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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63화 (63/138)

063화

시간은 하릴없이 흘러갔다. 자넷이 떠나는 날은 빠르게 다가왔고 테사는 하루에 한 번씩 후작부인을 만나서 글을 배웠다. 헤르트와의 관계에서도 딱히 이상한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테사는 그날 이후 마음 한편에 저미는 불안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나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마.’

오늘도 테사는 헤르트가 전에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니……. 입 안에 혓바늘이라도 난 것마냥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혹 그가 모든 걸 알아버린 걸까. 그래서 지금 제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고 은연히 경고를 하는 걸까?

‘그러면 나는…….’

초조해 안절부절못하던 테사가 손톱을 뜯기 위해 엄지를 막 입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휠체어 소리가 나더니 후작부인이 테사를 불렀다. 테사?

“오늘따라 통 집중을 못 하는군요.”

“아……. 죄송해요, 부인…….”

“무슨 일 있나요?”

아까부터 넋을 놓고 멍하니 책만 바라보던 테사에게 엘레나가 부드럽게 물었다. 이에 테사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헤르트와의 일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기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엘레나는 허둥지둥 놓았던 펜을 다시 잡아 드는 테사를 유심히 지켜봤다. 무언가를 숨기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아마도 영주와 관련된 일이겠지. 엘레나는 종이에 적힌 글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이건 철자가 틀렸네요. 반대로 적어야 한답니다. 물론 이 단어와 그 단어가 헷갈리기 쉽지만 그래도 정확히 구분하고 기억하면 좋아요. 글이라는 게 단어 하나만으로도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거든요.”

“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조사가 어색하네요. 다른 조사는 없을까요? 한번 생각해 봐요.”

“……이거는요?”

“오, 훨씬 좋아졌네요. 좋은 표현 같아요.”

엘레나의 칭찬에 어두워졌던 테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녀는 조금 더 자신에 찬 손길로 종이의 빈 곳에 한 문장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써도 괜찮을까요? 문법이…….”

“좋은 걸요? 이상하지 않아요. 테사, 날이 갈수록 실력이 무서울 정도로 늘고 있네요. 이대로면 곧 제 도움이 필요 없겠어요.”

“그건 아니에요…….”

테사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천천히 수그렸다.

확실히 그녀의 글 실력은 막힘없이 늘고 있었다. 테사가 기울이는 노력도 노력이지만, 지금까지 화 한 번 내지 않고 자세하고 정성스럽게 글을 가르쳐 주는 엘레나의 공이 컸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테사는 철자를 외우기도 전에 글을 배우는 것을 포기했을 터였다.

“이건 다 부인께서 도와주셔서…….”

버벅거리고, 남들보다 지식이 서너 배로 부족한 테사가 답답할 만도 한데도 엘레나는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늘 웃는 얼굴로 천천히 테사가 모르는 부분을 다시 집어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테사는 글뿐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 있어서 조금씩 자신감이 붙는 중이었다.

“그래도 테사가 다 열심히 해서 얻은 결과죠. 아무리 뛰어난 스승을 두었다 한들 제자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엇을 얻어가겠어요?”

엘레나는 테사가 공책에 무수히 연습한 흔적을 힐긋거리며 조용히 웃어 보였다. 돌아가서도 책을 붙잡고 앓는 소리를 내며 공부에 계속 매달리는 테사가 상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새 영주에게 말했던 것처럼 테사는 배우기만 하면 제 몫을 무난히 해낼 사람이었다.

“지금 아주 잘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테사 같은 제자를 두게 되어 기쁘답니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거든요.”

연이은 후작부인의 칭찬에 테사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입을 오므렸다. 단시간에 쏟아지는 칭찬에 그녀는 아직 면역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이렇게 좋은 말을 들을 때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고장 난 도구처럼 삐걱대었다. 엘레나는 그마저도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보다 오늘 글공부는 여기까지 하고, 이다음부터는 편지를 써보는 건 어때요? 작문을 하는 거죠.”

“……작문이요?”

“네. 지금까지 배운 것들로 벨로뎀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거예요. 이제 곧 얼마 안 남았으니까.”

“아…….”

“선물과 함께 편지를 주면 그녀가 무척 좋아하겠죠?”

테사는 쉽사리 답하지 못하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사실 자신이 없었다. 글을 배우는 것과는 별개로 누군가에게 줄 편지를 쓴다는 것이 어렵게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린애 글솜씨에도 미치지 못해서 엉망진창인 제 편지를 과연 자넷이 기쁘게 받아줄지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편지라 하면 오래전 그 일이 생각나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래도 자넷과 약속했으니까…….’

최대한 열심히 써서 건네주자. 테사는 마음을 고쳐먹으며 작게 용기를 냈다. 글도 배우는 마당에 편지라고 못 쓸 건 무어란 말인가. 테사가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요. 보내기 전에 한 번 확인하는 건 내가 옆에서 도와줄 테니까.”

“……감사해요.”

“그보다 선물은 뭐가 좋을지 생각해 봤나요?”

“선물…….”

후작부인의 말에 테사가 곰곰이 생각했다. 자넷이 좋아할 만한, 혹은 자넷에게 어울릴 만한 선물……. 하지만 좀처럼 생각해도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넷이 원하는 것은 대부분 그녀가 이미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오늘 가서 생각해 봐요.”

“…….”

“너무 거창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것도 부담 갖지 말고요.”

“네…….”

“그럼 내일 보죠. 돌아가는 길 조심하고요.”

테사는 엘레나의 배웅을 받으며 방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볕이 한가득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창밖으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 고민했다. 방 안에만 있기에는 날씨가 무척 화창했고 복잡한 머릿속도 정리하고 싶었다.

게다가 점심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부인, 각하께서 오늘은 점심을 함께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십니다.”

그 때 방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 하나가 테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 왔다. 오늘도 헤르트는 많이 바쁜 듯했다.

테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로 호위기사 두 명과 하녀 한 명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성과 이어진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당초 주인 일가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별관에 머무르고 있는 자넷을 제외하고 성에서 지내는 헤르트와 테사, 그리고 후작부인만이 이곳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덕분에 테사는 정원에서 조용히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그녀는 느리지만 반듯한 걸음걸이로 어제와 같은 길을 천천히 걸었다. 사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를 간질거렸다. 살랑이는 바람결도 기분 좋았다. 말도 안 되게 평화롭기 그지없는 오전의 한때였다. 그래서인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묵묵히 걷기만 하던 테사는 불현듯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질 좋은 원단으로 만들어진 실크드레스는 광이 났고, 여러 가죽을 겹쳐 단단하게 만든 신발은 발에 무리 가는 것 없이 편했다. 목과 귀를 장식한 값비싼 장신구들 또한 걸을 때마다 찰랑이며 반짝반짝하고 무지갯빛을 반사했다.

하나같이 저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투성이에,

이 모든 게 현실 같지가 않다.

정녕 꿈이라면 영영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테사는 제게 찾아온 이 평화가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도 좀체 믿을 수 없었다. 꿈속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언제까지나 제 삶은 학대와 무시로 점철된 나락일 줄 알았기에.

‘개 같은 년!’

하염없이 날아드는 매질과 차가운 냉대를 필사적으로 버티면서도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던 지난날들. 만약 끝이 있다면 결국 버려져 고통만 꾸역꾸역 삼킨 채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여겼기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듯 체념하며 살아왔다.

물론 누군가는 그럴수록 독하게 마음먹어야 한다고 질책하겠지만 버틸 수 없었다.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 사라진 이상, 작은 의지 한 톨 가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간 테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루를 겨우 연명할 수 있게 스스로를 망각하는 것이 전부였었다.

그마저도 매일 아침 깨졌다 붙기를 반복했지만.

그만큼 지난 7년간 테사는 죽고 싶어 살았고, 죽지 못해 살았다.

하루하루 정신이 무너져 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말을 더듬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수그리고 몸을 움츠렸다. 이다음은 무엇이 더 망가질까, 생각하며 스스로를 더욱 망치려 들었다.

어차피 더 나아질 것도 없다고 여겼으니까. 제 지옥은 이곳이며 제 마지막도 이 지옥이 되리라 확신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자신이 지금 좋은 옷, 좋은 음식을 입고 먹어가며 드넓은 정원을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 분수에 넘치는 대우를 받는 것도. 심지어 죽은 줄 알았던 헤르트가 제 앞에 멀쩡히 살아 있는 것도.

모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눈가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제게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을 이제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테사를 슬피 웃게 만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놓고 살아왔는지도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사무쳤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내가 좀 더 멀쩡했더라면……. 조금만 더 버티며 완전히 놓지 않고 살았더라면…….’

이 기분이 덜했을까.

상황도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헤르트와 만나자마자 배신에 대해 해명을 했을 수도 있었다. 학대받은 것도 피력하며 그에게 동정과 자비를 구할 수도 있었겠지. 글도 먼저 배우겠다 나섰을 테고, 소후작이 도망치기도 전에 그를 벌해 달라고 요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자꾸만 스며드는 이 불안감도 금방 떨쳐 냈을 터였다.

‘나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마.’

테사는 그 자리에 서서 한없이 바닥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제자리인 제게 신물이 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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