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화
어떤 정신으로 성까지 돌아왔는지 기억이 좀체 나지 않았다. 헤르트는 가장 먼저 테사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가 숱하게 드나들었던 그 방은 주인을 잃고 텅 비어 있었다. 늘 그를 맞이했던 작은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정말 없다.
테사가 보이지 않는다.
숨이 막힌다.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거칠어지는 제 호흡만이 적나라하게 이 조용한 적막을 깨트리고 있었다. 헤르트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갈무리한 채 종이가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는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
침잠한 푸른 눈이 기민하게 책상을 살폈다. 이곳으로 걸어오면서 짤막하게 보고받은 바, 테사는 오늘 종일 방 안에서 글을 썼다고 들었다. 그래서 별다른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헤르트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텅 빈 종이들을 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찰락거리며 종이들이 바닥으로 쏟아지고 잉크로 반쯤 물든 종이 한 장이 책상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헤르트는 굳어진 손길로 그것을 조심히 주워 들었다. 종이에는 무언가 적혀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쓰인 편지 같았다. 다만 잉크로 인해 가려진 부분들도 꽤 있었지만…… 완전히 읽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읽을 수 있는 부분만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고마워요
이 은혜를 잊을 수 없을……
……
비록 우리는 이별……
……
……
그리울 거야
미안……
……
부족하지만……
……
……
……
잘 지내길 바라>
편지로 보이는 글을 읽어 내려갈수록 헤르트의 표정도 점차 굳어져 갔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음과 동시에 피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는 이 종이에 적힌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안녕>
마지막으로 적힌 단어를 보고 나서는 저도 모르게 종이를 구겨트렸다. 종이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헤르트는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으며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어찌나 힘주어 짓이겼는지 비릿한 피가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네가 그리울 테사가>
이윽고 그는 종이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이게 말이 돼? 종이가 카페트 위를 구르며 멀어져 갔다. 그는 두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흥분으로 인하여 덜덜 떨렸다. 뒤죽박죽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심장을 옥죄어 왔다. 말도 안 된다. 이건 현실이 아닌 게 분명하다.
테사가 사라지다니.
아니, 그녀가 도망쳤다니?
불현듯 분노가 치솟았다. 헤르트는 쏟아지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책상 위의 모든 물건들을 바닥으로 쓸어내리자 와장창 하고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은색 잉크가 피처럼 카펫 위로 쏟아졌다.
한때 그녀의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던 방 안이 한순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시발, 장난해?
거친 숨을 잔뜩 토해 내며 헤르트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제껏 아니라고, 자신이 착각한 게 분명하다고 애써 그녀를 믿어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테사는 또다시 그를 배신했다.
좋아한다 고백하는 그를 두고 그녀는 도망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어째서? 무엇이 부족해서?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헤르트는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늘 낮까지 테사와 나눴던 대화들이 생생했다. 그래서 더욱,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테사의 목소리가 그의 심장을 후벼 파는 기분이었다.
‘무사히…… 돌아와야 해.’
나보고 돌아오라고 했잖아. 말하고 싶은 게 있다고, 그랬잖아. 근데 왜 너는 여기에 없는 건데.
“이렇게 날 버릴 생각이었어?”
입에서 헛웃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설마 모두 거짓말이었어? 그 표정, 울음 모두 연기였냐고. 헤르트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테사에게 배신당한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닐 거라 믿고 싶어 하는 제 자신이 머저리 같았다.
헤르트는 미친 자처럼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순 병신 아냐.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똑같았다.
테사는 왜 나를 버리고 도망을 선택했을까.
헤르트는 테사에게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고 생각했다. 호구라는 소리를 들어도 좋으니 7년 전의 일까지 모두 잊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이제부터 새로 시작하면 된다고, 제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테사는 나를 또 한 번 더 버리기로 마음먹은 거지?
“빌어먹을…….”
처음 배신당했던 그날과 똑같았다. 그때도 이런 식이었다.
자신만 아무것도 몰랐다. 테사가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 왜 자신이 그녀와 헤어져야 했는지. 저 혼자서 아무리 생각하고 결론을 내보려고 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당연했다. 답을 가지고 있는 테사는 사라졌고 헤르트 혼자만 남겨졌으니까.
이번에도 그랬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가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 왜 도망을 선택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을 터였다. 답을 가진 테사는 이 자리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날과 오늘,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헤르트는 자리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방 밖에서 대기 중이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 때 모젠이 헤르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경.”
“벨로뎀 부인은 찾았나?”
“예, 아직 성벽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헤르트는 콱 조인 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당겼다.
그날과 오늘, 다른 점이 있다면 헤르트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이 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헤르트는 예전처럼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버리기로 했다.
제 마음조차 그녀를 붙잡아 둘 수 없다면, 무력이라도 이용하는 수밖에. 어차피 지난 7년간 진창에서 구를 대로 굴러 사람이길 포기한 인생이었다. 여기서 사람인 척한다고 개가 사람이 될 리가 있나. 이제껏 본성을 숨기고 멀쩡한 인간인 척 해왔던 거지.
이제 와보니 보르웬 후작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개새끼일 때만 비로소 그 쓸모가 드러났다.
‘다시는 날 배신할 수 없게…… 나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조금만 망가트리는 건 괜찮지 않을까.’
마음이 어렵다면 몸뚱이라도 완전히 가지고 싶었다.
“안내해.”
***
테사는 깨어나자마자 제 손과 발이 결박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밧줄로 묶인 손발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얼굴 위로 천이 덮여 있어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제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손발이 덜덜 떨렸고 두려움이 마음 깊은 곳까지 음습해 왔다.
‘무서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페르데일에게 끌려가 맞을 때처럼 테사는 겁에 질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손발이 묶여 있어 더욱 그랬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력감이 몸을 덮쳐 오면서 울음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때, 누군가가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을 확 들춰내었다.
“……마니?”
테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마니였다. 테사는 왜인지 모르게 그녀를 보자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부인. 근데 잠시…… 잠시만 조용히 하고 계세요.”
마니가 날카로운 면도칼로 테사의 손발을 묶은 밧줄을 조금씩 끊어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테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따금 흔들리는 느낌이 난다 싶었는데 얼추 보기로 짐마차 안인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테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하며 마니를 쳐다봤다. 아직도 마니가 저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 성에서 그녀에게 유일하게 먼저 손을 내밀고, 도와주었던 마니였다. 페르데일에게 폭행당하고 끙끙 앓는 자신에게 홀로 다가와 약을 주기도 했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워 있을 때 몰래 음식을 가져다주기도 했었다.
그래서 테사는 마니가 제게 이런 일을 벌였다 하더라도 그녀를 마냥 미워할 수 없었다. 으슥한 곳으로 이끌었을 때도 의심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가 없이 저를 도와준 마니를 은연히 믿고 따랐으니까.
“대체 왜…… 저를…….”
“죄, 죄송해요, 부인. 정말로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들이 제 가족을 걸고 협박했어요. 저도, 방법이 없었어요.”
마니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테사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가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금방 풀어드릴게요. 사실 저도…… 그들이 부인께 이럴 줄은 몰랐, 몰랐어요. 그냥 확인만 한다고 했는데……. 분명, 확인만 하면 된다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도, 맹세코…… 부인을 위험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들이 부인이 자신들이 찾는 사람이 맞는지, 화, 확인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부인을 데리고 온 건데……. 정말 죄송해요. 다 제 탓이에요.”
“마니…….”
얼마 후 마니가 테사의 밧줄을 모두 끊어냈다. 오랫동안 묶여 있어서인지 손목과 발목에는 밧줄 결을 따라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손발이 뻐근한 것 같기도 했다.
“제가 망을 볼게요. 그사이에 부인께서는 얼른 도망치세요.”
“그, 그럼 마니는요?”
“저 때문이잖아요. 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으니까……. 부인이라도 얼른 도망가서 도움을 청하세요.”
“안 돼요, 마니도 같이 가요……!”
테사의 낮은 외침에 마니가 단호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마차를 덮은 천을 살짝 들추어 바깥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둘 다 도망칠 수는 없어요. 누군가는 여기에 남아서 그 사람들을 유인해야 하구요. 그러니 부인께서 도망가셔야 해요.”
“……마니.”
“정말 죄송해요.”
마니는 테사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테사는 그러지 말라며 그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마니는 꿋꿋했다.
“부인께서 얼마나 착하신지 저는 잘 알아요……. 그래서 부인을 제가 이용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부인을 도와드리는 건 당연해요.”
“마, 마니도 제게 잘해줬잖아요……!”
“……시간이 없어요, 얼른 도망가세요.”
마니는 테사를 짐마차 밖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숲으로 테사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세요, 얼른! 테사는 할 수 없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곳을 빠져나가 사람들을 만나면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아릿한 손발의 통증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앞으로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작은 빛이 보였다. 테사는 있는 힘껏 그곳을 향해 달려가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세상에, 테사?”
그곳에는 로브를 머리까지 쓰고 있는 자넷과 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