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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51화 (51/138)

051화

그 이후로 헤르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자신이 망가진 것은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그래도 애써 아닌 척을 했다. 테사를 만나기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내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테사도 정상이 아니라고?

그럼 뭐가 남는 건데.

적어도 한 명은 제정신이었어야 했다. 그래야 이 빌어먹을 저울의 추가 맞는 게 되니까. 둘 다 얻은 것도 없이 미쳐 있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서로를 잃어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되면 누가 더 불행한가에 대한 대결을 하는 꼴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말 쓸모없는 짓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체 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헤르트는 테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했던 말을 곱씹으며 힘겹게 숨을 토해 냈다. 모든 것이 어이가 없어 신물이 나려고 했다. 애써 외면했던 것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잊을 수만 있다면 그냥 잊어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7년이란 시간이 허공에 떠 분해된 것 같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배신의 끝을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헤르트는 이젠 테사를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하는 자신이 딱하면서도 병신같이 느껴졌다. 이런 꼴을 보자고 그 지옥 속에서 살아 돌아왔나.

이제 어떡해야 하지?

그 순간 헤르트의 긴 상념을 깨우는 이가 있었다.

부사관인 랑그였다.

“경,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랑그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촛불 하나 켜지 않고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는 제 상관을 보며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머릿속 경보가 위험을 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주춤 뒤로 발을 뺐다.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오는 게…….”

“마침 잘 왔어. 제프리, 네가 해야 할 일이 방금 생긴 것 같거든.”

“……저는 지금도 바쁩니다만,”

“다 집어치우고, 내 뒤 좀 캐 와.”

헤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때문에 랑그가 당황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평소에 내 과거 궁금해 했잖아?”

“아니, 그건…….”

“그 빌어먹을 여자는 못 믿겠어서 그래.”

“그래도 그거랑 제가 경의 과거를 캐는 거랑…….”

“내가 허락한다잖아.”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은 듯한 상관의 목소리에 랑그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가는 그에게 멱살이나 잡힐 것 같았다. 아씨, 정말 미치겠네. 랑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난감했다.

“경, 잠시 진정하시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아니, 제대로 확인을 좀 해야겠어.”

헤르트는 자신이 알지 못한 일이 더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테사의 입에서 듣지 못한다면, 자신이 직접 알아보면 그만이었다. 그것까지 다 알고 난 후에, 앞으로의 자신과 테사에 대한 처분을 생각해도 충분할 터였다.

“걔가 어떤 식으로 날 팔아넘겼는지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할 거야.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그렇긴 하지만…….”

랑그 또한 테사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면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부인께서 정말로 상관을 팔아넘겼다고? 하지만 7년 전, 두 사람의 과거가 아예 통째로 삭제되는 바람에 확인할 길이 없어 그쯤에서 생각하기를 멈추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서 내 과거 좀 샅샅이 캐봐.”

“경, 그게 그리 쉽게 되는 일이…….”

“닥치고 하라면 해.”

금방이라도 저를 찢어버릴 듯한 상관의 음성에 랑그는 닥치고 하기로 했다.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상관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

“아가씨, 제프리 경이 아무래도 자리를 오래 비우실 건가 봐요.”

“뭐?”

진의 말에 얼굴에 오이를 얇게 썰어 붙이고 누워 있던 자넷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때문에 그녀의 얼굴에서 오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앗, 내 오이! 자넷이 황급하게 떨어진 오이를 주워 들었다.

진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새 오이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까 성에 잠시 갔다 왔는데, 급하게 채비를 준비해서 나가시더라고요.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아니, 걔는 지금 이 상황에 자리를 비우면 어쩌자는 거야?”

“새 영주님의 명일 수도 있잖아요. 여기 새 거요.”

“아니, 그래도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자리를 막 비워? 내가 분명히 성에 딱 붙어서, 앗! 차가워라.”

떨어진 오이를 버리고 새 오이를 얼굴에 붙이며 자넷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이 부산스럽게 튀어나온 자넷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대꾸했다.

“제프리 경이 뭘 어떻게 할 수가 있나요. 그분도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처지에. 그나저나 어떡하죠. 제프리 경이 있어야 일이 수월해질 텐데.”

“내 말이 그거야. 나는 성에 들어갈 명분도 없다구. 내 처소는 별관이 최대인데……. 흐음, 근데 왜 갑자기 제프리를 바깥으로 내보낸 거지?”

랑그 제프리는 헤르트 샤인의 우수한 수하 중 한 명이었다. 특히 정보를 수집하고 전략을 세우는 데 있어서 빠져선 안 되는 자였다.

앞으로 최소 한 달 이상은 이곳에서 머물며 영지를 운영해야 하는 와중에 갑자기 랑그 제프리를 밖으로 내보낸다? 이상한 일이었다.

“글쎄요. 왜인지는 샤인 경이랑 제프리 경만 알겠죠.”

자넷의 얼굴에 새 오이를 마저 붙여주며 진이 가볍게 말했다. 자넷은 다시 침대에 누우며 새로 붙인 오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작게 입을 오므려 중얼거렸다.

“흐음, 아무래도 뭔가 불안하단 말이지…….”

***

시간이 흘러 후작부인의 거처가 성내로 바뀐 날에도 테사는 헤르트가 보는 앞에서 케니스에게 진찰을 받았다. 케니스는 안색이 전보다 더욱 밝아진 테사를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많이 좋아지셨어요, 부인.”

“아……. 그런가요…….”

“네, 체중도 조금 더 늘으셨고요. 이건 몸이 회복하고 있다는 아주 좋은 징조예요. 그래도 무리한 일이나 과도한 운동은 하지 마세요. 완전히 낫기 전에는 되도록 삼가시는 게 좋아요.”

그리 말하면서 케니스는 뒤에 서 있는 헤르트를 힐끔 쳐다봤다. 이에 테사가 멋쩍게 웃었다.

케니스의 우려와는 다르게 헤르트는 여전히 테사에게 관계를 요구하지 않았다. 일전에 그가 말한 대로, 다 낫기 전에는 건드리지 않을 작정인 듯싶었다.

그 때문에 테사는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선생은 다 끝났으면 이만 나가 보지. 자네는 옷을 준비해 주고.”

헤르트가 케니스와 마니에게 지시하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척척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진기를 챙겨 케니스가 방에서 물러나고 마니는 오늘 테사가 입을 옷을 가지고 왔다. 이전에 자넷의 도움을 받아 맞췄던 옷 중 하나로, 푸른색 원단에 검은색 레이스가 적절하게 섞여 지어진 드레스였다.

“이리 와.”

헤르트는 능숙한 손길로 테사의 잠옷을 벗겨내고서 그 위에 속치마와 드레스를 입히기 시작했다. 테사는 헤르트의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마니가 옆에서 거들기는 했지만 그가 직접 옷을 입혀주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그의 시중을 받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테사는 헤르트의 손길에 의해 옷을 갈아입는 자신이 어색했다. 그가 이런 일까지 하게 내버려 둬도 되는지도 의문이었다.

본인은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고 말하지만, 그 어느 영주가 귀부인이 옷을 갈아입는 데 직접 손을 보탠단 말인가. 그건 듣도 보도 못 한 일이었다.

‘내가 헤르트의 평판을 떨어트리는 것 같아…….’

다시는 배신하지 말라고 약속을 운운한 날부터, 헤르트는 테사를 더욱 깨지기 쉬운 도자기 다루는 것마냥 조심스레 대하기 시작했다.

테사는 그것이 몹시 불편했다. 시중받아야 하는 남자가 오히려 별것도 아닌 귀족 후처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 어찌 불편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자신을 요부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었다.

“많이 조여?”

“……아니, 괜찮아.”

“그럼 이 정도는?”

“괜찮은 것 같은데…….”

“넌 너무 말랐어.”

헤르트가 테사의 등 뒤의 줄을 매듭 지으며 중얼거렸다. 최대한 졸라 매었는데도 드레스의 품이 넉넉하게 남은 상태였다. 의사는 체중이 늘었다고 했지만 헤르트가 보기엔 테사는 아직도 너무 가냘팠다. 그동안 그렇게 먹였는데도 그대로인 것 같았다.

“먹고 싶은 건 없어? 주방장에게 말해서 만들어보라 할게.”

“……괜찮아. 이미 충분히 먹고 있는 걸.”

“내가 먹는 양의 반도 못 먹으면서.”

“그건…….”

네가 많이 먹는 건데……. 테사는 차마 마지막 말은 내뱉지 못하고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었다. 보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헤르트와 매 끼니를 함께하면서 테사가 깨달은 것은, 헤르트의 먹성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고아원에 있을 때는 늘 정해진 양의 식사만 나왔기에 몰랐던 사실이기도 했다.

“오늘 점심은 같이 못 먹을지도 몰라.”

앞섶에 있는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며 헤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테사는 왜 같이 못 먹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무엇 때문인지는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다. 헤르트는 영주였고 영주가 해야 하는 일은 상당했기에 이번에도 그와 관련된 일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어느 순간부터 그의 부사관이 보이지 않았고, 헤르트가 부쩍 바빠진 것이 느껴졌다. 물론 그는 어떻게든 테사와 꼬박꼬박 식사를 함께하려 하는 것 같았지만.

그러니 바쁜 일이 생긴 거라 생각하여 테사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다만 헤르트의 입장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왜인지는 안 물어봐?”

“……어?”

“왜 점심 같이 못 먹는지 안 궁금하냐고.”

빈정이 상한 듯 헤르트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테사는 당황하여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물어봤어야 했나? 하지만 그래도 되는지 몰랐는데……. 테사가 우물쭈물거리자 이윽고 헤르트의 입가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마지막 단추를 구멍에 꿰며 말했다.

“별일 아니야. 수색차 멀리 나가봐야 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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