사의 안전을 위해 붙여준 자들만 해도 수두룩했다. 그 감시를 뚫고 그녀가 납치를 당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자넷과 도망을 계획하고 호위들을 빼돌렸다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적어도 자넷은 보르웬 후작의 사람이었으니, 이곳에 있는 병사들에게 협조를 요청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것도 그 나름대로 문제가 심각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니까. 오늘 일이 지나고서 헤르트는 모조리 뒤엎어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봐봐, 넌 또 거짓말이지.”
“아니야, 헬……!”
“네가 납치를 당했다 쳐도, 그곳에서 그 여자와 우연히 만났다는 게 말이 돼? 다시 말하지만 네 거짓말은 허점투성이야.”
테사는 헤르트의 노기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분명 괜찮아질 거라고, 헤르트에게 차차 설명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
“정말이야, 마, 마니한테 물어보면…….”
“말했잖아, 당연히 물어볼 생각이야. 죽기 싫으면 말하겠지.”
“그……러지 마, 제발!”
테사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의 헤르트는 정말로 마니와 자넷을 반쯤 죽여서라도 그가 듣고 싶은 답을 얻어낼 사람처럼 보였다.
헤르트 역시 굳은 얼굴로 차게 쏘아붙였다.
“네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이젠 내게 없어. 그리고 그 여자도, 그 하녀도 죗값은 치러야지. 안 그래? 셋이 작당 모의해서 날 병신으로 만들었는데.”
“……헤, 헬, 제발……. 부탁할게, 제발…… 그러지 마…….”
테사는 재차 헤르트에게 매달리듯 애원했다. 자신 때문에 다른 이가 잘못되는 것은 더 이상 보기 싫었다. 그러나 그런 테사의 태도는 오히려 헤르트의 화를 더 부추겼다.
“하, 지금 네 입장이 뭔지 몰라서 그래? 그런데도 나한테 이렇게 나오겠다고? 너는 역시 내가 중요하지도 않지? 그냥 내가 너한테 잘해주니까 모든 걸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헬, 그게 아니잖아. 제발, 내 말 좀…….”
“그럼 말해 봐. 7년 전에 왜 날 배신했는지. 그럼 고려는 해볼게.”
“그건…….”
헤르트의 물음에 테사가 멈칫했다.
“왜 그래? 원래대로라면 오늘 내게 해줄 말이었잖아. 아니야? 말해 봐, 왜 날 배신했어?”
헤르트의 재촉에도 테사는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선뜻 말하지 못했다. 그걸 지금 여기서 말하라고……?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테사의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오늘 제게 일어난 일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그인데, 고아원 원장에게 속아 이리 되었다는 걸 과연 믿어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테사는 쉽사리 말하지 못했다.
“싫어? 그럼 그 여자들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거네?”
“……그, 그게 아니…….”
“그럼 말해. 왜 날 배신했냐고!”
헤르트가 테사를 향해 윽박질렀다. 테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몸을 떨었다. 내어선 안 되는 욕심을 부려서 이렇게 벌을 받는 걸까? 왜 하필 지금……. 테사는 상냥했던 소년의 모습이 사라진 헤르트를 올려다봤다. 그에게는 이제 분노만이 남아, 그를 잠식한 것처럼 보였다.
‘싫어. 무서워. 제발…….’
테사는 숨이 막혔다. 악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늘 꿈속에서 그녀를 비난하고 원망 어린 비명을 질렀던 사내가 바로 제 앞에 있는 것 같았다. 헤르트가 저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의 목을 조르다 못해 불행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
누가 나 좀…….
“……없어!”
테사는 울음을 터트림과 동시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뭐?”
“없어,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헤르트의 목소리가 일순 낮아졌다. 이윽고 테사는 엉엉 울었다. 눈앞이 희뿌옇게 변해버려 헤르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계속 토해 냈다. 눈물이 하염없이 계속 흘러내렸다. 그칠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나, 흐윽, 나도, 소, 속았어……. 내, 내 잘못이…….”
사실 영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멍청해서, 순진하기 짝이 없어서 그들에게 속아 우리의 인생이 이리 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았다.
테사는 헤르트에게만큼은 그 이유를 숨기고 싶었다. 영원히 그가 몰랐으면 했다. 말을 해도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치 혼자 살고자 내뱉는 처절한 비명 같지 않은가.
벼랑 끝에 몰려 살려달라고 외치는 듯한 변명.
테사는 이런 식으로 헤르트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워, 원장이 중개인과 짜고, 날 속이고 나도, 너도 팔아넘긴 거야……. 헤, 헬 나도 널 배신하려는 게…….”
“…….”
“아니었어……. 나, 난 널 배신한 적이 없어…….”
믿어줘. 제발.
믿어준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