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7. 대가>
“왜 아직도 소식이 없지?”
남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는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들통났나? 급기야 남자의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를 별짓 다 한다며 한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여자가 꼬았던 다리를 까닥였다.
“정신 사나워. 가만히 좀 있어봐. 조금 늦을 수도 있잖아.”
“그게 아니면? 다 알고 지금 우리를 잡으러 오고 있는 거면? 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외국으로 도망을 가야…….”
“가면? 거기까지는 안 쫓아온대? 지금은 여기로도 충분해.”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찻잔을 들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니까. 보통 때도 이 정도는 걸렸어. 지금쯤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이겠지.”
7년 전 팔아넘겼던 여자애의 행방을 알기 위해 사람을 보낸 지도 벌써 수일이 지난 상태였다. 사실 애가 타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워낙에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고 있어서 티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아냐, 중간에 일이 잘못된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고작 여자애 하나 행방을 아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리 없잖아.”
남자는 제 머리를 헝클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꾸만 머릿속에서는 산 채로 붙잡혀 끌려가 목이 잘리는 자신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착하게 살 걸. 남자는 재차 발을 동동 구르며 여자에게 낮게 소리쳤다.
“설마, 우리보다 후작의 개가 먼저 그 여자애를 찾은 거 아니야? 그럼 어떡하지?”
“그랬으면 벌써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놨겠지.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테고.”
“그게 지금 진행 중인 걸 수도 있잖아.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를 잡으러 오는 거지!”
남자가 왁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역시 직업 선택이 잘못되었던 것 같다. 그 검투사노예가 왕국의 실세인 보르웬의 개가 되어 살아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충동적으로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분간 이곳과 머나먼 외국으로 떠나야 했다.
“넌 여기에 남아 있든지, 알아서…….”
그 순간이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머지않아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들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 편지 두 통을 들고 서 있었다.
“마담, 편지가 왔는데요? 두 통 다 급한 소식이래요.”
“그래, 알았어. 이만 가봐.”
여자는 문을 닫고서 바로 편지들을 뜯어보았다. 연달아 두 통의 편지를 확인한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통의 편지에는 그들이 팔아넘겼던 여자애의 최근 근황에 대해 적혀 있었는데, 그녀를 후처로 맞이했던 유테르트 후작이 영지전에서 패배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영지를 공격한 이는 보르웬 후작의 오른팔로 활동하고 있는 기사며 현재 성은 그가 온전히 장악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다만 그 기사와 의뢰를 주었던 여자와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덧붙여져 있었다.
그리하여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성 안으로 잠입에는 성공했지만 나머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한 통은 혹시 몰라 대비해 두었던 덫에 누군가 걸려들었다는 소식이었다.
‘어느 정도는 각오했지만…….’
여자의 가라앉은 표정을 본 남자가 허둥지둥 그녀에게 따라붙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뭐야, 뭐야? 뭐라고 적혀 있는데?”
“아무래도 우리도 움직여야겠어.”
“뭐? 왜?”
여자가 남자에게 편지들을 건네주고, 책상 앞으로 다가가 남자가 방금 전에 열었던 서랍 속 무언가를 빠르게 챙겨 들었다. 그 새에 편지를 모두 읽은 남자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딸꾹질을 했다.
“마, 만난 거야? 지금 걔랑 걔가…… 만났다고 적혀 있는 거 맞지? 우린 이제……. 잠깐만, 너 어디 가려고?”
“이 상황에서 갈 곳이 여러 곳이겠어? 당연히 린데할로 가야지. 가서 관리자님을 뵐 거야. 그러니까 너도 잔말 말고 따라와.”
여자가 급히 방을 나서며 대꾸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
테사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모아 끌어 앉은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헤르트로부터 알 수 없는 의문만 얻고 성으로 돌아오고서부터 테사는 그녀가 평소 지내던 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안내되어 갇히고 말았다. 아무리 문을 두들기고 헤르트를 만나게 해달라 해도 그 누구도 그녀에게 답해 주지 않았다.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상황에 테사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물론 그때와는 환경도 대우도 몹시 다르긴 했지만, 방에 갇혔다는 것과 사람들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명을 우선시한다는 점이 충분히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불현듯 울음이 북받쳐 올라온다.
‘대체 왜?’
이해가 가지 않을뿐더러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오늘 하루 일어난 일에 대해서 테사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니의 일도, 자신을 납치하려는 사람들도, 자넷과 진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도, 그리고 헤르트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도.
테사는 알 수 없었다.
더불어 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모른 척 시치미 떼지 마. 장신구를 갖다 판 거, 저 여자랑 도망치려고 판 거잖아.’
모르는 척이라니. 장신구를 갖다 팔았다니. 도망치려고 했다니. 그게 다 무슨 말인데. 헤르트가 사납게 쏟아내었던 말들을 테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모두 처음 듣는 것들이었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헤르트는 그녀가 고의적으로 모르는 척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너무해…….’
테사는 코를 훌쩍였다. 문득 제게 설명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헤르트가 미웠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그를 믿고 모든 것을 다 털어놓기로 결심했었기에 그 충격이 더욱 컸다. 물론 자신에게 헤르트를 미워하고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속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헤르트가 와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안전하다고……. 괜찮아질 거라고……. 근데 이게 뭐야…….’
눈물이 콧대를 따라 흘러내렸다. 자신을 내팽개치듯 놓았던 헤르트의 손길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와 재회했던 때보다 더 매섭게 느껴지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은연히 다정하게 안아줄 헤르트를 기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제게 이럴 리 없다고 생각해서?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상처가 되어 돌아왔던 것은 그가 한 말이었다.
‘널 믿는 게 아니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테사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일시적으로 눈앞이 뿌옇게 변했고, 손발이 마구잡이로 떨렸다.
한편으로는 그 상황을 부정하기도 했다. 잘못 들었겠지. 헤르트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잖아. 믿어준다고, 기다려주겠다고 했는데 이제 와 갑자기 말을 바꿨을 리가 없잖아.
그러나 연이은 상황에 테사는 헤르트가 진심임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테사를 믿었던 것에 대해 후회하는 눈치였다.
‘너는 날 갖고 놀면서 언제든지 내 곁을 떠날 생각이었던 거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어. 정말이야, 믿어줘.
테사는 헤르트에게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말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농락한다며 화를 내었다. 그 후에는 성으로 먼저 보내어 방에 가두어버렸다. 꼴 보기도 싫다는 듯이.
그리고는 지금까지 테사를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믿어준다고 했으면서…….’
테사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꾹 삼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을 믿지 않는 헤르트의 태도에 서럽기만 했다.
이렇게 금방 말을 바꿀 거였으면 믿어준다고 말하지나 말지. 그럼 헛된 기대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이런 식으로 실망하고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흑…….”
심지어 말까지 가로막았다. 말하라며 으름장을 놓았을 때는 언제고 정작 말을 하려고 하니 그가 먼저 나서서 테사의 입을 막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말할 때까지 기다려준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어느새 테사는 조금씩 울분에 차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억울했던 탓이다.
“정말로…… 그런 적 없었는데……. 도망친 거…… 아니었는데…….”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나빠……. 정말 나빠…….
테사는 한참을 훌쩍이며 손바닥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나마 그 뒤부터는 실컷 울어서인지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벅벅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퉁퉁 부어 눈꺼풀조차 들어 올리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방문이 열렸다. 머지않아 테사가 있는 침대 앞으로 누군가가 조심히 다가왔다. 테사는 그녀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부인.”
“……마니?”
마니의 비교적 멀쩡한 모습에 테사는 제 앞에 있는 그녀가 헛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니가 여기에는 어떻게? 자신처럼 그 사람들에게 도망쳐 나온 것일까.
안 그래도 억울함을 꾹꾹 누르면서도 마니가 걱정되던 참이었다. 그녀를 구해야 하는데 자신은 이곳에 갇혀 있다시피 했으니까.
테사는 반쯤 몸을 일으키며 마니를 향해 움직였다.
“마, 마니. 괜찮은…… 거죠? 그 사람들이…….”
“네, 괜찮아요. 부인께서 도망치고 나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저도 빠져나왔어요.”
“다행이에요……. 저는 마니가 잘못될 줄 알고…….”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눈가를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테사가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차였다. 별안간 마니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그녀에게 빌기 시작했다.
“……부인, 사실 제가 말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어요…….”
“……마니, 그게 무슨…….”
“제가 부인의 장신구를 팔았어요…….”
마니가 눈물을 터트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테사는 멍한 얼굴로 제 앞의 마니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마니가 제게 숨기고 있는 게 더 있을 줄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정말,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돈이 너무 급했어요……! 저도 그러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가서…….”
“…….”
“죄송해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어요…….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너, 너무 겁이 나서…….”
테사는 그제야 헤르트가 왜 장신구를 언급했는지 알 수 있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왜 자꾸 이런 일들이 내게 일어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