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제 제안이 하잘것없는 눈속임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러나 이번에도 엘레나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양 대꾸했다. 이것 또한 예상했다는 듯이. 그녀는 무릎 위로 올려둔 손을 들어 헤르트가 앉아 있는 책상을 가리켰다.
“그러면 좀 더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말해 볼까요. 저는 경의 호의를 사고 싶답니다. 경이 앉아 있는 그 자리를 잠시 빌리고 싶기 때문이에요.”
“영주의 권한을 빌려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도 있나 봅니다?”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게 뭡니까?”
헤르트의 물음에 엘레나가 다시 한번 제 다리를 내려다봤다. 때문에 헤르트의 시선도 후작부인을 따라 아까부터 미동도 없는 그녀의 다리로 향했다.
사고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는 두 다리. 그로 인해 본부인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서쪽 첨탑으로 밀려나 지금까지 홀로 살았다는 건 일찌감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럼 저와 제 남편의 사이가 어떠했는지는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고 말하도록 하지요. 경, 저는 가문의 치부를 드러낼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경이 쥐고 계신 권한의 일부가 필요한 거고요.”
치부를 드러내겠다는 말에 헤르트의 눈살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이제 와서 일종의 복수라도 하겠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후계자 아들이 있잖아.”
‘사지를 조각조각 내어 짐승의 먹이로 뿌려도 시원찮을 그 빌어먹을 새끼가 말이지.’
헤르트가 삐딱한 눈빛으로 후작부인을 쳐다봤다. 소후작이 아직 살아 있는 게 뻔한데 가문에게 타격을 입히겠다고?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굴 병신으로 보나.
현재 그녀가 말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는 세 살배기도 알 터였다. 모자 아니랄까 봐 쌍으로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그 때 엘레나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답했다.
“미안하다고는 말하지 않을게요.”
“뭐?”
“소후작이 테사에게 한 짓은 어떤 이유로든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걸 알지만……. 내가 한 짓은 아니니, 당사자도 아닌 경에게 제가 사과를 할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약조할 수 있답니다. 나중에 소후작을 잡거든, 경 마음대로 하세요.”
제 아들에 대해, 꼭 쓰고 남은 물건을 알아서 하라는 투로 엘레나가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그 어떤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순간 소후작의 친모가 그녀가 아닌 것은 아닐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내 배로 낳은 건 맞지만 한 번도 내 아들이라 생각한 적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기도 싫고. 그래서 더욱 가문의 치부를 드러내려고 하는 거랍니다. 이제 나에게 이 가문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서 말이에요.”
이어 말하는 후작부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차분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감정의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방심하기는 일렀다. 헤르트는 저런 얼굴을 하고서 뒤통수를 노리는 이들을 심심찮게 보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제가 믿어야 하는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 제게 감시를 붙이면 되겠네요. 저는 경에게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보르웬 후작께서도 이를 원하지 않을까요.”
엘레나는 다시 산뜻한 목소리로 돌아와 말을 이어갔다.
“경에게 이 유테르트 영지가 정식으로 승계되려면 적어도 서너 달은 걸리겠지요. 보통은 한두 달이면 끝날 테지만, 유테르트는 개국공신이고 지방의 대귀족 중 하나니까요. 이에 간섭하고자 하는 반대세력이 많을 겁니다. 무엇보다 경은 보르웬 후작의 수족 중 하나니까요. 그래서 이상한 걸 느끼지는 않았나요? 가령 숨어드는 첩자들 같은 거?”
“…….”
“소후작의 실종, 아니, 도주라고 해야 하나요? 아직 그 공범을 못 찾은 걸로 알고 있는데. 경, 잘 생각해 보세요. 저는 오래전부터 이 유테르트가의 일원이었고 모순적이게도 후계자의 친모입니다. 제가 쥐고 있을 패가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나요? 지금 저는 경께 저를 활용해도 좋다고 제안드리고 있는 겁니다.”
헤르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엘레나는 그 침묵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둘에게 모두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사실 제가 돕겠다고 한 건 테사 때문이기도 해요. 경에게는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소후작의 친모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참 착한 아가씨예요. 그렇지 않나요?”
“…….”
“조금만 옆에서 지도하고 가르쳐 주면 안주인의 역할을 충분히 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자신감도 붙겠죠. 그건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분명 도움이 될 테지요. 같은 여자로서 저에겐 테사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답니다.”
헤르트도 테사가 후작부인을 잘 따르고 있다는 것은 그간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 요즘도 하루에 한 번씩 꾸준하게 후작부인과 만남을 가지고 있는 테사였다. 그리고 그 만남 뒤에 테사의 기분은 항상 좋아지고 있었고.
솔직히 그것만 생각하면 후작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헤르트는 테사에게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과부인 제가 경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요?”
“그건 이유가 되지―”
그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헤르트는 후작부인을 잠시 힐긋거리다가 이내 들어오라 허했다. 안쪽에 손님이 있음에도 부러 바깥에서 노크를 했다는 것은 필시 테사와 관련된 보고 때문일 터였다. 이전부터 테사에 관한 것은 즉시 보고하라 명했기에 헤르트는 지금 같은 상황이 익숙했다.
머지않아 기사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와 예상대로 테사에 관해, 헤르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두 부인께서 호숫가로 외출을 나가신다고……. 방금 전 벨로뎀 부인의 하녀가 와서 말을 전해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또 그 여자인가.”
벨로뎀 부인이라는 단어를 듣자 헤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잠자코 앉아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후작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기사에게 지시했다.
“지금 호위의 배 이상으로 붙여서 보내. 그리고 나도 마무리되는 대로 그쪽으로 가지.”
“예, 알겠습니다.”
기사와 헤르트의 대화가 끊기자마자 후작부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테사가 어딜 외출이라도 나가나요? 아, 그녀가 혼자서 외출을 결정했을 리는 없을 테고……. 자넷이군요.”
“……그 여자, 아니, 그 부인과 친합니까?”
헤르트가 묻기 무섭게 엘레나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그쯤에서야 어떤 식으로 새 영주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감이 잡혔다. 후작부인은 헤르트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휠체어를 끌고 문가로 다가갔다.
“글쎄요. 그보다 바쁘신 모양이니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드르륵 드르륵, 방 안에 휠체어 끄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르트가 기사에게 턱짓하자 기사가 서둘러 문가로 다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엘레나는 그곳에서 잠시 휠체어를 멈추고 헤르트를 돌아보며 충고하듯 단호히 말했다.
“벨로뎀 부인을 조심하세요.”
***
“이런…….”
랑그는 아무것도 없는 터를 보며 혀를 찼다. 혹시 몰라 7년 전 피츠럴드 고아원이 있던 자리를 찾아왔건만 벽돌 하나 남아있지 않은 채였다. 겨우 얻어낸 정보와 지도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고아원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진짜 완전히 다 없애버렸네.”
넝쿨만 무성한 공터를 둘러보며 랑그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는 영 소득이 없는데. 푸른 하늘 아래로 뜨거운 햇빛이 그의 머리를 무수하게 찔러 온다.
랑그는 모자를 고쳐 쓰며 괜히 널따란 공터를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건물 위치라도 대강 추측하기 위함이었다.
며칠 전 말에 매달리다시피 종일 달려 피츠럴드 고아원이 있었다는 피안 지역으로 온 랑그였다. 고아원에서부터 차근차근 정보를 모으려고 했던 그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 탓에 정보 수집에 빈번히 실패하는 중이었다. 이런 식으로 자료나 장소가 통째로 사라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탓이다.
‘확실히 분명 누군가 손을 쓴 것 같은데……. 그게 누군지 모르겠단 말이지.’
공터 한 바퀴를 다 돌아 대략 건물 위치를 짐작해 낸 랑그는 종이에 대강 표시를 하고선 조금 떨어진 곳에 묶어두었던 말에게 다가갔다. 이 이상 머물러도 이곳에서는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을 것 같았다. 말에 올라탄 랑그는 이윽고 지도상에서 고아원과 가장 가까운 마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을에 도착한 랑그가 바람 빠진 한숨을 내뱉었다.
‘뭐야, 망해가고 있잖아……?’
마을은 작고 조용했지만 요 몇 년 새에 인구가 확 빠져나갔는지 주인 없는 빈집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길거리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거적떼기나 다름없는 옷을 걸친 거지나 비쩍 마른 개만 드문드문 보였다.
랑그는 주변을 한참 살펴보다 주점 하나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움직였다.
“워워, 잠시 여기에 있어.”
주점 앞에 말을 묶어두고서 랑그는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오래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보수를 하지 않아 빈틈으로 찬바람이 쌩쌩 부는 추레한 안쪽이 가장 먼저 보였다.
아직 개점 시간이 아닌지, 아니면 원래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인지 탁자 위에는 의자들이 올려져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삐끄덕 거리는 판자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보이는 공간에는 텅 빈 술병만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손님은커녕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아무도 없습니까?”
랑그는 주점의 주인을 찾아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대답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랑그는 저도 모르게 초조한 마음으로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이번에도 허탕을 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역시 망해서 아무도 없나…….’
결국 막 발걸음을 떼어 다시 나가려던 차였다.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주점 안으로 막 들어오고 있었다.
“누가 거지같이 가게 앞에다가 말을 묶어놨, 어?”
산발이 된 머리로 커다란 상자를 발로 차다시피 끌고 오던 여자가 랑그를 발견하고 두 눈동자를 껌벅거렸다.
“……그쪽이 주점 주인 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