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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73화 (73/138)

073화

“……자넷?”

로브가 얼굴의 반을 가렸지만 테사는 자넷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체구부터 목소리까지 모두 자넷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왜 여기에……?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기에 테사는 지금 제가 처한 상황도 잊고 입만 뻐끔거렸다. 별관에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이 시간에, 그것도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꼭 뭔가 몰래 도망가는 사람들처럼…….

그 때 뒤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찾았어? 얼른 찾아! 그제야 테사는 정신을 차리고 자넷에게 빠르게 말했다.

“자넷, 여기는 위험해요……!”

“테사,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넷이 테사의 등 너머를 힐끔거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도망가야…….”

안절부절못하며 등 뒤를 자꾸만 돌아보는 테사의 행동에 자넷 또한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는 듯했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진이 자넷이 들고 있던 짐 가방을 가로채 들며 말했다.

“아가씨, 일단은 부인의 말대로 이곳에서 벗어나는 게 좋겠어요.”

“그래.”

자넷은 우선 손에 들고 있던 불빛을 끈 다음, 테사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이끌었다. 진은 길을 안내하며 앞서 빠르게 빨리기 시작했다. 테사는 그런 두 사람을 따라 함께 달렸다.

하지만 이미 납치범들로부터 도망칠 때 많은 체력을 소모했던 테사는 얼마 안 가 쉽게 지쳤다. 원체 몸이 건강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힘겨워했다. 때문에 자넷이 뒤처지는 테사를 보고서 진을 불렀다.

“진, 잠깐만……. 조금만 느리게 가자.”

“……괜찮으시겠어요?”

“일단은 어쩔 수 없잖아. 이대로 가다간 테사가 쓰러지겠어.”

테사를 부축하며 자넷이 진에게 덤덤히 대꾸했다. 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사, 괜찮아요? 계속 움직일 수 있겠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마차가 있는 곳까지만…… 힘을 내요.”

“……괜, 찮아요…….”

“사실 천천히 걸어가고 싶기는 한데 제가 조금 서둘러야 해서요. 미안해요.”

“저야말로…….”

“일단은 말을 아껴요. 도착하면 말할 시간은 충분할 테니까”

세 사람은 다시금 말없이 빨리 걷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달빛마저 사그라든 숲속에는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진은 능숙하게 나뭇가지들을 쳐내며 길을 텄다.

얼마 뒤, 작은 공터에 도착하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미리 준비해 둔 마차로, 그들이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음을 알려주었다.

“시간에 맞게 도착했네요.”

진이 손목에 건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늦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테사, 다 왔어요. 이제 저 마차에만 올라타면 돼요.”

자넷은 땀이 흐르는 테사의 이마를 소매로 닦아주며 말했다. 테사는 발걸음 소리가 어느새 들려오지 않아 눈에 띄게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세 사람 앞에 대기 중이던 마차의 마부로 보이는 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자넷과 테사, 그리고 진을 찬찬히 살펴보며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고지받은 건 두 사람인데?”

“중간에 사정이 좀 생겼어요. 일단 출발부터 하죠.”

마차 뒤로 짐 가방을 실으며 덤덤하게 말한 진이 마부를 앞으로 이끌었다. 마부는 여전히 자넷과 테사를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보다 할 수 없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사이에 자넷은 마차 문을 열고 테사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푹신하고 안락한 마차 내부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테사는 마차의 안보다, 올라타는 자넷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테사가 말을 더듬거리며 자넷의 배를 가리켰다.

“자, 자넷……. 배, 배가…….”

임산부인 자넷의 배가 일반 여성처럼 홀쭉해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임신이 아니었던 것처럼. 급하게 오는 동안에는 미처 보지 못한 사실이었다.

테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넷과 그녀의 배를 계속 번갈아 쳐다봤다. 자넷이 머쓱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이렇게 밝힐 생각은 없었는데…….”

“…….”

“할 수 없죠. 사실 저 임신 안 했어요. 눈속임이었어요.”

“네……?”

“음,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요. 그건 나중에 말해 줄게요.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니까. 그보다 테사가 먼저 저한테 말할 게 있지 않나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 자넷이 테사의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여상하게 물었다. 그 까닭에 테사는 자넷의 홀쭉해진 배를 잠시 잊고서 자신을 납치했던 사람들과 마니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지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급했다. 테사가 도망쳐 나온 그곳에는 아직 마니가 잡혀 있었고, 그녀의 구출이 우선이었다.

“도움이 필요해요!”

“도움이요? 무슨 도움이요? 천천히 말해 봐요, 테사.”

흥분하기 시작하는 테사를 차분하게 달래며 자넷이 천천히 물었다. 테사는 최대한 진정하려 애를 쓰며 마저 입을 열었다.

“누가…… 저를 납치했어요. 마니가 저를 도망치게 하려고 그곳에 혼자 남았어요……. 마니가…… 위험해요!”

“잠깐만요, 납치를 당했다구요?”

그게 무슨……. 자넷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테사가 납치를 당했다고? 헤르트 샤인이 떡하고 버티고 있는 그 성에서? 어떤 간 큰 놈들이 그런 짓을? 그보다 성의 경비가 그렇게 허술하다니?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떠올랐다.

자넷과 진이 별관을 빠져나온 것과는 별개로 테사가 있는 성의 경비는 삼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 영주가 테사에게 내어준 호위기사만 해도 대외적으로 두 명이었고, 암암리에 그녀를 지켜주는 이들은 더 많았다.

달리 말하자면 성의 모두가 테사의 안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헤르트가 그걸 원했으니까.

그런데 그 성에서 테사가 납치를 당했다고?

자넷은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의 창가를 한 번 살피고서는 커튼을 쳤다. 그리고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선 테사를 향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직감이 계획과 다르게 일이 흘러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테사, 이제부터 제 물음에 똑바로 답해 줘야 해요. 알았죠?”

“네? 네.”

“어떻게 납치를 당했는지 기억나요? 그 부분에 대해서 나한테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요?”

“그게……. 마니가 갑자기 헬, 아니, 영주님께서 다쳤다고 저를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비밀통로를 지났어요. 그리고는 모르겠어요. 그 후에 갑자기…… 정신을 잃었거든요.”

테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자넷이 잠시 손을 들었다. 잠깐, 잠시만요. 그녀는 아까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낯으로 테사를 마주 봤다. 테사의 말에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지금 마니가 테사를 밖으로 유인했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아……. 그게, 마니는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 협박을 받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넷, 마니는 저를 해치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녀도 다 사정이―”

“그거야 마니의 입장이구요. 테사, 중요한 건 마니가 테사가 납치당하는 데 일조했다는 거예요.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구요. 근데 아까 전에는 마니가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그건 마니가 저를 도망치게 하려고―”

그 때 움직이던 마차가 흥분한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돌연히 정차했다. 그 반동에 자넷과 테사가 몸의 중심을 잃으면서 하마터면 서로에게 부딪힐 뻔했다.

자넷이 앞으로 쏠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뭐야? 그녀가 마부석을 향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던 차였다.

억! 하고 밖에서 진과 마부의 비명 소리와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장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바깥에는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악!”

“자, 자넷!”

“테사!”

기사들이 자넷을 거칠게 밖으로 끌어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테사는 제 앞에서 사라지는 자넷을 보며 덜컥 겁이 났다. 뭐지? 이번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왜 기사들이 그녀를…….

그 순간 문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테사가 벌벌 떨며 고개를 들자 그 앞에는 다름 아닌 헤르트가 서 있었다.

“……헬?”

테사는 헤르트를 보자마자 반색했다. 그가 이곳에 왔으니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될 터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헤르트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헤르―”

“내가 우습지.”

차갑고 날 서린 사나운 음성이었다. 테사는 저도 모르게 헤르트에게 뻗으려고 했던 손을 주춤거리며 내려놓았다. 그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는데 빛을 등지고 선 터라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헤, 헬……. 갑자기 무, 무슨 얘기를―”

“그러니까 이렇게 날 버리고 도망을 가지.”

그 순간 사내의 커다란 손이 테사 앞으로 불쑥 나타나 그녀의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그제야 테사는 헤르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날 갖고 노니까 재밌어?”

사내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매서운 눈초리 아래, 푸른 눈동자 속에 살기 어린 충동이 꿈틀대고 있었다.

테사는 쩡 하고 얼어붙었다. 그녀는 저 얼굴의 헤르트를 잘 알았다. 그들이 다시 만났던 첫날의 헤르트와 똑같았다. 그는 테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어하면서.

숨이 막힌다. 테사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저를 찍어 누를 듯 내려다보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무서워. 테사는 덜덜 떨며 그를 올려다봤다.

머지않아 꾹꾹 억눌러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했잖아.”

“…….”

“배신하지 않기로, 두 번 다신 날 버리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턱을 움켜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아팠다. 테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사내의 거친 손아귀 힘에 제대로 입을 벌리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 뒤통수를 쳐?”

“잠, 잠깐…….”

“널 믿는 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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