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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52화 (52/138)

052화

실은 영지 안으로 숨어든 간자들을 처리하기 위함이었지만 그것까지 테사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성안에서, 제 부하들의 호위 아래 가정 안전하게 보호받을 예정이었으니까.

“아……. 응.”

“점심은 다른 부인들과 먹든지 해. 언질해 놓고 갈 테니까. 거르지만 마.”

전체적으로 테사의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헤르트가 말했다.

그는 마니에게 손짓해서 귀걸이를 가져오게 했다. 파란색의 사파이어귀걸이는 테사가 입고 있는 드레스와 잘 어울렸다. 헤르트는 이번에도 손수 테사의 귀에 귀걸이를 걸어주었다. 이를 보던 마니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너무 잘 어울리신다. 부인께서는 날로 아름다워지시는 것 같아요. 다른 나라 공주님 못지않으신 걸요?”

“마니, 과장이 너무…….”

“왜. 내가 볼 때도 괜찮은데, 뭘.”

머리나 얼굴은 하녀가 따로 치장해 줘야 할 테지만 헤르트가 보기에 테사는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원체 하얀 피부는 분을 바르지 않아도 뽀얗게 빛이 났고, 요새 잘 먹고 잘 쉬었던 덕분에 나름 살이 올라 옷의 태가 전보다 훨씬 살아 있었다.

저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과 한시도 쉬지 않고 꼼지락거리는 손만 아니라면 모든 게 완벽했다.

헤르트는 말없이 테사의 두 손을 꽉 잡아주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작은 손이 그의 손아귀에서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 갔다. 그는 테사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이걸 말하는 걸 잠시 잊었는데, 성 밖으로는 웬만하면 나가지 마.”

성 밖? 테사는 갑작스러운 헤르트의 말에 의문을 가졌지만 이번에도 물어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성 밖으로 나갈 일도, 나갈 생각도 없었다. 애당초 7년 동안 성에 갇혀 사는 통에 성내 길도 잘 모르는 신세였다.

“어디를 가든 호위 대동하고. 알았어?”

“응…….”

짐짓 엄한 말투에 테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테사는 헤르트가 지시해 놓은 대로 점심에는 부인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다. 갑작스러운 초대에도 후작부인과 자넷이 흔쾌히 응해주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면 드넓은 식당에서 무안하게 홀로 점심을 먹었으리라.

우려와는 달리 세 부인의 식사 자리에는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자넷이 끊임없이 화제를 던지며 대화를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후작부인과 함께 밥을 먹는다는 사실에 내심 긴장했던 테사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간간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서 세 여자는 테라스에서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이에 자넷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려 시선을 모았다. 너무 웃기지 않아요? 그녀의 짧은 말에 테사는 깊이 공감했다. 그녀의 생각에도 유테르트 후작이 살아 있을 적에는 절대 꿈도 꾸지 못할 광경이었다.

본부인과 후처 둘의 모임이라니.

분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좋아지고 있었다.

“새 영주께서 테사를 향한 정성이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자넷이 자신의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현재 머무는 별관에서의 식사도 잘 나오는 편이긴 했지만, 테사를 향한 새 영주의 관심이 아주 각별한지 오늘 식사에서는 진귀한 음식들이 끊이질 않았다. 덕분에 자넷은 평소보다 과식하고 말았다. 진짜로 임신을 한 것도 아닌데 식탁 하나를 가득 채운 음식들을 보자 식탐이 솟아난 까닭이었다.

“이렇게 잘 나오는 줄 알았으면 종종 초대해 달라고 할 걸.”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농담이에요, 농담! 그리고 제가 아무 데나 막 끼어들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거든요?”

찡긋 웃는 자넷을 향해 테사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자넷이 자신과 헤르트의 사이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자신과 헤르트의 식사 자리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헤르트가 다정한 건 사실이었다. 마음 속 한구석에서 욕심이 자꾸 기어나오려고 할 정도로 헤르트는 몹시 잘해주었다. 하지만 식사 시간에는 그 다정함이 조금 궤를 달리했다.

그는 식사하는 내내 테사가 무엇을 먹는지, 얼마나 먹는지, 그런 것들을 일일이 지켜봤다. 그 시선이 얼마나 뜨거운지 테사는 식사 시간마다 목이 메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평소보다 적게 먹는가 싶으면 그는 무서울 정도로 그녀의 접시에 음식을 이것저것 담아주기 바빴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 먹을 때까지 다시 지켜보았다.

‘헤르트는 그냥 날 살찌우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테사는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가 이내 자넷의 부푼 배를 보고 식사 시간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러고 보면 자넷은…… 입덧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임신을 하면 다들 입덧으로 고생한다고 하던데.”

“네? 아……. 입덧이요? 어……. 축복받은 거죠. 그렇죠, 축복받았어요. 제가 워낙 축복을 잘 받아서요.”

“아……. 저는 임신하면 다 입덧을 심하게 하는 줄 알았어요.”

다들 임신을 하면 입덧에 대해 가장 많이 얘기하니까……. 테사의 중얼거림에 자넷이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사람마다 다 체질이 다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후작부인?”

자넷이 동의를 구하듯 아까부터 줄곧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엘레나를 쳐다봤다. 엘레나는 그런 자넷을 힐긋 바라보고는 이내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뎀 부인의 말이 맞아요. 사람마다 다 다른 법이죠. 저는 심했지만요.”

덤덤하게 아무렇지도 않는 투로 엘레나가 말했다. 그러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생각은 해봤어요?”

“……네?”

“글이요.”

후작부인의 말에 테사가 아, 하고 짧게 탄식을 흘렸다. 글을 배우지 않겠냐는 제안. 그때 한 번 꺼내고 만 얘기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물어오니 기분이 얼떨떨했다. 그 옆에서 자넷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글? 둘이서 무슨 글쓰기 모임이라도 해요?”

“글을 배워두면 쓸 곳이 아주 많아요. 나중에 분명 두고두고 쓸 일이 있을 거예요. 잘 생각해 봐요, 테사.”

엘레나가 자넷의 물음은 무시한 채 테사에게 재차 말했다. 그 때 자넷이 조금 커진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

“어? 뭐야. 테사, 혹시 글 몰라요?”

“…….”

머지않아 테사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 자리에 글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창피했다. 테사의 반응에 자넷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런 자넷에게 엘레나가 그녀만 들릴 정도의 소리로 혀를 차주고는 테사의 접시 위로 크림이 잔뜩 올라간 빵을 올려주었다.

“테사, 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에요. 처음부터 글을 떼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맞아요, 테사! 저도 글 늦게 배운 편이에요. 부끄러워할 필요는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후작부인의 말대로 글 한 번 배워두면 얼마나 요긴한데요. 나중에 안주인으로 쓸 일이 많을 걸요?”

자넷이 옆에서 후작부인의 말을 열심히 거들었다. 하지만 테사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신이 글을 배워도 되는 것일까? 쓸 곳이 많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는 영 쓸 데가 없었다. 진짜 귀족도 아닐뿐더러, 자신은 이곳에서조차 하는 일이 없지 않은가. 자넷이 예시로 든 안주인이 될 일은 더더욱 없었다.

테사가 입을 다물고 망설이자 자넷은 안 되겠다는 듯 쐐기를 박았다.

“테사가 직접 쓴 편지 받고 싶은데, 그건 이유가 안 될까요?”

“……편지요?”

“네, 편지가 있으면 여길 나가서도 두고두고 테사를 기억할 수 있잖아요. 나중에 서로 안부도 주고받을 수 있고. 그러니까 나는 테사가 글 배웠으면 좋겠는데.”

“……자넷, 성을 나갈 생각이에요?”

여길 나간다는 자넷의 말에 테사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자넷이 멋쩍게 웃으며 잠시 후작부인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윽고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는 이곳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아서요.”

“왜, 왜요……? 왜 나가야 할 것 같은데요?”

2년 전, 유테르트가에 들어오고서부터 자넷은 테사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가장 먼저 테사에게 학대에 대해 물어봐 준 사람이기도 했고, 그녀 대신 소후작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그래서 테사는 자넷이 이곳을 나간다고 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새 영주께선 이곳에서 머물러도 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제가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기는 좀 그렇잖아요. 생각해 보면 막달도 다가오고 있는데 미리 나가서 준비해야죠.”

“아…….”

자넷의 말에 테사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내렸다. 자넷의 말대로, 그녀가 이곳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헤르트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전 영주의 부인들은 진즉에 성을 나가야만 했다.

“저도 아쉬움이 큰데, 언제까지고 여기에 마냥 있을 수는 없는 법이라서……. 미안해요, 테사. 저번에는 생각 없다고 말해 놓고 이제 와서 말을 바꿔서.”

“아니에요…….”

“그러니까 테사가 글 배워서 저한테 편지 써주면 안 될까요?”

“하지만 저는…….”

테사는 다시금 주저하자 이번에는 엘레나가 나서서 말을 보탰다.

“잘 가르쳐 줄게요, 테사. 막상 배우면 그리 어렵지 않답니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잘 알려주는 사람은 이 성에 드물 텐데.”

후작부인까지 거들자 테사는 더욱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넷은 그녀에게 잘해주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었고, 테사는 웬만해서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편지를 쓰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으니까.

“매일 하루에 한 시간씩 꾸준히 배우기만 해도 간단한 편지 정도는 쓸 수 있을 거예요. 테사는 똑똑하잖아요.”

“그래요. 조금씩 배워봐요, 테사. 어려우면 그만둬도 돼요. 한 번만? 네? 자넷 소원!”

어느새 자넷이 테사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애원하듯 흔들었다. 이에 테사는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역시 테사가 최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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