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59화 (59/138)

059화

‘오늘 날이 좋아서 외투도 안 걸치고 나왔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 둘 다 완전 꼴딱 젖은 생쥐 꼴이네. 진짜 웃기다.’

테사가 연신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헤르트는 능숙하게 소녀의 머리카락을 비틀어 물기를 짜내며 반 장난식으로 툴툴거렸다.

‘이 상황이 뭐가 웃기다고 웃기는.’

‘안 웃길 건 뭔데. 그리고 이런 때일수록 웃어야 하는 거거든?’

‘이따가도 웃는지 보자고.’

옷에서 최대한 물을 짜낸 두 사람은 슬슬 올라오는 한기에 바깥을 쳐다봤다. 쏟아지는 비는 여전히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결국 헤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불 피울 수 있는 게 있나 한번 살펴볼게.’

‘나도 같이 해.’

두 사람은 불 피울 만한 것을 찾아 나섰고, 꽤 빠르게 나뭇가지와 버려진 종이를 주워 모을 수 있었다. 헤르트는 적당해 보이는 나뭇가지 두 개를 이용해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마찰열에 얼마 가지 않아 연기가 피어오르자 테사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이런 건 대체 언제 배웠어?’

‘덴 아저씨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슬쩍.’

‘헬, 너는 어딜 가도 굶어 죽지는 않겠다. 못 하는 게 없는 것 같아. 너에 비하면 나는…… 굶어 죽기 십상이야. 안 되겠다, 나도 더욱 분발해야지!’

불씨를 살려 불길을 커다랗게 키우는 헤르트를 보며 테사가 힘차게 소리쳤다. 이에 헤르트가 피식 웃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됐어, 어차피 내가 너 먹여 살릴 건데.’

‘그래도 안 돼. 나도 내 몫은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그래야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 때 내가 너 먹여 살리지. 그러니까 헬,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알았지?’

테사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떻게 보면 비장하기까지 했다. 헤르트는 그런 테사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감동이긴 한데……. 그럴 일은 없을 듯.’

‘뭐? 지금 나 무시해? 나 진짜 진지하거든? 그리고 도라 선생님 말로는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거랬어. 나중에 정말 내가 널 먹여 살리면 어쩔 건데.’

‘예, 마님. 든든하네요.’

‘오냐.’

동시에 두 사람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헤르트와 테사는 화르륵 타오르는 불 곁에 가까이 앉아 오순도순 많은 대화를 했다. 매일같이 붙어 다니며 끊임없이 말을 나누는데도 두 사람 사이에선 여전히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계속 쏟아졌다. 대화의 주제는 사소한 일상부터 그들의 미래까지 다양했다.

‘헬, 옷이 생각보다 빨리 안 마르는 것 같지 않…….’

그 순간 헤르트가 상의를 훌러덩 벗었다. 그러자 한창 성장기에 들어선 소년의 탄탄한 몸이 훤히 드러났다. 원체 골격이 컸기 때문에 마냥 말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촘촘하게 짜인 마른 근육이 그의 몸을 날씬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테사는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리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릴 적부터 헤르트의 몸을 흔히 보아왔음에도, 오늘만큼은 평소와 다른 기분이었다.

왜일까. 비가 오는데 단둘이 있어서? 아니면 작은 모닥불의 주황 불빛이 그의 몸 위로 일렁이고 있어서?

확실한 것은, 헤르트가 고백한 뒤부터 테사의 눈에 헤르트가 점점 남자로 보이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제 시선을 피하는 테사의 반응에 헤르트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오, 옷 좀 입어. 갑자기 그렇게 훌렁훌렁 벗으면…….’

‘뭐야, 새삼스럽게. 내 몸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잖아. 왜, 갑자기…….’

아까보다 붉어진 테사의 뺨을 발견한 헤르트가 몸을 움직여 테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에 테사가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서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금세 헤르트가 테사의 팔뚝을 잡아 옆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너 얼굴 빨개졌어.’

‘이, 이건! 불을 너무 가까이서 쐬어서…….’

‘테사.’

순식간에 코앞으로 테사에게 제 얼굴을 들이민 헤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테사는 드러난 그의 몸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떡해! 정말 내가 미쳤나 봐! 테사가 급히 헤르트를 밀어내려던 차였다.

‘야, 너, 떠, 떨어지지 못…….’

‘부끄러워?’

‘내, 내가?’

‘그러면 왜 이렇게 내 눈을 못 봐.’

‘아니거든! 볼 수 있는데!’

‘그럼 보든가.’

헤르트의 도발에 테사가 겨우 용기를 내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가 무언가로 가득 차 일렁이고 있었다. 야, 이제 됐……. 그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

헤르트가 테사에게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 서툴고 어색하지만 그만큼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당황하던 테사는 이내 질끈 두 눈을 감고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뜨겁고 단단한 소년의 맨살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쿵, 쿵, 쿵, 하고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떠나가지 않았다. 질척이는 그의 숨소리와 달큰한 입술도 선명했다.

그렇게 비가 오는 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입을 맞췄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서 소년은 수줍은 얼굴로…….

‘좋아해, 테사.’

“테사, 테사?”

누군가 테사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자넷이 자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테사가 허둥지둥하며 자넷에게 사과했다. 과거를 떠올리느라 잠시 제 옆에 자넷이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미, 미안해요. 잠시 생각 좀…….”

“무슨 생각했는데요? 옛날 일? 입가에 미소가 잔뜩인 걸 보니 되게 행복해 보이던데. 무슨 기억이에요? 말해 주면 안 돼요?”

“아, 그게……. 아무것도.”

“뭐예요. 나는 말해 줬는데. 설마 야한 생각 했어요?”

자넷의 말에 테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자넷에게 외쳤다.

“절대 아니에요……!”

“흐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알았어요. 여기까지 할게요.”

눈매에 힘이 들어간 테사를 본 자넷이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 한 번 진짜 귀엽다니까. 자넷의 옆에 선 진도 어느새 테사를 보고 옅게 웃고 있었다.

그 때 여전히 붉은 얼굴로 테사가 화제를 급히 돌렸다.

“근데 자넷은…… 왜 수녀원을 나왔어요?”

“아……. 그거요? 어, 친구 때문에요.”

자넷이 잠시 떨떠름한 기색을 드러냈다가 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행히도 테사는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친구요?”

“음, 그러니까 친구가…… 제가 수녀원에서 나가길 원했거든요. 그래서 나왔어요. 친구 소원 들어준다 셈치고.”

“그렇……군요.”

그런 이유로 수녀원에서 나올 수 있는 건가? 작은 의문이 들었지만 테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자넷이 말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뒤늦게 납득이 된 것이다. 어차피 수녀원에 대한 것은 자신보다 자넷이 더 잘 알 테니까.

“사실 나온 지도 꽤 오래되었어요. 5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아, 그렇네요……. 5년이면…….”

“이젠 수녀원 규칙도 다 잊어버렸는 걸요.”

속세에 찌들었기도 했고. 마지막 말은 반 농담식으로 덧붙이며 자넷이 테사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럼 혹시…… 그 친구분은…….”

“테사.”

불현듯 자넷이 테사의 말을 자르며 그녀를 불렀다.

“네, 자넷…….”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진심이에요.”

“네?”

“나는 언제든지 테사를 도울 거라고요. 그러니까 도망치고 싶으면…….”

그 때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두 여자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 헤르트가 있었다.

여기에 헤르트가 왜……. 테사는 멍한 얼굴로,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쳐다봤다. 얼마 가지 않아서 헤르트가 테사 앞에 당도했다. 그도 오면서 비를 맞았는지 머리카락이 푹 젖어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자넷이 헤르트에게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나 헤르트의 반응은 조금 냉담했다. 그는 자넷을 꺼림칙해 하는 얼굴로 슥 쳐다보더니 이내 테사를 낚아채 제 쪽으로 이끌었다. 때문에 테사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헤르트와 자넷을 번갈아 힐긋거렸다.

“마차를 불렀으니, 그쪽은 그걸 타고 와. 나와 테사는 먼저 가볼 테니.”

“……네, 그렇게 하세요.”

헤르트는 그대로 테사를 밖으로 이끌었다. 그의 손에 반쯤 끌려가다시피 하면서도 테사는 계속해서 자넷을 돌아봤다. 자넷이 자신은 괜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그녀를 배웅했다.

“저기, 잠깐……. 인사를…….”

“나중에 해.”

“…….”

헤르트의 말에 테사가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아까부터 줄곧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테사는 말하는 것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자신까지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는 밖으로 나오자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로브를 헤르트에게 건네주었다. 헤르트는 그것을 테사에게 꼼꼼하게 입혀주고선 자신이 타고 온 말 앞으로 그녀를 다시 이끌었다.

“빨리 달리지는 않을 거지만 그래도 비가 오니까 조심해야 해. 꼭 붙잡아.”

테사를 먼저 말에 올리고 이어 헤르트도 말에 올라탔다. 기사가 이상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움직여 성으로 향했다.

성으로 가는 길 내내 헤르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테사는 말 고삐를 움켜쥔 그의 손에 힘줄이 돋아난 것을 보고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역시 호숫가로 멋대로 소풍을 나가서 화가 난 걸까? 그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헤르트가 화가 난 것은 아닌지, 테사는 그게 가장 먼저 걱정이 되었다.

“목욕물은?”

“지시하신 대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성에 도착하고 나서 헤르트는 테사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방과 이어진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을 열자 모락모락 따뜻한 김이 쏟아졌다.

헤르트는 모든 하녀들을 물린 채 테사를 욕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로브를 벗기기 시작했다. 묶은 줄을 풀어헤치는 손길에도 아까 말고삐를 잡았을 때처럼 힘이 잔뜩 들어간 게 느껴졌다.

그러다 얼마 후 헤르트의 손길이 우뚝 멈추더니 그가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또 아무것도 안 물어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