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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55화 (55/138)

055화

“네가 날 정말로 돕고 싶다면.”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헤르트는 자신을 붙잡은 테사의 손에 조심히 깍지를 꼈다. 불안하게 일렁이는 올리브빛 눈동자가 그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우리가 한 약속을 지키면 돼.”

“…….”

“그게 네가 날 돕는 거야.”

헤르트는 한쪽 무릎을 구부려 테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직 테사를 완전히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터였다. 그녀가 제아무리 입을 다물고 함구해도 제 부사관인 랑그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캐 올 테고, 만에 하나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배신한 게 맞다 하더라도…….

남은 생을 모두 제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할애해 준다면.

자신에게만 충실해 준다면…….

헤르트는 없던 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다시는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그 누구도, 테사 본인도 제 손을 놓지 못하게 할 것이다.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지금처럼 내 옆에만 있으면 되는 거라고.”

알았어?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며 헤르트가 대답을 재촉하듯 말했다.

“…….”

테사는 그런 헤르트와 그에게 붙들리다시피 한 자신의 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놀랍게도 욕심이 났다. 그의 말대로 계속 그 옆에 있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헤르트가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아주 커다란 욕심. 지난 7년간 무수히 꺾여왔던 삶의 의지와 욕구가 헤르트로 인해 점차 살아나는 것 같았다.

다만 그만큼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욕심을 부려도 되는 걸까?’

7년 전에도 욕심을 부려 이 사달이 났는데…….

테사는 제 앞의 사내를 다시는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도, 그와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주는 이 안정과 평화를 오래도록 유지하며 그의 곁에 남고 싶었다. 모순적이게도 그랬다.

그래서 테사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빌기로 했다.

이 욕심을 부리게 해달라고.

그렇게 해준다면 뭐든지 바칠 수 있노라고.

“……응.”

<6. 위태로운 그들>

하루에 한 번,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테사는 엘레나에게서 글을 배웠다. 처음에는 외워야 할 것도,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았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테사는 조금씩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완전히 까막눈이었던 예전에 비하면 상당한 발전이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배운 글을 복습하거나 호위기사를 대동한 채 산책을 했고, 가끔 자넷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오늘도 테사는 자넷과 함께 테라스에서 한껏 풀린 날씨를 만끽하며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나날이었다.

“아, 오늘 날씨 진짜 좋다.”

기지개를 켜다가 맑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자넷이 중얼거렸다.

“이런 날에는 호수에 배 띄워놓고 놀아야……. 테사! 우리 뱃놀이할래요?”

“……네?”

“성 뒤에 되게 예쁜 호수 있어요. 테사는 한 번도 안 가봤죠? 이번 기회에 가볼래요? 겸사겸사 뱃놀이도 하고!”

어느새 자넷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테사를 쳐다봤다. 원래 이맘때쯤에 다들 뱃놀이 한다구요. 자넷의 들뜬 재촉에 테사는 당황하여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뱃놀이라니. 흥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넷의 제안에는 문제가 따로 있었다.

“그게…….”

“영주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요?”

“네…….”

웬만하면 성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헤르트의 당부에 테사는 줄곧 성안에서 머무르던 차였다. 뱃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성 뒤에 있는 호수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그걸 헤르트가 허락할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즉흥적인 일정이라면 반기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테사, 벌써부터 너무 잡혀 살면 안 좋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무슨 옷을 입을지도 허락받게 될 걸요?”

“…….”

이미 아침마다 테사가 무슨 옷을 입을지 골라주다 못해 손수 입혀주는 헤르트였다. 테사는 자넷의 말에 슬쩍 입을 다물었다. 그것까지 말하면 자넷이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뭐, 뱃놀이가 갑자기 즉흥적으로 결정하기엔 좀 힘든 감이 있긴 하죠. 배도 준비해야 하고. 그러면 우리 소풍이라도 나가요. 성안에만 있으면 몸 쑤시잖아요. 호수 보면서 점심 먹는 건 어때요? 어차피 요즘 영주님도 바빠서 점심은 같이 안 먹을 때도 많다면서요.”

“그렇긴 해요…….”

자넷에게 말한 대로 헤르트는 이전보다 더욱 바빠졌다. 때문에 요즘 들어 헤르트와 점심을 함께 들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었다.

사실 저녁 이후에도 그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 늦은 밤까지 일하기 일쑤였다. 얼핏 듣기로는 영지의 일이 적잖이 늘어났다고 했다. 일할 수 있는 인재의 수가 적은 것도 한몫했다고.

그런 상황인 만큼 테사는 헤르트에게 귀찮게 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는 고작 소풍 하나에 그리 호들갑을 떠냐고 할 수 있겠지만, 테사에게는 소풍 하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내려야 하는 커다란 결정이었다.

“그래도 역시 성 밖으로는…….”

“테사가 말하기 어려우면 제가 할까요? 그러면 책임은 나한테 있는 거잖아요. 테사는 어쩔 수 없이 나 때문에 끌려가는 거라 부담도 덜 하고. 자, 진. 지금 각하께 가서 말 전해드리고 와. 우리 두 사람이 호숫가로 소풍 좀 다녀오겠다고.”

다기를 정리하는 진에게 자넷이 말을 던지자 테사가 안절부절못하며 진을 쳐다봤다. 그러나 명을 받은 진은 덤덤한 얼굴로 제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다녀올게요.”

“아니, 안 그래도…….”

“응, 잘 다녀와.”

자넷이 빠르게 진에게 눈짓하며 그녀를 방 밖으로 떠밀었다. 그리고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며 태평스럽게 입을 열었다.

“테사는 눈치를 너무 봐요. 이제 안 그래도 되는데.”

“……죄송해요.”

“사과도 그만하시구요.”

“죄송…….”

“또 그런다. 또.”

자넷이 테사를 타박하듯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테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렸다.

테사 본인도 자신의 행동이 남들에게 얼마나 답답하게 보이는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7년간 굳어버린 자세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그녀의 앞에서 유테르트 후작과 그의 아들인 페르데일 소후작이 사라졌어도 그녀가 받은 상처나 기억들은 아직 온전히 내면에 남아 있었다.

그 때 자넷이 아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웃어요, 테사.”

“…….”

“저도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은 웃고 살아야겠더라고요. 그래야 나중에 정말로 웃을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웃을 수 있거든요.”

테사는 고개를 들어 제 맞은편에 앉아있는 자넷을 쳐다봤다. 늘 경쾌하고 쾌활한 모습의 자넷은 잠시 사라지고 지난 세월을 되짚어보는 듯한 완숙한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인생이 참 신기해요. 진짜 모든 걸 놓아버렸을 때야말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거든요. 그걸 잡고 안 잡고는 자신의 몫이지만. 그러니까 웃어요, 테사.”

“…….”

“그러면 정말로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니까요. 따라서, 힘냅시다. 나는 테사가 행복했음 좋겠어요.”

다시 평소의 자넷으로 돌아온 그녀가 밝게 웃었다. 테사는 그런 자넷을 따라 희미하지만 그래도 조금 웃어 보였다.

정말로 자신이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욕심이 아니라, 당연하게 느껴지는 날이 왔으면…….

테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을 찌르는 듯한 밝은 햇빛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헤르트는 느닷없이 저를 찾아온 맞은편의 손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별로 달갑지 않다는 눈빛이 선명한데도 상대방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오히려 살가운 눈웃음을 지으며 넉살스럽게 먼저 침묵을 깨고 말까지 걸어왔다.

“경에게도 손해는 아닐 텐데요.”

“……제게 득인지 실인지는 귀부인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조금만 머리를 굴릴 줄 알면 당연히 득이죠.”

휠체어 위로 가지런히 모은 제 두 다리를 쳐다보며 엘레나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이 넓은 성과 영지는 경 홀로 운영하지 못합니다. 할 수 있더라도 곧 한계에 다다를 겁니다. 경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영지 운영에 대해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요. 경께서는 제 도움이 필요하실 겁니다. 지금도 많이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인력난이 첫 번째 문제겠죠.”

후작부인은 현재 헤르트에게 닥친 문제점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헤르트는 반평생을 검을 휘두르며 살아왔다. 그는 영지 운영에 필요한 학문들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보르웬 후작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그에게 셈에 능한 랑그를 붙여준 것이었다.

그런 부사관을 밖으로 내보냈으니 당연히 일처리에 애를 먹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랑그의 부재는 커다랗게 다가왔다.

더불어 본래 영주 옆에서 일을 거들어야 하는 가신들조차 상당수 이상이 몸을 빼내어 도망간 상태라 영지 운영의 많은 부분을 헤르트 홀로 감당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영지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 나름 재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작부인의 말대로 이대로라면 곧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

헤르트는 책상 아래에서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제게 협력을 구하기 위해 찾아왔으면서 자신을 도발하는 후작부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도 이름만 남겨진 권리를 내세워서 제게 뭐 하나 얻어가려는 부류일 게 뻔했다. 테사를 생각해서 무슨 일인가 듣고자 했던 자신이 멍청했다.

“부인께서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 이상은 제게 더 들을 가치가 없는 듯합니다.”

헤르트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엘레나는 그것 또한 예상했다는 듯 평온한 낯으로 입술을 떼었다.

“어쩌면 안주인으로서 배워야 할 덕목과 일들을 테사에게 가르쳐 줄 수도 있고요.”

“……누가 함부로―”

“경,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도움을 주고자 할 뿐이에요. 가만히 앉아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지난 세월만으로도 충분하거든요.”

결국 헤르트는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무슨 꿍꿍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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