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해서 자네에게 부탁 좀 하지.”
“아이고, 어르신.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 선에서 최대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남자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남자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상석을 차지하던 노년의 신사가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돌아가자 홀로 남게 된 남자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에 엄지손톱을 이로 마구 뜯어냈다.
‘제길, 그 살인귀가 그때 팔아넘겼던 놈이라니!’
남자는 급히 아랫것을 불러 누군가를 불러오게 했다. 얼마 뒤 뾰족구두를 신은 한 여자가 몹시 짜증을 내며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 물량 확인하고 마무리 지으려면 눈 코 뜰 새도 없이 바쁜 거 몰라? 갑자기 이렇게 불러내면 어떡하니? 중요한 일 아니기만 해, 확 그냥―”
“우린 좆 됐어!”
남자가 여자를 향해 꽥 소리를 질렀다.
“뭐야, 안스한테 통수라도 맞았니? 그 새끼가 이제 일 안 한대?”
“이, 미친……. 그게 아니라고! 너 7년 전에 기억나?”
“칠……. 언제?”
“그 고아원 말이야!”
남자의 외침에 여자가 고개를 주억였다. 고아원이라 하면, 그녀가 한때 원장으로 있었던 피츠럴드 고아원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고아원이 왜? 그 고아원은 높으신 분의 뜻에 따라 7년 전에 통째로 사라진 상태였다.
“그 남자애 기억하냐고! 붉은 머리 여자애랑 맨날 붙어 다녔다는 애!”
“아니, 고아원에 애들이 한두 명이야? 그렇게 말하면……. 아, 혹시 그 남작영애를 대신해서 팔려간 애 말하는 거니? 남자애는 검투사노예로 팔려간…….”
“그래, 그래! 걔네들! 우리가 같이 팔아넘겼잖아!”
“근데 걔네들이 왜?”
“그 남자애가 지금 그 미친 후작의 개라잖아!”
잠시 방 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여자는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눈을 껌벅였다. 그게 무슨……. 하지만 남자는 여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한번 소리쳤다.
“우린 좆 됐어!”
남자는 절망했다. 반평생 이 바닥에서 일해 왔지만 이토록 재수 없는 일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검 좀 쓴다고는 들었지만 당시 그놈은 열일곱 살 소년에 불과했다. 그래서 높으신 분의 명으로 검투사노예로 팔아버리는 서류를 작성하면서도 이놈 금방 죽게 생겼다며 내심 불쌍하게 여겼다. 보통 그런 식으로 투기장에 팔려간 놈들은 끽해 봤자 1년을 못 버티고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애초에 애송이 따위가 투기장에서 살아남아서 후작의 개가 됐다는 게 말이 돼? 이건 심각하게 뭔가 잘못됐다고!’
남자는 엄지손톱을 이로 물어뜯었다. 당시 의뢰인이었던 세테비얀 남작이 갑자기 비명횡사하는 덕분에 자신이 그 일을 처리했다는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후작의 개가 된 그놈이 언제든지 마음먹고 파헤치기 시작하면 자신의 범행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우린 그 자식 손에 죽게 될 거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여자가 남자의 중얼거림에 일침을 놓았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 몰라? 하지만 그리 말하면서도 불안한 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남자와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여자는 구두코로 바닥을 딱딱 쳤다.
그러다 그녀는 생각났다는 듯 급히 말했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일러. 정말 그 후작의 개가 우리가 팔아넘겼던 남자애가 맞다면…… 우리가 했다는 걸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아. 그렇지 않으면 지금 우리가 멀쩡할 리가 없잖아.”
“그러면 뭐 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남자가 다시금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아까 전 그를 찾아온 사람은 누군가의 대리인으로 헤르트 샤인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헤르트 샤인이 검투사노예 출신이라는 점을 알고서 이쪽까지 발걸음한 것으로 보였다. 현재 남자는 불법적으로 사노예를 유통하고 처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의 손을 거쳐 간 노예 중에는 검투사노예도 몇 있었다.
“조용히 좀 해봐.”
여자가 정신 사납다는 듯이 남자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뭐 좋은 수라도 생각났어?”
“기다려봐. 지금 생각 중이니까……. 당시에 걔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팔아넘겼지?”
“같이 다니던 여자애가 배신한 것처럼 만들었지.”
남자의 말에 여자가 눈을 번득였다.
“그래, 그 여자애! 걔는 어디로 팔려갔는데?”
“세테비얀 남작 밑으로 들어가서…… 남작영애 대신 대 귀족 후처로 들어갔지.”
“그거네. 그 여자애를 찾아야 해, 그놈이 그 여자애를 찾기 전에. 그래야 우리가 살아.”
“그게 무슨 소리야?”
여자가 남자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이 등신 같은 놈아! 머리가 안 굴러가니? 아파서 그 자리에 튀어 오르는 남자를 보며 여자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 여자애가 그놈한테 다 불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서 처리해야 할 거 아냐.”
“뭐? 죽이기라도 하려고?”
남자가 정강이를 문지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남자에게 여자가 단호히 대꾸했다.
“그럼 뭐 좋은 수 있어?”
***
‘각하……. 부인께서는 오래된 방치와 반복된 학대로 인하여 심신이 많이 위축된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일전에 절대적인 안정과 휴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여 말씀드린 겁니다.’
헤르트는 테사를 방으로 데려다주고 그 길로 의사를 찾아갔다. 자문이 필요했다. 현재 테사의 상태에 대한 전문가의 자세하고 상세한 의견이.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3자인 제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부인께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시간을 갖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지금 당장 그분을 다그쳐 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예요. 그만큼 현재 부인의 상태는 상당히 불안정합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깨진 유리조각을 겨우 붙여 연명하고 있는 꼴이에요.’
테사의 학대에 대해 묻자 의사는 경고를 하듯 매섭게 조언했다. 절대로 그녀를 재촉하지도 다그치지도 말라고. 헤르트는 그 말에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요 며칠간 테사의 상태가 정상적인 범주를 지나쳤다는 것은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그 정도로까지 망가져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애당초 학대를 당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제게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언제 한 번 부인을 가만히 지켜보세요. 금방 그분의 문제점이 드러날 겁니다. 그러니 각하께 부인의 주치의로서 간곡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부인을 조금만 배려해 주세요.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치료와 휴식을 병행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습니다.’
헤르트는 차마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힘겹게 떼어 의사에게 물었다.
‘……얼마나.’
‘예?’
‘좋아지기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그건…… 아직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속병은 대개 본인의 의지에 따라 치료기간이 달라지고 상처가 깊을수록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초기치료가 중요합니다. 환자에게 편안한 환경을 제공해야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할 테니까요.’
의사의 그 말은 꼭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때문에 헤르트는 잠시 눈앞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테사와 자신의 재회가 어땠더라.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억지로 옷을 들추어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부인께서는 지속적인 학대를 받아오셨습니다. 부인의 치료를 원하신다면 인내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시발.
헤르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모든 것이 꼬여버렸다. 자신은 이런 상황을 원한 적이 없었다. 그저 테사만 다시 만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하고 아득바득 살아남아서 여기에 왔건만…….
학대라니. 치료가 필요하다니.
사람을 무슨 정신병자 취급…….
헤르트는 지금까지 자신이 테사에게 했던 짓들 또한 떠올렸다. 힘으로 잡아끌고,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하나같이 테사를 자극하고 그녀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던 행동들이었다. 빌어먹을. 헤르트는 욕을 지껄이며 손을 말아 쥐었다. 아까부터 생겨난 가슴 통증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그 상황에서 뭘 했어야 했는데.’
테사가 입을 꾹 다물고 제 몸으로 죄를 갚겠다고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나? 어떻게든 악착같이 이성을 챙겨서 7년 만에 만난 배신자의 태도에 대해 분석했어야 했다고?
‘시발, 그게 뭐야. 나도 엄연한 피해자인데. 왜 내가…….’
분노와 동시에 억울함이 밀려 왔다. 자신은 이런 상황을 바란 적 없었다. 처음부터 해명을 원했을 뿐이다. 아니, 애당초 그녀가 말만 똑바로 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일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헤르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제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네가 사람을 죽이고 다니더니 이제는 제대로 생각도 못 하는 구나.’
지금 누구를 탓하고 있는 거야.
몇 년간 지속적인 학대를 당해왔다잖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그 누구라도 반항하지 못하고 학대당해 오면 마음이고 뭐고 다 꺾일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말 못 할 만하잖아.
그리고 이제 약속도 했잖아.
다시는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까지 했으면 된 거지. 충분하잖아. 이제부터라도 새로 시작하면…….
‘그러면 나는?’
지난 내 삶은 누가 이해해 주고 보상해 주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의문에 헤르트는 괴로워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진창에서 구를 대로 굴러 반쯤 이성을 놓다시피 살았던 날들이 떠올랐다.
원치 않게 검투사노예가 되어 투기장 주인을 죽이고, 악명 높은 바스테첸의 죄수가 되어 전쟁터에서 화살받이가 되었던 지난날들. 매순간이 끔찍한 지옥이었다.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았다. 매일 그가 닿는 곳마다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죽음은 언제든지 그의 목을 뜯어먹을 것처럼 똬리를 틀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그의 주변 사람들을 하나 둘 잡아먹었다. 이 다음은 너야. 죽음이 그리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감흥 없이 사람을 죽이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잔혹한 학살자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