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이러니까 꼭 내가 죄지어서 튀는 것 같잖아.”
옷가지들을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으며 자넷이 툴툴거렸다. 옆에서 손을 보태고 있던 진이 벌써부터 꽉 차버린 그녀의 가방 상태를 지적했다.
“그거 다 못 들고 가요. 최소한의 짐만 챙기세요.”
“왜 내가 예정한 날을 앞두고 이렇게 갑자기 급하게 나가야 해?”
“급하게 왔으니, 급하게 가는 것뿐이죠. 어차피 여길 떠나야 하긴 했잖아요.”
자넷이 가방에 넣은 옷가지들을 모두 뺏어 다시 걸어놓으며 진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거 내가 아끼는 옷들인데! 뒤늦게 자넷이 손을 뻗었지만 진은 냉큼 행거를 끌고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였다. 자넷은 입을 비죽이며 정말 최소한의 짐만 남은 제 가방을 쳐다봤다. 누가 봐도 야반도주하기 딱 좋은 양이었다.
“정말이지, 다들 나한테 말해 주는 건 하나도 없다니까.”
내 팔자가 뭔 팔자인지. 자넷을 가방을 닫으며 팔짱을 꼈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며칠 뒤로 세운 계획을 오늘 당장 실행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건지…….’
자넷은 창가로 다가가 슬쩍 문을 열고 그 밑을 쳐다봤다. 함께 지내던 부인들이 다 떠나고 그녀 홀로 남은 별관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을 자넷은 믿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감시하는 이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비록 방 안까지는 들어오지는 못하더라도 이곳을 나가면 그녀에게 득달같이 달라붙을 터였다.
‘음, 이렇게 빨리 눈치챌 줄은 몰랐는데. 역시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남자야. 물론 테사한테는 다행이기는 하지만…….’
뭔가 불안해.
자넷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내 창문을 힘주어 잡아당겨 닫았다. 마침 옷 정리가 끝난 진이 드레스룸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보다, 몰래 나갈 수 있기는 한 거야?”
투덜거리듯 자넷이 묻자 진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소후작도 빼냈는데요, 뭘.”
“그때는 제프리의 도움이 있었잖아. 지금은 제프리도 없는데.”
“제프리 경은 부수적인 옵션이고요. 걱정 마세요, 이미 손을 써놨어요. 후작부인께서 무슨 일을 하시려는 건지는 몰라도…… 허락은 떨어졌으니까요.”
“나중에 샤인 경이 알면 뒤집어지겠는걸.”
모두가 한통속이라는 걸 알면 그의 표정은 어떻게 변할까.
보르웬 후작은 2년 전부터 유테르트 후작가를 두고 대대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그 계획 중 한 축이 자넷이었고, 범위를 넓게 보면 후작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의 사용인들조차도 3할 정도는 보르웬 후작이 심어놓은 사람들이었다.
어찌 보면 유테르트의 후작가의 운명은 2년 전 그날, 모두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의 우리는 그저 각하의 장기 말에 불과한 거지.’
새 영주가 된 헤르트가 이곳으로 끌고 온 병력의 대부분은 보르웬 후작가의 사병들이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해서 자넷의 도주를 도와줄 이들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헤르트의 명보다 보르웬 후작의 명이 우선이니까.
물론 헤르트의 개인 사병도 있다고는 들었다. 전쟁에서 한 명 두 명 주워 모아다가 만들었다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후작의 아래에 있던 자들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이는 그가 아직 보르웬 후작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즉, 헤르트 샤인도 어디까지나 보르웬 후작의 장기 말인 것이다.
‘근데 왜 숨겨야 하는 거야?’
자넷은 보르웬 후작의 명대로 2년 전 이곳에 들어왔지만, 사실 그녀의 명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부러 여기에 들어와 있었다는 걸 왜 그에게 숨겨야 할까. 테사를 도와준 게 결국 후작이라는 것을 알면 그자도 분명 고마워할 텐데.
‘뭐 나야, 그분의 큰 그림을 알 리가 있나.’
종래에 자넷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의자에 앉았다. 어찌 되었든 이 조용한 후작가는 몇 시간 후면 난리가 날 것이다. 자신이 소리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 자넷은 기지개를 켜며 진에게 말했다.
“진, 마지막으로 티타임을 즐기고 싶은데, 레몬타르트 좀 가져올래?”
“네.”
방 너머로 사라지는 진을 보며 자넷은 탁자에 턱을 괴듯 엎드렸다. 지난 2년간 동고동락했던 이 후작가의 사람들과도 정말로 안녕이었다.
‘테사에게는 미안하네. 작별인사도 못 하고…….’
그래도 별일이야 있겠어? 그녀를 물고 빨다 못해 아예 업고 다닐 기세인 남자가 곁에 있는데. 자넷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두 눈을 감았다.
***
“다 울었어?”
테사는 퉁퉁 부은 눈을 차마 헤르트에게 보여줄 수가 없어 고개를 수그렸다. 보지 않아도 붕어눈이 되어 있을 터였다. 그러나 헤르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끈질기게 테사의 얼굴을 살폈다. 결국 눈이 부은 것을 제외하면 테사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들어가면 얼음부터 준비하라 할게. 조금만 대고 있으면 금방 붓기가 빠질 거야.”
“……응.”
“그럼 이만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테사의 손에 깍지를 낀 헤르트가 그녀를 천천히 성안으로 이끌었다.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식당으로 향하려던 차였다. 한 기사가 헤르트를 찾아 다급하게 다가왔다. 숨을 헐떡이는 것으로 보아 예사 사안이 아닌 듯했다.
“정찰조의 긴급 보고입니다.”
기사의 말에 헤르트는 제 옆에 있는 테사를 살펴봤다. 자신과 기사를 번갈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헤르트는 할 수 없이 잡았던 그녀의 손을 잠시 놓았다.
“테사, 잠깐만 여기 있어. 금방 끝나.”
테사에게서 멀어지고 나서야 헤르트는 기사에게 말하라는 의미로 턱을 까닥여 보였다.
기사의 말이 끝날 쯤 헤르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다시 한번 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테사를 살펴보았다.
“준비하고 있어. 금방 따라갈 테니.”
기사를 먼저 보낸 헤르트는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테사에게 다가가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점심은 나 신경 쓰지 말고 너 혼자 먹고 있어.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무슨…….”
“별일 아니야. 금방 해결하고 올게.”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헤르트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그의 찌푸려진 미간이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테사는 갑자기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헤르트의 옷자락을 잡았다.
“헤르트…….”
“걱정하지 마. 별일 아니라고 했잖아.”
조용히 떨리는 테사의 손을 발견한 헤르트가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웬만하면 오늘은 방 안에만 있어. 성밖으로는 일절 나가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알았어?”
“……응.”
저 멀리 자신의 외투를 가져오는 기사를 보며 헤르트가 움직이려던 차였다. 테사는 잡았던 헤르트의 옷자락을 여전히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헤르트가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
“왜 그래?”
“그게……. 무사히…… 돌아와야 해.”
기어가는 듯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똑똑히 들은 헤르트가 비식 웃음을 흘렸다.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저 작은 머리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웃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맨입으로?”
“……어?”
“장난이야.”
그러니까 긴장 풀어. 헤르트가 테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 이에 테사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도 좀처럼 붙잡은 그의 옷자락을 놔주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가 제게 다른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헤르트는, 지척에 다다른 기사에게 잠시 발걸음을 멈추라 손짓하며 테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번에는 왜.”
“……저기, 오늘…… 돌아오면…….”
“돌아오면?”
“너한테…… 말하고 싶은 게…….”
이미 헤르트는 모두 다 알고 있겠지만, 테사는 직접 제 입으로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그가 보여준 진심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7년 전의 일은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했고 자신은 아직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떠올리는 것조차 손이 덜덜 떨릴 만큼 두려웠다.
하지만 테사는 헤르트를 위해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했던 것처럼 제 마음도 고백하고 싶었다.
나도 너를 아직도 좋아하고 있노라고.
하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벌써부터 입술이 제대로 열리지 않았고 목소리는 목구멍 안으로만 맴돌았다.
그런 테사에게 헤르트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테사.”
“나, 나는…….”
“힘들면 억지로 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래도…….”
“기다릴 거야. 기다릴 수 있어. 그러니까 조급해 하지 마. 이렇게 하나 둘……. 천천히 가자. 그러면 언젠간 밤새도록 얘기를 나눴던 그때처럼 돌아갈 수 있겠지. 안 그래?”
헤르트의 말에 테사는 할 수 없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봐.”
헤르트는 기사에게 테사를 안으로 데려가라 한 뒤, 자신은 외투를 입고 밖으로 향했다. 그녀는 사라지는 헤르트의 뒷모습을 보며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의 말이 맞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말자. 천천히 가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이라도 털어놓기로 마음먹은 것은 잘한 일이지 않은가. 그것만이라도 정말 크게 발전한 것이다. 처음에는 아예 말할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용기를 내다 보면 헤르트가 말한 대로 언젠가는, 예전처럼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좋아해, 테사.’
테사는 헤르트의 음성을 떠올리자 다시금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행복이란 것이 아직 제 곁을 완전히 떠나가지 않았음을 느꼈다.
무엇보다 버려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