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조니라는 여자가 말해 준 린데할 영지로 가기 전에 랑그는 정보가 주로 거래되고 있는 특정 지구부터 들렸다. 보르웬의 정보망을 이용할 수 없는 지금으로는 그곳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얼마 후 상당한 값을 치르고 나서야 세테비얀 남작가에 대한 정보를 모을 수 있었던 랑그는 의심하던 것을 확인하고 탁자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는 검지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수법이 교묘한데 익숙하다 싶었더니…….’
그동안 제 상관의 과거와 관련하여 정보를 통 얻을 수 없었던 것은 후작이 뒤에서 완벽하게 손을 써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랑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말아 쥐었다. 이러니까 작정하고 정보를 파도 안 나왔던 것이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이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처음부터 정보를 모으려 이곳저곳 다니며 뻘짓을 할 게 아니라 직접 후작을 찾아가 사실대로 정보를 달라고 했어야 했다.
물론 제 상관은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테고, 보르웬 후작이 순순히 모든 걸 말해 줄 가능성은 낮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손을 써두실 줄은 몰랐는데……. 고아 출신이 뭐라고……. 젠장, 각하. 이래서는 돌아가지도 못한다구요.’
복잡한 머릿속에 랑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양쪽에 끼인 제 신세가 서글퍼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아랫사람은 기라고 하면 기고 구르라고 하면 굴러야 하는 게 운명인 것을.
그는 서류를 다시 챙겨 가방 속에 집어넣고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세테비얀 남작가에 대한 정보 말고도 맡겨놓은 다른 정보가 슬슬 준비될 시간이었다.
건물이 밀집된 으슥한 길목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끝자리에 초록색 문이 보였다. 랑그는 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천천히 두 번, 빠르게 세 번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의 작은 틈이 끼이익 하고 열리더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때문에 오셨슈?”
“대가를 받으러 왔는데. 로 1034번.”
“기다리슈.”
이윽고 문틈으로 작은 서류 봉투가 튀어나왔다. 그것을 건네받은 랑그는 무척 가벼운 무게에 눈살을 찌푸렸다. 금화 하나 값인데 이정도밖에 안 된다고? 내가 모르는 새에 시세가 올랐나? 그가 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게 다인가?”
“받았으면 가슈. 나는 전달할 뿐이라 모르우.”
“잠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의 틈이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래서 바깥의 사설 정보통은……. 랑그는 볼멘소리를 내며 할 수없이 길목을 빠져나왔다.
말을 묶어둔 일반 건물로 돌아온 그는 서류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보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그가 의뢰했던 투기장과 린데할 영지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다만, 여러 장으로 꼼꼼하게 정보가 정리되어 있는 투기장 건과는 다르게 린데할 영지에 관한 정보는 가관이었다.
“이게 뭐야……?”
달랑 한 장. 그것도 그림이다. 붉은 수염이 그려진 종이를 보며 랑그가 허,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장난하자는 건가?
하지만 정말로 장난질을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고른 정보통은 이 일대에서 나름 정확한 정보를 파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장난이라면 돌아가서 철저히 후회하게 만들어주면 되는 일이고.’
그 자리에서 계속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일단 랑그는 종이를 갈무리하여 품에 집어넣은 뒤 말 위에 올라탔다. 당장은 린데할 영지와 붉은 수염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그저 이 일을 하루빨리 마무리 짓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 이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정말로 부인이 경을 배신한 거면…….’
“상심이 크시겠는 걸.”
랑그가 말고삐를 휘두르자 말이 투레질을 하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골목에 숨어 랑그를 줄곧 지켜보던 이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머물렀다.
***
방으로 돌아온 테사는 마니가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후작부인에게 글을 배우러 간 동안에는 보통 마니가 방에 남아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방으로 돌아오면 마니가 가장 먼저 테사를 반겨주곤 했다. 게다가 마니는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울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마니?”
혹시나 싶어 침실에 들어선 테사는 헤르트의 방인 영주의 침실과 연결된 문을 열고 나오는 마니를 볼 수 있었다. 마니는 조용히 문을 닫다가 테사를 발견하고는 퍼드득 놀란 얼굴을 했다. 마치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부, 부인, 언제 오셨어요?”
“방금…….”
“에구, 참. 제가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영주님 침실에 치울 게 몇 가지 있어서요. 그보다 산책 다녀오신 거죠?”
“……마니, 이마에 땀이 흥건해요.”
테사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마니의 이마를 보며 말했다. 늘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마니의 머리도 오늘따라 부스스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테사의 말에 마니가 급히 제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요즘 들어 조금만 움직이면 이렇게 땀이 막 난다니까요. 나이가 드니 어쩔 수 없나 봐요. 그보다 점심은 어떻게 준비할까요? 영주님께서…….”
“아……. 오늘은 같이, 못 먹는다고 했어요. 저도 오늘은 속이 영 별로라서 못……. 안 먹으려구요.”
점심을 걸렀다는 것을 헤르트가 알면 분명 잔소리를 할 게 뻔하지만, 테사는 오늘만큼은 정말로 입맛이 없었다. 입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조차 상상하기도 싫었다. 테사의 힘없는 목소리에 그제야 마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속이 안 좋으세요? 선생님을 불러올까요?”
“괜찮아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네,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럼 저는 옷 갈아입는 거 도와드릴게요. 일단 장신구부터 뺄까요?”
테사를 화장대 앞으로 데려간 마니는 가장 먼저 귀걸이와 목걸이를 뺐다. 그다음으로는 머리에 달린 핀을 뽑아 끈으로 느슨하게 하나로 묶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장미유를 머리끝에 살짝 발라 마무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테사는 그런 마니를 거울을 통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전 그녀가 보여준 모습이 괜히 눈에 밟혔다. 무슨 일이 있나? 그러고 보면 요즘 들어 마니가 자리를 비우는 일이 부쩍 많아진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정신을 딴 데 두기도 했고. 테사는 조심스럽게 마니를 불렀다.
“저어, 마니…….”
“네, 부인.”
“그게, 혹시…….”
“……왜 그러세요?”
“아, 아니에요. 그냥…… 마니가 벨로뎀 부인이라면 지금 무엇이 필요할지 궁금해서요…….”
결국 직접적으로 마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기를 포기한 테사가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도 마니는 테사의 말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 벨로뎀 부인이 떠나는 날이 곧 코앞이라고 하셨죠?”
“네……. 그래서 선물을 주고 싶은데 무슨 선물이 좋을지…… 몰라서요. 마니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요.”
“……글쎄요, 돈? 밖에 나가서 살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요.”
마니가 테사의 잔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지나가는 투로 대답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아차 하는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에구머니나, 죄송해요. 돈은 선물로 좀 그렇죠…….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방금 소리는 잊어주세요.”
“아, 아니에요……. 마니의 말대로 돈도…… 괜찮을 것 같아요.”
테사가 생각하기에도 자넷에게는 돈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일단 그녀는 홀몸도 아닌데다가 이제 밖에서 살아야 하는 입장이지 않은가. 적당하고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앞으로 세상에 나올 아이와 오순도순 함께 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돈이 필요할 터였다.
따라서, 마니의 말대로 돈이 그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테사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것, 걸치고 있는 것, 먹고 있는 것 모두 헤르트가 알아서 준비해 준 것이었다. 사실상 테사는 돈을 굳이 현물로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근데 제가 돈이 없어서…….”
“그, 그렇긴 하네요.”
“……돈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네?”
“단기간에…….”
터무니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테사는 혹시 모르는 마음으로 마니에게 물었다. 그만큼 자넷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지금까지 되돌려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했으니, 그녀가 떠나갈 때만큼은 자신이 도움을 주고 싶은 까닭이었다.
“으음……. 영주님께 말씀을 드려보는 건 어떠세요?”
“그건…….”
테사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헤르트에게 돈을 달라고 하자고? 물론 테사의 주변에서 확실하게 돈이 나올 데는 헤르트가 유일했다. 그는 이곳의 새 영주였으니까. 몇 푼 정도는 흔쾌히 내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사는 차마 그에게 돈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이미 많은 것을 그에게 받고 있는데 거기에 돈까지 달라고? 염치가 없어도 심하게 없다. 모두가 테사를 비난할지도 몰랐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다 해주는데 돈까지 뜯어낸다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건 정말로 못 할 짓이었다. 게다가 헤르트도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테사의 얼굴이 굳는 것을 확인한 마니가 급히 입을 열어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돈을 그냥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벨로뎀 부인을 조금 도와주면 안 되겠냐는 뜻으로…….”
“아…….”
“역시 아니에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벨로뎀 부인도 돈까지는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저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걸요.”
“…….”
그 때 테사의 눈에 마니의 손에 들린 제 장신구가 보였다. 하나같이 값비싼 것이었다. 제 목과 귀에 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테사는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장신구를 팔거나 자넷에게 선물로 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분수에 맞지 않는 대우 좀 받았다고, 정말로 저것들의 주인이 자신인 것처럼 행동하다니. 테사는 제 생각에 소름 끼쳐 하며 장신구에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람이 간사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헤르트가 없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가 있었다면 부끄럽고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을 테니까.
테사는 옷을 갈아입기 무섭게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낯부끄러운 머릿속을 한시라도 빨리 비우고 싶었다. 그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덮고는 두 눈을 꾹 감고 서둘러 잠을 청했다. 요즘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