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사내가 씹어뱉듯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렇게 풀어놔서도 안 되는 거였고.”
“그게 무슨…….”
“모른 척 시치미 떼지 마. 장신구를 갖다 판 거, 저 여자랑 도망치려고 판 거잖아. 시발, 처음에 아닐 거라 생각했던 내가 등신이지. 이딴 식으로 보란 듯이 날 엿 먹일 줄은 모르고.”
테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헤르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장신구를 갖다 팔았다고? 솔직하게 말해서 생각해 본 적은 있으나 실제로 그런 짓을 한 적은 없었다. 맹세코 제 모든 것을 걸고서 하지 않았노라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이 무슨 염치로 그가 준 것들을 내다 판단 말인가.
“아, 아냐, 그런 적 없어……!”
“웃기지 마. 그러면 네 장신구들이 왜 장물로 나와 있지? 그리고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결국 너는 날 갖고 놀면서 언제든지 내 곁을 떠날 생각이었던 거야.”
“그렇지 않……아!”
아니라고, 그런 적 없다고 피력하는 테사의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로 꽉 잡아 눌러 행동을 억압한 헤르트가 말을 이어갔다. 아직 내 말 다 안 끝났어. 그가 이를 갈며 테사를 매섭게 쳐다봤다.
“잘해주니까, 내가 정말로 호구 같아서 만만해?”
“헬, 나, 난…….”
“이번에도 날 아무것도 모르는 반병신으로 만들어서 사라질 생각을 하니까 좋았냐고.”
말을 하면 할수록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분이 차올랐다. 그는 솟아나는 화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양, 억울한 척을 하는 저 작은 얼굴을 보자 절로 열불이 났다. 왜 또 그런 표정이야. 왜 자꾸 피해자인 척 구냐고.
헤르트는 충격에 빠진 듯 눈을 껌벅이는 테사에게 마지막으로 숨을 씨근덕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됐어,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제발, 헬, 내 말을 좀…….”
“다시는 도망 못 치게 만들어줄게.”
헤르트는 내팽개치듯 테사를 놓았다. 마차의 바닥에 반쯤 엎어지다시피 한 테사가 급히 헤르트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가 마차에서 멀어지는 게 더 빨랐다.
“헤르―”
“데려가 가둬놔.”
쾅! 완전히 돌아선 사내의 너른 등을 마지막으로 마차 문이 닫혔다. 테사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로 허공을 응시했다. 아직도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체감이 되지 않았다.
대체 왜?
***
“여긴 대체 어떻게 된 게…….”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랑그는 급히 벽 모서리 너머로 몸을 숨겼다. 아까부터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기 때문이리라.
그는 벽에 몸을 최대한 밀착하며 차분히 호흡하려 노력했다. 이 조용한 공간에서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었다간 그들에게 발각되기 십상이었다.
‘빌어먹을, 붉은 수염이 인신매매단일 줄은 몰랐다고……!’
붉은 수염 그림 한 장만 들고서 린데할 영지까지 발걸음한 랑그는 조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 전체가 인신매매단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고 경악했다. 린데할 영지는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인신매매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관련 정보를 숨겨왔던 것이다.
정보상에게서 받은 붉은 수염 그림도 사실상 함정이나 다름없었다. 린데할 영지에 대해 파고드는 자가 있으면 제거하기 쉽게 덫을 놓는 것이다. 이곳의 일이 새어 나가면 곤란해지니까.
불운하게도 랑그는 그 덫에 휘말리기 직전이었고.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침착하자, 랑그 제프리. 지금까지 죽을 뻔한 고비는 숱하게 넘어왔잖아. 이번에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
랑그는 슬쩍 복도를 살폈다. 짙은 색의 로브를 써 얼굴을 가린 한 사람이 막 복도를 걷고 있었다. 랑그는 일단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지금까지 그가 얻어낸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린데할 영지는 비교적 신생에 가까운 영지로, 영주가 직접 다스리는 곳이 아닌 지역 상위 영주들이 관리인을 보내어 운영하는 작은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도로부터 받는 영향이 적을뿐더러 자금 흐름에 대한 감시가 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점을 이용하여 현재 영지 전체가 인신매매단에 이용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상위 영주들이라 하면…….’
그 이름들을 나열하던 랑그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지껄이고 말았다. 영주들 간의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보르웬 후작의 세력에 속한 자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는 관리인의 독단적인 행위인가? 하지만 이런 짓을 벌일 만큼 간이 큰 관리인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렇게 규모가 상당한 인신매매는 꼬리를 잡히기가 쉬웠다. 영지의 권한을 대부분 위임받은 관리인일지라도 뒤를 봐주는 이가 없다면 여기까지 일을 벌이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무엇보다 이 므슈에서 인신매매가 얼마나 큰 죄인지는 세 살배기 애도 아는 사실인데……. 대체…….’
누구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거지? 랑그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두 손 두 발 멀쩡히 보존하고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 목표가 또 하나 생기고 말았다. 서둘러 돌아가서 이 사실을 제 상관, 아니, 보르웬 후작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빨리 이곳을 나가서…….’
랑그는 다시금 복도를 살펴봤다. 방금 전 복도를 걷던 사람이 반대편으로 넘어갔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작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신이 왔던 길을 따라 바깥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던 차였다.
“이거 쥐새끼가 숨어 있었네?”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랑그는 시야가 순식간에 점멸되는 것을 느꼈다.
젠장, 망했다…….
***
테헤라의 사신단을 맞이하여 왕성에서 열린 연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쟌은 지루함을 애써 갈무리하며 조용히 칼리아스 공작의 행동거지를 슬쩍슬쩍 주시했다. 아직까지 공작에게서 별달리 이상한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어린 왕이 쟌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있잖아…….”
“네, 이만하면 많이 버티셨죠. 그만 가도 돼요.”
왕의 말에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쟌이었다. 람스의 눈꼬리가 잠시 축 처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냉큼 일어나 돌아갔을 터인데도 말이다. 이를 눈치챈 쟌이 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할 말 있어?
“……쟌은?”
“난 조금만 더 있다가……. 왜 무슨 일인데?”
“그게……. 오늘은…….”
“오늘 뭐?”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하라는 쟌의 재촉에 어린 왕의 얼굴이 조금씩 빨개졌다. 이에 왕의 옆에서 그를 보좌하던 시종장이 쟌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왕이 말하고 싶었던 것을 속삭여주었다. 쟌의 얼굴이 잠시 귀찮음에 휩싸였다.
“전하께서는 그걸 또 세고 계세요?”
“…….”
“조금만 더요. 기다려요.”
합방일이 뭐라고. 고작 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것뿐인데. 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칼리아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눈치챈 람스가 조금 억울한 투로 말을 던져 왔다.
“와, 왕비께선 남편보다 외간 남자를 더, 더 많이 보, 보는군그래.”
“질투하지 마세요. 덧없는 거니까. 그리고 저는 늙은 남자는 질색이에요.”
“진짜?!”
“그러니까 전하랑 결혼했죠.”
“그……렇구나…….”
남편의 뺨이 발그레해지는 것을 본 쟌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역시 쉽다니까.
얼마 후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자 쟌은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언니의 말대로 늦게 자면 키가 크지 않을 것이다. 칼리아스 공작을 더 지켜보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근데 왜 공작을…….”
“전하.”
“……응?”
“칼리아스 공작이 언제 므슈로 돌아왔었죠?”
쟌이 람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거야…… 2년 전에…….”
“그건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고. 그전에 몰래 므슈로 돌아온 적 있었잖아요. 아닌가?”
“아……. 으음, 생각이 잘 안 나지만…… 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럼 5년 전이네요.”
“아마도…….”
쟌은 잠시 입을 오므렸다 비죽이며 흠, 하고 추임새를 내뱉었다.
5년 전이라 하면 노쇠한 전대 왕이 쓰러진 직후였다. 당시 칼리아스 공작은 공작위를 물려받기 전으로, 외국에서 방탕한 삶을 즐기며 살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 전대 왕이 쓰러지고 현재 왕인 람스가 임시통치권을 물려받게 되자, 칼리아스 공작은 외국에서 므슈로 급하게 돌아왔었다.
“알았어요. 오늘은 이만하지, 뭐. 가자.”
“어? 진짜?”
“여자는 한입으로 두말 안 해요.”
쟌이 시녀의 도움을 받아 발이 닿지 않는 높은 왕좌에서 내려오자 람스 또한 시종장의 도움을 받아 바닥으로 내려왔다. 작고 어린 왕과 왕비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홀을 떠나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칼리아스 공작은 들고 있던 와인 잔 속 와인을 흔들며 시선을 낮게 가라앉혔다.
그 때 누군가 그의 옆으로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사내의 푸른 눈동자가 흥미로운 듯 빛을 내며 잠시 번득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얼마 가지 않아 칼리아스 공작 또한 자리를 비우면서 연회는 서서히 종막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환하게 반짝이는 왕성과 반대로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신전은 최소한의 불빛만 남겨둔 채로 적막과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곳에서 한 사제가 복도를 가로질러 어디로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미로처럼 꼬인 길을 지나 어느 한 방 앞에 선 사제는 노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예하!”
사제의 부름에 상석에 앉아 있던 긴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사제가 왜 이곳까지 발걸음했는지 알 것 같은 얼굴로 생긋 웃어 보였다. 사제가 별다른 말을 꺼내지도 않았건만 그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금방 가지요.”
자리에서 일어나던 남자는 이윽고 창가 앞에 서 있던 여자에게 가벼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악당의 자리를 빼앗기고 말 거예요, 리.”
그 말에 베아트리체가 피식 웃음 지었다.
“어디 한번 돌아가는 꼴 좀 구경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