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66화 (66/138)

066화

말도 제대로 못 꺼내는 주제에 욕심을 내고 있다니. 하지만 헤르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염치없게도 그와 다시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싶었다. 그래, 인정해야만 했다. 테사는 여전히 헤르트가 필요했다. 헛된 욕망이라는 것을 알지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테사는 내뱉지 못한 의문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뜨겁고 단단한 사내의 품이 느껴진다. 테사는 조용히 그곳을 파고들었다. 그냥 이 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그와 함께였으면.

***

밤이 되자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나는 창가 근처에 서서 앙상한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이전보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으나 일반적인 사람의 다리와 비교하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그녀는 걷는 것을 포기하고 휠체어에 털썩 주저앉았다. 확실히 다리를 오래 쓰면 쓸수록 몸에 무리가 왔다.

그 때 문을 열고 하녀가 들어왔다. 다과상을 차려 온 하녀는 찻잔에 차를 따라 엘레나에게 건네주었다. 엘레나는 조금 흐트러진 하녀의 소맷자락을 보며 말문을 뗐다.

“잘 해결했니?”

“네, 어느 정도는요.”

엘레나는 창밖의 달을 쳐다봤다. 둥근 달이 그녀를 축하하려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쥐새끼들이 많은 걸 좋아해야 한다니, 이상한 일이지 않니.”

“살다 보면 이상한 일은 언제든지 일어나요.”

“그래, 그렇긴 해. 뭐, 어쨌든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 것 같으니 나야 좋지.”

적당히 씁쓰름한 차를 음미하며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애에게는 미안하네.”

“……목표만 생각하세요. 고지가 코앞이시잖아요.”

“알아.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려고.”

엘레나는 재차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다리가 이렇게 된 것처럼 다른 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잔혹하고 불평등했다. 자신이 먼저 뺏지 않으면 빼앗기고 밟힌다.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힘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힘없는 자가 백날 외쳐 봐도 돌아오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메아리 하나뿐이니까.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영주의 부사관이 그런 식으로 자리를 비우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덕분에 그와 신뢰를 쌓기엔 지금이 제격일 터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작은 손해를 보게 되겠지만 말이다.

엘레나는 밝은 달빛을 즐겼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

그날 저녁 작은 소동을 일으킨 테사는 급한 부름을 받고 달려온 케니스에게 이른 진찰을 받아야만 했다. 테사는 몸이 아픈 것이 아니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헤르트는 완강했다. 결국 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진단이 내려지고서야 헤르트의 사납게 올라갔던 눈꼬리가 조금은 내려갔다.

하지만 테사를 향한 헤르트의 걱정은 오늘 아침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그는 테사를 어린아이 다루듯 하며 무수히 많은 경고와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프면 바로 의사를 불러라.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움직여라. 절대 끼니는 빼먹지 마라. 목에 아직 무리가 갈 수 있으니 차를 자주 마셔라. 이상한 일이 있으면 바로 호위기사에게 말해라.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자신을 부르거나 찾아와도 된다고 강조하고 나서야 일을 처리하러 자리를 떴다. 누가 보았다면 몸이 약한 아내에게 유별나게 구는 남편이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그렇게 겨우 헤르트를 보낸 테사는 후작부인에게 갈 채비를 하다가 마니에게서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후작부인께서요……?”

“네, 감기 기운이 있다고 오늘은 오지 않으시는 게 좋다고 하시네요.”

마니의 말에 테사는 챙겨 들었던 종이와 깃펜을 내려놓았다.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조금 빠지고 말았다. 후작부인에게 글을 배우는 시간은 그녀가 하루에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 중 하나였기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자넷이 성을 떠날 준비를 하느라 쉽게 만나지 못하는 지금 후작부인과의 소통은 꽤 간절했다.

‘산책을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이른데…….’

이윽고 테사는 책상 앞에 앉아서 깃펜을 손에 쥐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전에 엘레나가 말했던 것처럼 자넷을 위해 편지를 써보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첫 시작부터 막히고 말았다.

친애하는 자넷…….

애정하는 벨로뎀 부인…….

소중한 친구, 자넷 유테르트…….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는 거지? 연습이기는 하지만 편지를 처음 써보는 것이기에 첫 문장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테사는 한참을 끙끙대며 종이와 사투를 벌였다.

무엇보다 옆에서 봐주는 후작부인이 없다 보니 더더욱 자신이 맞게 잘 쓰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사전을 찾아가며 쓰고는 있지만 철자를 틀린 건 없는지, 문법은 맞는지 온통 신경 써야 할 것투성이였다.

결국 테사는 첫 문장을 완성하는 것을 잠시 미뤄두고 후작부인의 조언대로 새로이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새 종이를 꺼내 들며 펜을 들었다.

‘이럴수록 쉬운 것부터…….’

테사는 가장 먼저 자넷에게 고맙다는 말을 쓰기로 했다. 지난 2년간 자신을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녀는 펜에 잉크를 묻히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고마워요’라고 적어보았다. 비록 한 단어에 불과했지만 기분은 꼭 편지를 반 이상 쓴 기분이었다.

“당신에게…… 고마워요……. 이다음에는 음…….”

테사는 이다음으로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별이라는 단어를 활용해서 작별인사를 적어보기로 했다.

“당신과…… 이별하겠지만……. 아, 이상한 것 같은데…….”

썼던 문장 위로 길게 줄을 긋고 테사는 그 아래에 다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별하겠지만…… 저는 당신이…… 그리울…….”

작별의 문장을 쓰던 테사는 잠시 쓰던 글을 멈추었다. 문법이 이게 맞는지 갑자기 의심스러웠다. 이전에 더욱 자연스러운 표현을 후작부인이 가르쳐 줬던 것 같은데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았다.

테사는 다시 문장 위로 줄을 찍찍 긋고 새로이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줄 안 되는 편지를 쓰는데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때였다. 이마저도 마니가 옆에서 슬쩍 말해 주지 않았다면 헤르트가 오는지도 모르고 편지 쓰기에 매진할 뻔했다.

헤르트와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기 때문에 테사는 급히 책상 위를 정리했다. 편지를 쓰느라 잉크가 묻는지도 몰랐던 옷도 갈아입어야 했다. 헤르트가 오기 전까지 생각 외로 할 일이 많았다.

테사가 허둥지둥 움직이자 마니가 그녀를 부드럽게 달래며 다른 하녀들에게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돕기를 지시했다.

“부인, 쓰고 남은 종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테사가 편지를 연습하느라 잔뜩 낭비한 종이뭉치들을 들어 보이며 마니가 물었다. 테사는 가림막 너머로 향하며 조용히 말했다.

“……가능하면 태워주세요.”

“정말로 그렇게 해도 되겠어요? 태우면 아무것도 안 남을 텐데.”

“어차피 연습한 거라서…… 괜찮아요.”

“그럼 바로 태울게요.”

마니가 종이뭉치들을 벽난로로 가져가 그 안에 털어 넣고, 불을 붙였다. 그러자 화르륵 하고 순식간에 종이들이 불에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테사는 그 모습을 보자 괜한 안도감이 들었다. 엉망진창인 제 글씨와 내용을 웬만해선 남기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다 태웠어요. 그러니까 이제 안심하시고 옷 마저 갈아입으세요.”

제 쪽을 계속 힐끔힐끔 바라보는 테사를 향해 마니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테사가 가림막 안으로 쏙 모습을 감추었다.

“부인, 장신구는 그대로 하시겠어요?”

새 옷으로 거의 갈아입을 쯤에 하녀 하나가 아까와 똑같은 테사의 장신구를 살피며 물었다.

“아…….”

테사는 다른 하녀가 내미는 거울 속 자신을 힐끔거렸다. 장신구를 바꿔야 하나? 현재 그녀가 하고 있는 노란색 호박귀걸이는 헤르트가 드레스와 함께 손수 골라준 장신구였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지금 색이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럼 제가 어울리는 걸로 골라드려도 될까요?”

그 때 마니가 옆에서 끼어들며 묻자 테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니는 매일 아침 헤르트의 옆에서 테사의 옷을 고르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안목도 좋았다.

마니는 테사의 귀에서 조심히 호박귀걸이를 빼고서 보석함에서 완두콩만 한 크기의 진주귀걸이를 꺼내 왔다.

“지금 입으신 옷에는 이 진주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마니의 말대로 테사가 막 갈아입은 옷에는 호박귀걸이보다는 진주귀걸이가 더 잘 어울렸다. 그렇게 귀걸이까지 바꾸고 나자 테사의 옷차림에선 잉크의 흔적을 볼 수 없었다.

“뭐야, 옷 갈아입었네?”

그 때 뒤에서 문이 열리고 헤르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테사가 자신이 아침에 골라준 드레스가 아닌 다른 드레스를 입고 있자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아, 뭐가…… 묻은 것 같아서. 미안해.”

“미안할 것까지는 없고. 이 드레스도 잘 어울려.”

테사를 전체적으로 훑어보며 헤르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사실 그의 눈에는 테사가 무엇을 입어도 다 잘 어울리고 예뻐 보였다. 어울리는 드레스보다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를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였다.

그가 턱을 까닥이자 마니와 하녀들이 방 밖으로 물러났다.

“목은 괜찮아? 차는 좀 많이 마셨어?”

“……응, 괜찮아.”

“오늘 후작부인한테도 안 갔다며. 방 안에서 뭐 했어?”

“아, 그냥…… 이것저것…….”

헤르트가 방 안을 잠시 둘러보았으나, 그가 보기에는 딱히 할 게 없는 듯했다. 그 때 책상 위에 놓인 잉크병과 깃펜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후작부인에게 귀부인이 알아야 할 기본 소양에 대해 배운다고 했나? 그중에 글쓰기 관련 수업도 있는 듯했다.

제가 준 적이 없는 잉크병과 깃펜을 봐서는 후작부인이 테사에게 주었을 확률이 높았다. 헤르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식사하기 전에 잠시 산책이나 할까.”

헤르트는 테사의 손에 자연스럽게 깍지를 끼며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테사는 이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