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테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자넷이 이 유테르트가의 성을 완전히 나간다는 것을. 이렇게 만나서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자넷은 테사가 서서히 풀 죽어가는 모습으로 바뀌자 참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가는 게 그렇게 섭섭해요?”
섭섭함을 넘어 서글펐다. 테사는 더 이상 이곳에서 자넷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넷은 지난 2년간 테사에게 있어 가장 도움이 되고, 지지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곁에서 사라지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넷은……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요? 세상에, 기분 너무 좋다. 고마워요. 테사가 날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자넷이 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쾌활하게 웃었다. 마치 삐진 어린아이를 달래는 투였다. 아무래도 테사의 기분을 띄워주려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테사는 자넷을 보고 웃지 못했다. 자넷이 떠나면 마음 한쪽이 텅 빌 것 같았다. 이렇게 마음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사라질 것이다.
“테사.”
“…….”
“나 좀 볼래요?”
좀처럼 테사가 제 눈을 마주하지 못하자 자넷은 테사의 가지런히 모인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제야 테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자넷을 쳐다봤다. 여린 눈매가 물기에 젖어들고 있는 듯했다.
“나는 테사가 너무 좋아요. 지난 2년간 정도 많이 들었고.”
“……그건 저도…….”
“그러면 우리 같이 나갈래요?”
“……네?”
동그랗게 뜨인 테사의 두 눈을 보며 자넷이 다시 한번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진짜 찌르는 족족 반응이 나온다니까. 귀여워 죽겠어요, 정말. 이젠 거의 아래 동생을 대하듯이 자넷이 싱글벙글 웃으며 테사의 두 손을 잡은 제 손에 힘을 주었다. 얇은 레이스장갑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농담이에요, 농담.”
“……놀리지 마요.”
테사가 볼멘소리를 냈다. 자넷의 입가에서는 여전히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
“사실은 정말 그러고 싶긴 한데……. 워낙에 큰 장애물이 버티고 있어서요. 그거 생각하면 제가 테사를 데리고 나갈 자신이 없네요. 아마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붙잡힐 걸요?”
“…….”
“그리고 테사도 남고 싶잖아요. 영주님 곁에. 내 말이 맞죠? 우리 솔직해집시다.”
자넷의 물음에 테사는 무언가를 훔치다 걸린 사람처럼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다 자넷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넷을 좋아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자신은 헤르트의 옆에 남고 싶었다. 곁에 있겠다고 최근에 약속하기까지 했고.
“거 봐요. 나랑 같이 나갈 마음도 없으면서.”
자넷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테사의 흩날리는 잔 머리카락들을 손을 뻗어 정리해 주었다.
아까 자신이 만든 화관과 테사의 진저빛 머리카락은 몹시 잘 어울렸다. 만약 요정이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새 영주가 왜 그렇게 테사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유별나게 구는지 알 것 같았다.
“테사, 우리는 완전히 헤어지는 게 아니에요.”
“…….”
“내가 나가고 나서도 우리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요. 그건 테사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고요. 그리고 지금 글도 배우고 있잖아요. 그건 정말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어허, 하지만은 없어요. 그냥 고개 끄덕여요.”
“……네.”
고개 끄덕이라고 했다고 정말 제 말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테사를 보며 자넷은 웃음을 목구멍으로 겨우 밀어 넣었다. 정말이지 테사는 보면 볼수록 챙겨주고 싶은 존재였다.
사실, 자넷은 이렇게까지 테사와 자신이 친해질 줄은 몰랐다. 헤어지는 것에 자신도 다 속상할 정도로 마음을 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이곳을 나가서도 친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을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마지막 도피를 한다는 생각으로 이곳에 들어온 건데……. 제 앞에 있는 여자가 너무 가여워서 한 번 두 번 마음을 쓰던 것이 이 자리까지 이어졌다. 더불어 이제는 정말로 테사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게 되었다.
자넷은 어느새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테사의 손을 내려다봤다.
“언제…… 나가요?”
“돌아오는 주의 첫 번째 날이요.”
“……너무 빠른데…….”
“반대로 생각하면 제가 여기에 너무 오랫동안 머무른 거죠. 원래는 다른 부인들처럼 이미 나가야 했어요.”
그 대답에 테사가 미약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지 말고, 제가 영주님께…….”
“그러지 마요. 제 선택이잖아요. 그리고 뭐든 아쉬울 때 떠나라는 말이 있어요. 제가 여기에 계속 붙어 있으면 테사도 귀찮아질 걸요? 나중에 막 저한테 나가라고 빌지도―”
“……아니에요!”
일순 테사가 큰 소리를 냈다. 때문에 자넷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살짝 놀란 얼굴로 동시에 테사를 쳐다봤다.
테사 또한 뒤늦게 제가 한 행동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창피하고 무서워서 차마 자넷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떡해……. 내가 너무 큰소리를 냈어. 분명 자넷이 싫어할 거야…….’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환희에 찬 듯한, 자넷의 기쁜 목소리였다. 머지않아 자넷이 테사의 두 손을 잡고 붕붕 흔들며 벌이 날갯짓하듯 말했다.
“테사! 나 진짜 지금 너무 기뻐요. 그렇게 내가 좋아요? 계속 이대로 머물러줬으면 좋을 만큼? 크, 역시 저는 축복을 잘 받는 체질인가 봐요. 테사가 날 이만큼 생각해 준다니, 이것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겠어요?”
“…….”
“아, 이걸 영주님이 보셨어야 하는 건데. 그게 진짜 아쉽네요. 그 잘난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좀 궁금했는데. 테사도 그렇죠? 아무튼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에요.”
“……자네엣…….”
자넷은 테사의 손을 흔드는 것을 멈추고 새끼손가락을 세워 테사에게 내밀었다.
“우리 약속 하나 할까요?”
“……무슨 약속…….”
자넷이 몸을 수그려서 테사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테사는 지금보다 더 솔직해지기. 어렵지 않잖아요. 아까처럼 하면 돼요, 아까처럼. 그러면 저는 언제든지 테사가 원하는 대로 데리러 올게요. 우리 같이 어디든지 떠나요. 여자 둘이 하는 여행도 나름 괜찮을 것 같아.”
“……그런.”
“같이 영주님을 한번 따돌려보자구요.”
마지막으로 테사의 콧등을 살짝 쳐주며 자넷이 깔깔거렸다. 뭐예요, 그게……. 테사는 그리 말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슬쩍 웃고 있었다. 곧 테사는 자넷이 내민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자넷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말했다.
“근데 진짜 농담 아니에요. 언제든지 말해요. 테사는 제 친구니까.”
두 여자의 소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비를 세차게 뿌려댔기 때문이었다. 사용인들이 자리를 급하게 정리하는 동안 두 사람은 근처 정자로 피신했다.
자넷은 푹 젖은 저와 테사의 모습를 번갈아 쳐다보며 반쯤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꼭 이러니까 어렸을 때 있었던 수녀원이 생각나네요.”
“……수녀원이요?”
“네, 사실 제가 수녀원 출신이거든요.”
마니에게서 숄을 받아 테사에게 걸쳐 준 뒤, 자신도 진에게서 숄을 받아 걸치며 자넷이 말했다. 예상치도 못한 사실에 테사는 반사적으로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신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한 자넷이 수녀원 출신이었다니……. 간혹가다 ‘신은 무슨, 얼어 죽을 신’이라고 중얼거리던 자넷이 생각났다.
“방금 의외라고 생각했죠?”
“아, 그, 그게…….”
“괜찮아요, 다들 그래요. 사실 나도 믿기지가 않는 걸요. 먼저 말 꺼내서 좋은 말 듣는 것도 아니고.”
그러고 보면 유테르트 후작의 일곱 번째 부인으로 자넷이 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수군거렸던 것이 생각났다. 신이 노할 일이라고들 했던 것이, 자넷이 수녀원 출신이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던 걸까. 수녀가 결혼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간혹 수녀원에서 수업을 듣다가 종종 친구랑 땡땡이치고 밖으로 나간 적이 많았거든요. 그때 담 넘느라 엄청 고생했는데.”
옛날 생각이 났는지 자넷이 실실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지금처럼 갑자기 소나기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친구랑 누가 먼저 이런 정자에 도착하나 내기도 하고 그랬어요. 지는 사람이 꿀밤 맞고. 지금 뭔가 이 상황이랑 비슷해서 옛날 기억이 갑자기 나네요. 테사는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랑 관련해서 생각나는 거 없어요?”
“아, 저는…….”
자넷의 질문에 테사는 말끝을 흐리며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는 바깥을 쳐다봤다. 오늘 같은 날이라……. 있긴 있었다. 헤르트와 모든 걸 함께했던 고아원 시절에. 테사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요.”
행복했던 기억 중 하나였다. 절대 잊지 못할 기억이기도 했다. 테사는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날의 일을 조금씩 회상했다.
‘헬, 어떡해! 비가 와!’
그날은 헤르트와 심부름을 핑계 삼아 몰래 밖으로 나들이를 나갔던 날이었다. 화창했던 날씨가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갈대 같은 빗줄기를 죽죽 뿌려대었다. 때문에 테사와 헤르트는 우왕좌왕하다가 버려진 듯한 건물 아래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
‘엄청 쏟아져. 멈추기는 할까?’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옷에 물기나 짜. 안 추워?’
푹 젖은 옷에서 물을 쭉 짜며 헤르트가 바깥만 쳐다보는 테사에게 한소리 했다. 평소에 추운 걸 무척 싫어하는 주제에 태평스럽게 비 구경이나 하고 있는 그녀가 못마땅스럽다는 투였다.
‘아니, 추워.’
‘그럴 줄 알았어. 이리 와. 일단 네 머리카락에서 물기 좀 빼자.’
헤르트가 손짓하자 테사가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제 머리를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