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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57화 (57/138)

057화

랑그의 물음에 여자가 반사적으로 경계의 눈빛을 보내왔다.

“참고로 식사, 술 주문 안 받아요. 여기 망한 지 오래되었거든요.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는 몰라도 숙식을 원하는 거면 다른 마을로 가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홱 하고 고개를 돌려버린 여자는 다시 커다란 상자를 낑낑거리며 끌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랑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상자를 대신 끌어주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무척 무거웠다.

“어디에 갖다 놓으면 됩니까?”

“오……. 힘 좋으시네요. 도움은 마다하지 않을게요. 뭘 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으로 들고 와줄래요?”

여자가 천으로 가려진 안쪽으로 랑그를 안내했다. 한때 주방이었던 곳에는 여러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었다. 망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먹을 거 하나 보기 힘들었다.

랑그는 대충 빈자리에 상자를 놓았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무겁습니까?”

“그냥 이것저것? 골동품 같은 것들이에요. 나중에 팔아먹을 수 있길 바라며 모아두는 거죠.”

여자가 매고 있던 가방을 뒤지더니 손수건을 꺼내 랑그에게 내밀었다. 랑그는 고개 숙여 짤막하게 인사 후 손수건을 받아서 땀을 닦았다.

“그보다 뭘 원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물어봐요. 보통 외부인이 이곳까지 왔다는 건 길을 잘못 들었거나, 대부분 특정 목적이 있어서 온 거니까. 그쪽도 둘 중 하나겠죠.”

“아……. 그렇다면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랑그가 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여자가 흐응, 하고 작은 감탄사를 냈다.

“후자구나.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요?”

“이 근처에 있었던 피츠럴드 고아원에 대해 아십니까?”

“……고아원이 왜요?”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얘기가 쉽겠네요.”

여자의 떨떠름한 반응을 확인한 랑그가 저도 모르게 눈을 빛냈다. 반가워하는 기색은 아니지만 일단 저 여자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지금으로선 참고인 한 명도 아쉬운 상황이었으니까.

“7년 전까지는 존재했던 피츠럴드 고아원이 갑자기 사라져서요. 그 이유에 대해 아십니까?”

“……화재 때문이에요. 커다란 화재가 나서 건물이 모두 무너졌거든요. 그래서 고아원이 사라졌죠.”

“그렇게 커다란 화재면 신문에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딜가도 화재가 났다는 소리는 찾아볼 수가 없던데요.”

랑그의 물음에 여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서 삐딱한 눈초리로 랑그를 쳐다봤다.

“신문은 글을 알아야 읽을 수 있는 사치재잖아요. 잘나신 분들이 고작 평민 고아원 하나 사라졌다고 신경 쓰시겠어요?”

“아, 그렇군요. 제가 그건 미처 신경 쓰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그러면 혹시 그 당시 고아원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몰라요. 다들 뿔뿔이 흩어져서. 뭐 잘살고 있거나, 잘 못 살고 있거나 그 둘 중 하나겠죠. 아니면 이미 뒈졌거나.”

상당히 날이 선 듯한 말투에 랑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수첩에 대충 ‘행방을 알지 못함’이라고 적었다. 이에 여자가 랑그의 수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질문했다.

“근데 뭐 때문에 고아원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는 거예요?”

“아, 사람을 찾고 있어서요.”

“그 사람이 고아원 출신인가 봐요? 그러면 확실히 찾기 힘들기는 하겠네요. 화재로 인해서 그 관련 서류들이 다 없어졌을 테니까.”

“네, 별로 찾을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여자의 말에 랑그가 고개를 주억였다. 지금까지 이곳저곳 전전하며 얻은 정보라곤 꼴랑 고아원이 화재로 인해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랑그는 골치가 아파 미간을 좁혔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그 순간 여자가 다시 한번 랑그에게 물었다.

“중요한 사람이에요? 누군데요? 혹시 모르잖아요. 내가 아는 사람일지. 나도 거기 출신이니까.”

“……진저빛 도는 붉은 머리카락에 짙은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입니다. 되게 청초한 미인이고요. 혹시 아십니까? 7년 전까지는 고아원에 있었던 걸로 확인되고 있어요.”

“붉은 머리카락, 초록색 눈동자……. 테사?”

여자의 입에서 아는 이름이 나오자 랑그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가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계십니까?”

“네, 고아원에 있을 때 친구였거든요. 근데 테사를 왜 찾고 있는 거죠?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저도 의뢰를 받고 일하는 몸인지라 그것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거짓말을 눈 한 번 깜박이지도 않고 능청스럽게 하는 랑그였다. 그는 수첩의 다음 장을 펼치고 재차 여자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보다 그분이랑은 화재로 인해 헤어지신 겁니까?”

“아니요. 테사는 화재가 나기 몇 달 전에 고아원을 나갔어요. 되게 급하게 인사도 없이 나가서 똑똑히 기억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시고요.”

“네, 몰라요.”

“그러면 고아원을 나가기 전에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수첩에 들은 것을 그대로 받아 적으며 랑그가 계속해서 여자에게 대답을 유도했다.

“어……. 그러고 보면 그 당시에 테사가 많이 바빴어요. 원장님에게 수시로 불려갔거든요. 무슨 일을 하는지는 말 안 해줬지만……. 되게 기뻐하는 것 같았어요. 걱정 끝이라나……. 그래서 저는 뭐, 테사는 착하고 성실한 애라서 원장님 개인 심부름을 하고 돈을 받나 싶었죠. 아니면 일자리 주선을 받았거나. 그다음 해에 테사는 독립이 예정되어 있어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독립이요?”

“그럼 평생 고아원에서 사는 줄 알아요? 일정 나이가 차면 독립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보통 독립할 시기가 되면 일자리를 얻으려고 다들 분주했죠. 특히 여자애들은 원장님 눈에 잘 보이려고 애를 썼어요. 상대적으로 일자리 구하기 쉬운 남자애들과는 달라서, 여자애들은 간혹 원장님이 일자리를 직접 주선해 주실 때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테사가 갑자기 고아원을 나갔어도 별로 걱정은 안 했어요. 급하게 일자리를 구해 나갔거니 싶었으니까. 또 테사랑 붙어 다니는 남자애도 같이 나갔기도 했고.”

여자가 말하는 남자애가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간 랑그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그 뒤로는 아무 소식도 없었고요?”

“네. 뭐, 고아원을 나서면 반은 소식이 끊기니까 다들 그러려니 했죠. 무엇보다 몇 달 후에는 고아원에 불이 나기도 했고.”

“……그렇군요.”

랑그는 잠시 펜을 멈추고 머릿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뚜렷한 정황을 알 수 없기에 테사 유테르트가 헤르트 샤인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여자의 증언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적은 탓이다.

일단 여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확실하게 얻은 정보는, 테사 유테르트가 고아원을 나와 세테비얀 남작가로 들어가기 전에 원장과 수시로 만남을 가졌다는 것이다.

‘일자리 주선이라…….’

랑그는 그쪽을 파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펜을 다시 움직였다.

“혹시 당시 고아원 원장의 행방은 알고 계십니까?”

“신기하네요. 며칠 전에도 누가 찾아와서, 원장님 행방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이걸 전해주라고 했는데.”

여자가 재차 가방 안을 뒤적거리다 곧 네모난 칩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건네받은 랑그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칩을 살펴보았다. 도박장에서 유통되는 칩인가? 일단 랑그는 알겠다며 칩을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걸 가지고 린데할 영지로 가라고 그랬어요.”

“누가 말입니까?”

“몰라요, 나도. 주라고 하니까 주는 거지. 이제 질문은 다 끝났어요?”

“아, 가능하다면 고아원 구조를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여기에 오기 전에 터를 보고 대충 추측해서 그려봤는데 이게 맞나 싶어서요.”

랑그가 이전에 메모한 부분을 펼쳐서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여자는 기억을 더듬어 틀린 부분만 대충 고쳐 주었다. 랑그는 흡족해 하며 수첩을 갈무리하여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여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못 했군요. 저는 로라고 합니다. 숙녀분의 이름은 무엇이신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숙녀는 무슨…….”

여자는 랑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말했다.

“조니예요. 조니.”

***

따뜻한 바람이 살랑이며 테사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테사는 바로 앞에서 꽃을 골라 꺾고 있는 진과 그 꽃들을 엮어서 화관을 만들고 있는 자넷을 쳐다봤다. 자넷의 손에 들린 화관은 거의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화관은 보기만 해도 아름다웠다.

“……자넷은 손재주가 좋은 것 같아요.”

“그래 보여요? 다행이다. 마지막 꽃은 뭘로 할까요?”

진이 가져온 꽃들을 살펴보며 자넷이 테사에게 물었다. 테사가 그중 노란색의 꽃을 가리키자 자넷이 씩 웃으면서 노란색 꽃을 골라 화관을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테사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옆에서 진과 마니가 잘 어울린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정작 테사만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넷을 쳐다봤다.

“이걸 왜…….”

“테사한테 제일 잘 어울리니까요.”

“그렇지 않은…….”

“무슨 소리예요. 이런 건 테사가 해야지, 누가 해요? 그보다 똑바로 봐봐요. 음, 역시 잘 어울린다. 사실 테사가 워낙 미인이라 어떻게 만들었어도 다 잘 어울렸을 것 같긴 해요.”

그 말에 테사가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미인에게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은 그저 백조를 흉내 내는 오리에 불과한데 말이다. 천박하고 하잘것없다는 소후작의 말들이 귓가에 왱왱 메아리쳤다. 테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때 자넷이 테사의 얼굴 앞에서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왜 또 그 표정이에요? 진짜 예쁜데. 지금 입은 이 옷도 얼마나 잘 어울리는데요. 그때 그 원단으로 옷 안 맞췄으면 진짜 섭섭했을 거예요. 역시 내 안목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테사의 옷을 가리키며 자넷이 찡긋 웃어 보였다.

“……자넷은, 왜…… 저한테 잘해줘요?”

“음, 나중에 테사를 호로록 하고 잡아먹으려고?”

“……네?”

“농담이고, 테사랑 나랑 친구잖아요. 설마……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죠? 제가 분명히 친구 하자고 말했는데.”

서운해 하는 자넷의 말투에 테사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저도 자넷을…… 친, 구라고…….”

“그럼 됐어요. 그보다 슬슬 말할 때가 됐네요.”

“……뭐가요?”

“저 출가하는 날 정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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