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68화 (68/138)

068화

그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던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역겹게 느껴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테사는 헤르트를 놓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내가…… 너한테…… 이래도 되는지, 자꾸 욕심이 나……. 너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

“사실은, 자, 잘 모르겠어…….”

앞날이 창창한 헤르트에게 늙은 후작의 후처였던 테사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를 곤란하게 만들 터였다. 따라서, 정말로 헤르트를 생각한다면 여기서 멈추는 게 옳았다.

멍청한 여자는 불행만 가져오니까. 이미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테니까.

“나는 너한테…… 방해만…… 될 텐데도……. 욕심, 내고 싶어……. 내가, 그래도…… 되는 거야……?”

지금 당장의 욕심을 위해 네 옆에 있어도 되는 걸까? 지금 이 선택이 7년 전의 선택처럼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지는 않을까? 떠듬떠듬 말하면서도 테사는 몸을 떨었다. 욕심을 부리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헤르트가 다시 불행해질까 봐 끝없이 몸이 움츠러들기만 했다.

끝내 눈물이 시야를 가려 앞이 어물어물 흐려졌다. 자신 때문에 검투사노예로 끌려갔을 헤르트를 생각하니 가슴에서 울음이 북받쳐 올랐다. 그가 어떻게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을지를 생각하면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제 욕심 하나로 그를 다시 불행하게 만들라고?

‘역시 안 되겠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이기적으로 굴어서 멀쩡한 사람 인생 망치지 말고, 스스로 고꾸라지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내면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욕심부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아, 아냐, 그냥 못 들은 걸로…….”

테사가 잡은 헤르트의 손을 놓고 얼굴을 푹 숙이려는 순간이었다. 헤르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다급하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밀려드는 혀의 감촉에 테사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사내의 커다란 손이 테사가 뒤로 도망치지 못하게 뒷목을 꽉 붙잡았다.

“아, 흡…….”

어느새 테사는 조용히 두 눈을 감은 채 헤르트의 옷깃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뜨거운 호흡을 주고받으며 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온통 사내의 숨결로 가득 차는 듯했다. 테사는 치열을 고르게 쓸고 옭아매는 혀를 따라 움직이며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그 뒤로도 입맞춤은 한참을 이어졌다.

“하…….”

헤르트는 제 침으로 번들거리는 테사의 입술을 확인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닦아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였다.

“제발…… 욕심 좀 내.”

“……헤르―”

“나는 뭐, 성인군자라서 이러는 줄 알아?”

낮게 한숨을 토해 낸 헤르트가 테사의 이마 위로 제 이마를 갖다 대며 거칠게 말을 이어갔다.

“처음부터 난 너 하나뿐이었어. 너 하나만 생각하고 여기까지 온 거라고……. 네 존재 자체가 나에게는 욕심이야. 그래서 이 짓 하고 있는 거고.”

“…….”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욕심 좀 부려봐. 테사.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너라면…… 내 모든 걸 줄 수 있어.”

배신한 이유를 듣기 위해 이 자리까지 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님을 일찌감치 알았다. 왜 배신했는지 알고 싶었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저 다시 한번 테사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제 두 눈으로 살아 있는 테사를 직접 보고 싶었다. 자신이 힘들 때마다 환하게 웃어주던 그 얼굴도 보고 싶었다.

‘헬!’

……사랑스러운 소녀.

늘 제게만큼은 진심으로 솔직함을 드러내고 애정을 나누었던 존재. 작디작은 그의 세상 속 그녀는 유일한 빛이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길을 비춰주는 밝은 빛.

그런 존재를 헤르트는 사랑했다. 아니,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사는 이유조차 그 존재가 알려주었으니까.

‘내가 왜 살아 돌아왔는데……. 다 널 위해서였어.’

처음에는 제 앞에서만 무조건 입을 다물고 저를 외면하는 테사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잠시 분풀이를 했을 뿐이다. 억울해서, 자신만 그녀에게 안달이 난 것 같아서,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까닭에 조금이라도 그녀가 저와 같은 심정을 경험하기를 바라서 모나게 굴었던 것뿐이었다.

사실 날뛰는 제 감정을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7년간 닳고 바래진 감정은 삐꺽대며 자꾸만 널뛰었다. 제 감정조차 자각하지 못했던 어리석었던 그 당시의 애송이처럼.

“테사.”

헤르트는 두 손으로 테사의 얼굴을 가득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모든 걸 제 눈에 담겠다는 듯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들이 함께하지 못했던 7년 동안 소녀에서 여자가 된 테사는, 이따금씩 헤르트의 심장을 가슴 아플 정도로 떨리게 했다. 그래서 더욱 그녀에게 안달이 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다시 찾은 이 빛을 놓치기 싫어서.

오로지 제 품에만 가둬두고 싶어서.

“……왜 아직도 몰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헬…….”

“나는 널 원해. 예전에도, 지금도.”

테사의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빠르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녀의 가슴께를 살펴보며 헤르트가 마저 말했다.

“넌 늘 늦어. 내가 먼저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르지.”

“…….”

“좋아해, 테사.”

아직도, 너를 좋아해.

테사는 숨을 들이켰다. 그날의 소년이 바로 제 앞에 있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만큼이나 멍청한 남자가 이곳에 있었다.

***

부드러운 현악기 선율 소리가 묻힐 만큼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린다. 드넓은 홀 안,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로 수십 개의 탁자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페르데일은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을 쓰고, 소파에 반쯤 기대어 누워 있었다. 그런 그의 한 손에는 샴페인이 든 잔이, 다른 손에는 카드가 들려져 있었다. 그는 현재 게임에 흠뻑 빠져든 상태였다.

“올인!”

패를 확인한 페르데일이 제 앞에 있는 칩을 모조리 앞으로 밀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이 큰 호응을 하며 박수를 쳤다. 같은 판에 있던 다른 참여자들은 자신의 패를 확인하고는 죽거나, 페르데일처럼 올인을 선택했다.

“으하하, 또 내가 이겼네!”

얼마 안 가 패가 공개되고, 페르데일은 또다시 승리를 거머쥐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재차 터지고 판에 걸린 모든 칩이 제 것이 되자 페르데일은 사람들에게 일부 칩을 뿌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환호하며 떨어지는 칩을 줍기 바빴다. 칩을 잃은 참여자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자리를 박차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소후작님.”

신나게 칩을 뿌리며 옆의 여자에게 추근대던 페르데일의 곁으로 직원이 조용히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페르데일은 곧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났다.

“아, 막 재미있어지려는 차에…….”

“죄송합니다.”

“됐어, 앞장이나 서.”

직원을 따라 홀에서 빠져나온 페르데일은 한적한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끝에는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 앞에 선 직원이 초상화의 일정 부분을 건드리자 벽이 열리며,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페르데일은 능숙하게 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직원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이 건물에는 대체 비밀통로가 몇 개나 있는 거야.’

통로와 이어진 공간으로 나온 페르데일은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직원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이곳의 보안은 생각 외로 치밀하고 촘촘했다. 손님으로 와서 동업자가 된 페르데일에게도 쉽사리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고 감추고 있었다.

‘일단은 좋다구나 받아들이긴 했는데…… 갈수록 뒤가 찝찝하단 말이지.’

린데할 영지에서 붉은 수염을 찾아 이 건물의 주인을 만난 뒤로 페르데일은 나름 즐겁고 편안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도박도 매일같이 무한히 제공되는 칩을 이용해 마음껏 즐길 수 있었고, 후작가에서 지내던 것처럼 잠자리부터 식사까지 완벽했다. 덕분에 이곳에 온 며칠 동안은 천국에 온 줄 알았던 페르데일이었다.

하지만 20년간 도박장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페르데일이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그는 이 안락하고 즐거운 일상에 서서히 동화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해지고 있었다.

물론 이 건물의 주인에게는 계약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 그러나…….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든단 말야?’

직원을 따라 이동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곰곰이 생각했지만 여전히 마땅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이윽고 페르데일은 한 방 앞에 섰다.

“오늘은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예, 이만 들어가 보시지요.”

직원이 페르데일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페르데일이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일전에 몇 번 보아 익숙한 방 안에 건물 주인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페르데일처럼 온 얼굴을 덮은 가면을 쓴 한 남자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소후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 흠흠, 이번에는 무슨 일로…….”

“그보다 먼저 소개드릴 분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겠습니까?”

주인의 안내에 페르데일이 자리에 앉자, 맞은편의 남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소후작님의 일을 도와주실 분입니다.”

“아? 그런가. 그렇다면 잘 부탁하네.”

페르데일이 반색하며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남자는 그의 손을 슥 보기만 할 뿐 잡지 않았다. 때문에 페르데일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이 자식은 또 뭐야? 바로 앞에서 사람을 무시해?

페르데일은 헛웃음을 들이키며 주인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헛, 뭐야. 설마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인가?’

방금 전까지 불만스러웠던 페르데일의 얼굴이 조금씩 갈무리되면서, 그는 저도 모르게 삐딱하게 앉았던 자세를 바로 했다. 하긴 그러고 보니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잠깐, 무슨 얘기?”

주인의 말에 페르데일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재차 쳐다봤다. 주인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것처럼 쾌활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야, 유테르트 영지의 탈환 아니겠습니까? 영지전엔 영지전이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