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방금. 그러면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할까?”
“……굳이 안 그래도…….”
“나 없는 새에 별일은 없었고?”
발을 틈새로 집어넣어 문을 열며 헤르트가 물었다. 자리를 비운 건 반나절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마저도 테사가 무얼 했는지 궁금하다는 듯이 굴었다.
“그냥…… 부인들이랑…….”
“나 없다고 새 모이만큼 먹은 건 아니지?”
“아냐…….”
“그럼 됐어. 그 외는?”
“아…….”
테사는 후작 부인에게 글을 배우기로 했다는 것을 헤르트에게 말할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답하기를 망설이는 사이에 침대까지 도착한 헤르트가 테사를 침대 위로 사뿐히 내려주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테사의 이마에 손을 대어 열을 확인했다.
“다행히 열은 없고……. 식사 준비될 때까지 다시 자. 피곤해 보이네.”
“아냐, 정말로 괜찮은데…….”
저를 눕히려는 손길에 테사가 미약하게 손사래를 쳤다. 잠이라면 아까 말한 대로 다 깬 상태였다. 애당초 헤르트가 있는데 그 앞에서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전처럼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 자리에서 잠을 자야 할 사람은 헤르트 같았다. 그의 얼굴에는 오전에 봤을 때완 달리 피곤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테사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헤르트가 짐짓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피가 묻은 게 아직 남아 있나. 최대한 꼼꼼하게 다 씻어냈는데. 헤르트가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려던 차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을 향해 뻗었던 테사의 손과 부딪혔다.
“아……. 미, 미안해…….”
뒤늦게 제 행동을 깨달은 테사가 황급히 손을 내리면서 고개도 함께 수그렸다. 저도 모르게 헤르트의 얼굴에 손을 대려 한 것이었다.
예전이라면 이상할 것 없는 행위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다시 만난 뒤로 이런 식으로 먼저 헤르트에게 손을 대본 적이 없었던 테사였기에, 방금 전 제 행동에 가슴이 불안하게 콩닥거렸다.
그 때 낮은 한숨과 동시에 헤르트의 목소리가 테사의 머리 위로 들려왔다.
“……왜 사과를 해.”
“……그게…….”
“고개 들어.”
헤르트의 말에 테사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욱 가라앉은 듯한 얼굴의 헤르트가 테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사내는 다시 한번 더 낮은 숨을 내뱉더니 이윽고 자조적인 투로 뇌까렸다. 시발, 미쳤지.
“미친 게 분명해.”
커다란 손이 테사의 목덜미를 꽉 감싸 잡았다. 엄지손가락이 테사의 귓불과 귓바퀴를 살살 어루만졌다. 테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어두운 푸른빛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온몸에 힘이 반짝 들어갔다. 그의 눈은 욕망에 차 있었다.
“내가 너한테 제대로 미쳤나 보다.”
헤르트가 그대로 몸을 수그려 다급히 테사에게 입을 맞췄다. 고개가 살짝 젖혀지면서 벌어진 입술 틈을 가르고 들어가 과실처럼 달콤한 혀를 정신없이 옭아맸다.
그는 단내에 취해 허겁지겁 숨을 계속 불어넣었다. 그 작은 입이 힘겹게 그의 더운 숨결을 꼴깍거리며 받아 마시는 게 소름 끼치도록 기분이 좋았다.
머지않아 질척이는 소리와 가쁘게 숨 쉬는 소리가 그들을 에워쌌다.
헤르트는 갈증이 멈추지 않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여린 입 안을 마구 희롱하며 탐색했다. 뜨겁고 습한 안이 아랫구멍처럼 그를 단단히 홀리고 있었다.
이어 테사의 얇고 마른 손이 방황을 하다가 매달리듯이 그의 셔츠자락을 힘주어 잡아 쥐는 것이 느껴졌다. 헤르트는 점점 힘이 빠지고 있는 작은 몸뚱이를 가뿐히 뒤로 넘어트렸다.
“하아…….”
촉촉하게 붉어진 입술 새로 밭은 숨이 쏟아졌다. 헤르트는 테사를 침대에 눕힌 채 천천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흐트러진 진저빛 머리카락에선 고풍스런 장미유향이 풍겼고 혈색이 도는 피부는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가늘게 뜨인 눈매 틈으로는 에메랄드를 닮은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오롯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요정과도 같은 자태에 헤르트는 그새를 못 참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뭘 먹었길래 이렇게 달지? 아니, 마냥 달기보다는 가장 환상적인 맛만 골라 조합하여 만들어낸 초콜릿 같았다. 얼핏 들으면 개소리 같지만 이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애초에 이런 맛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헤르트는 이성을 놓은 사람처럼 테사의 입술과 혀를 빨고 섞고 핥았다.
“……그, 흣, 읍…….”
결국 한계까지 숨이 찬 테사가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고서야 헤르트는 입맞춤을 멈추고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테사는 숨을 헐떡이며, 아직도 저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헤르트를 저도 모르게 멍한 눈길로 응시했다.
아까부터 심장이 다른 의미로 쿵쿵 뛰어대었다. 온몸에는 열이 몰렸고 머리가 어지러웠으며 아랫배가 서서히 조여들었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제 입술과 입 안쪽은 얼얼하기까지 했다.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이런 간질거리는 느낌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으면서도 따스함에 몸이 부드럽게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꼭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처럼…….
테사는 자신이 생각하고서도 놀라 숨을 들이켰다. 사랑받는 것 같다니. 사랑을 받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녀는 이제 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정리해 주는 사내의 손길에 넋을 놓고 그를 쳐다봤다. 부쩍 다정해진 헤르트. 이따금씩 저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샌가 과거의 소년을 닮아가고 있었다.
‘헤르트는 정말로 나를…….’
테사는 이러면 안 된다고 자신을 다그치면서도 근래 설마설마 하며 생각하던 것을 떠올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애써 외면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맞다면 그간 헤르트의 행동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게 가능하기는 해?
그녀는 처음으로 헤르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선택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배신자를 좋아한다니, 그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잖아…….’
어느새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입맞춤을 남기는 헤르트의 행동에 테사는 숨을 죽였다.
불현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에게 직접 되물을 용기도, 완전히 외면할 용기도 없는 게 비겁하기까지 했다. 그저 무언가가 스스로 굴러올 때까지 가만히 있겠다는 심보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만에 하나 아니라면…….’
자신이 확인하려 드는 순간 그게 가당키는 하냐고 쳐다보는 헤르트의 시선이 절로 연상되었다.
‘날 7년간 지옥에 처넣은 배신자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장난해?’
그가 그리 말하는 것 같기도 한 상상에 테사는 숨이 막혔다. 실제 헤르트는 현재 그녀의 목과 뺨, 이마에 연신 입을 맞춰주고 있는데도.
테사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정말 싫어.’
또 다시 눈물이 울컥하고 차오르려 했다.
그러나 테사는 지금만큼은 절대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 혼자 생각하고 저 혼자 결론을 내리고 저 혼자 다시 울음이라니. 끔찍했다. 이렇게 변덕스럽게 정신이 널뛰는 여자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었다. 최대한 차분히 진정하려 노력했다.
그 때, 아까부터 테사의 허벅지를 찔러 오던 무언가가 부피를 늘렸다.
처음에 그 무언가가 헤르트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던 테사는 이내 그 물건의 진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무언가는 두둑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앞섬이었다.
테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신경 쓰지 마.”
테사의 반응에 뒤늦게 제 하반신의 상태를 깨달은 헤르트가 멋쩍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젠장. 이어 작게 욕설을 지껄인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시 이성을 놓았다고 그새 고개를 들다니.
‘몇 번 좆질 좀 했다고, 정신 못 차려서는.’
사실 조금 더 테사와 몸을 맞대고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에 헤르트는 서둘러 테사에게서 떨어졌다. 의사의 허락이 있기 전에는 어떻게든 참을 생각이었다.
빌어먹게도, 참는 입장에선 미칠 것 같았지만.
“아…….”
반면에 테사는 침대에서 물러나는 헤르트를 보며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고 보면 의사인 케니스의 반강제적인 권유로 몸을 섞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 수순으로 테사는 헤르트의 욕구가 상당히 쌓여 있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물을 빼지 않으면 남자의 그곳은 아프다고 들었다.
일전에 유테르트 후작의 말들을 상기하며 테사는 슬쩍 헤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해도…….”
“됐어,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하지만…….”
“넌 네 몸이나 우선으로 챙겨.”
말을 꺼내기 무섭게 단칼에 자르는 헤르트의 태도에 테사가 의기소침하여 고개를 비스듬하게 숙여 보였다.
그럼에도 테사는 이대로 헤르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헤르트가 자신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자신은 그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쓸모가 없어 폐만 끼치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도 싫었다.
테사는 뒤돌아서는 헤르트를 급히 붙잡았다.
“나, 나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
다른 일로 헤르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재 테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애석하게도 이런 것밖에 없었다. 그러니 본분이라도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테사 딴에는 나름 용기를 낸 것이었다.
“입으로……. 그게 싫으면 손으로라도…….”
“너…….”
테사를 돌아본 헤르트가 미간을 좁힌 채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욕구와 관련해서 눈치를 주었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괜찮다는데도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며 저를 잡을 이유는 없을 테니까.
한편으로는 흔들리는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테사.”
“……돕게 해줘.”
저 얼굴로 저 말을 한다면 그 누구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자신 외의 다른 이가 저런 얼굴을 보고, 저런 말을 듣는다면 찢어 죽여버릴 것이다. 저 얼굴을 볼 수 있는 자는 이제 오직 자신뿐이어야만 했다. 아니,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 이유로 헤르트는 남은 유테르트 후작의 시신도 분쇄해 버릴까 고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