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순간적으로 테사의 얼굴이 발개지면서 가슴이 콩닥거렸다.
자신이 만들었지만, 그래서 더욱 쿠키의 맛에 자신 없었던 그녀였다. 함께 구웠던 후작 부인의 것보다 모양이 못났기도 했고. 그런데 헤르트가 맛있다고 해주니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쿠키는 죄다 쏟아졌지만 보상받는 것 같았다.
“근데 왜 이렇게 많이 만들었어? 과자는 입에도 안 대면서.”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가락 끝으로 훔치며 헤르트가 물었다. 마지막 말은 거의 툴툴거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나눠주려고…….”
“누구한테?”
“자넷이랑 마니…….”
“두 사람한테 줄 양치곤 너무 많은데.”
헤르트가 바구니 속에 남은 쿠키와 바닥에 흩어져 있는 쿠키를 번갈아 보며 대꾸했다. 이에 테사가 잠시 우물쭈물거리다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게…… 과, 과자 답례로…….”
“과자?”
헤르트가 테사를 돌아봤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애꿎은 말고삐만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헤르트는 나지막이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제 손에 쥐어진 바구니를 바라봤다. 이게 제 과자에 대한 답례라니.
무심코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헤르트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거 무효야.”
“……무―”
“다시 구워줘, 제대로. 포장까지 해서.”
바구니 속 쿠키 조각 하나를 더 집어 입 안에 넣으며 헤르트가 단호히 말했다. 이번에 먹은 쿠키는 아까보다 조금 더 단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
휠체어에 앉아 엘레나는 첨탑과 조금씩 멀어져 가는 남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우려했던 것보다 괜찮아 보였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엘레나는 휠체어를 돌려 탁자 앞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하녀가 편지지와 깃펜을 준비하고 있었다.
“네가 보기에도 두 사람, 괜찮아 보이지?”
자연스럽게 하녀에게서 깃펜을 건네받은 엘레나가 편지지 앞에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 네. 하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갈색 봉투에서 실링왁스를 꺼내 유리그릇 위에 얹었다. 미리 열기로 달구어놓았던 유리그릇에 왁스가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만 유지해 주면 좋을 텐데.”
“걱정 마세요, 두 사람은 잘될 거예요.”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이 작은 평화가 오래가지 않겠니.”
엘레나는 유려한 필기체로 막힘없이 편지지에 글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수신인의 이름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 편지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편지를 보내는 일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1년 전부터 꾸준하게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너와도 헤어질 날이 머지않았구나.”
“…….”
하녀가 말없이 작은 스푼으로 모두 녹아내린 왁스를 휘휘 휘저었다. 엘레나는 대답이 없는 하녀를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고마웠다. 네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이제 성으로 돌아가면…….”
“조심하세요. 성에는 보는 눈들이 많으니까.”
마지막 문장까지 다 적은 엘레나가 하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녀는 늘 그렇듯이 덤덤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첩자들은 다 걸러낸 거 아니었니?”
“슬슬 다시 몰려들 거예요. 유테르트 후작가는 그냥 놓기에는 알짜배기니까요. 아무리 사전에 차단했어도 모든 자를 막아낼 수는 없어요. 앞서 벌인 일도 있고. 첩자들이 서서히 하나 둘 숨어들어 올 거예요. 그러니 조심하셔야 해요.”
지금까지는 보르웬 후작의 비호 아래 최대한 조용히 일을 처리해 왔지만 결국 한계는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이 커다란 영지를 손에 넣는 데에 있어서,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대 귀족가 중 하나가 영지쟁탈전으로 인하여 그 명맥이 끊기게 생긴 마당이다. 왕도에 있는 후작의 반대 세력들은 그걸 가만히 두고만 볼 자들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세력의 수장들은 유테르트 영지의 일을 전해 듣고 수를 쓰기 시작했을 터였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후작에게 권력을 더 실어주는 셈이 되니까.
고로 이제부터는 방어선을 유지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주인님께서 다 준비해 놓으셨을 테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으니까요. 그 예외를 생각해야죠. 저도 최대한 옆에서 걸러내도록 할게요. 하지만…….”
“알아, 안단다. 조심할 거야.”
“그래도 되도록이면 그녀에게 붙어 있으시는 게 좋겠어요.”
엘레나가 접어준 편지지를 하녀가 받아 그 위에 왁스를 부었다. 왁스를 도장으로 누르자 문양이 생기면서 편지가 밀봉되었다. 하녀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편지를 내려다보며 이번에도 덤덤하게 말했다.
“여차하면 그녀를 이용하시고요.”
***
두 사람은 곧장 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헤르트가 테사가 탄 말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테사는 아까보다 더 멀어지고 있는 성과 헤르트를 번갈아 바라보다 조용히 침을 삼켰다. 더불어 식사 시간도 아닌데 그가 자신을 찾아온 것도 의문이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걸까.
헤르트는 숲의 입구에 다다르고 나서야 말을 멈춰 세웠다. 테사는 숲 안으로 이어지는 인적이 드문 오솔길을 바라봤다. 여기는 왜……? 하지만 의문을 내뱉기도 전에 헤르트에게 덥석 들려져 아래로 내려졌다.
영문을 몰라 하는 테사에게 헤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의사가 그러는데, 산책이 네게 도움이 된다 그래서.”
자. 헤르트가 잡으라는 식으로 테사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테사는 그런 사내의 손을 선뜻 잡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헤르트는 마음 한쪽이 불편해졌다. 예전에는 자신이 내밀지 않아도 먼저 와서 냉큼 잡았으면서…….
그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잡아. 네가 넘어지면 너도 나도 골치 아파.”
“아…….”
마지못해 제 손을 잡는 여자의 손을, 헤르트가 힘을 주어 꽉 잡아 이끌었다. 작고 여린 손이 손바닥 안으로 들어차자 그제야 불편해졌던 마음이 안심이 되었다. 테사가 학대당한 걸 알게 된 뒤로 그녀가 옆에 있어도 꼭 어딘가 살이 맞닿아야 한숨을 놓을 수가 있었다.
‘아직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통 모르겠고…….’
헤르트는 제 가슴께에 겨우 오는 테사를 쳐다봤다. 밝았던 소녀는 온데간데없고 버석하게 메마른 여자만 그의 앞에 있었다.
7년 동안 진창을 굴렀던 자신도 상당히 많이 변했지만 테사는 외양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때문에 예전과 다른 의미로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냇가에 아이를 내놓은 기분이 이런 건가.’
헤르트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헤르트가 불현듯 테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금만 움직이면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테사가 헤르트를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이 조금은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너와 나 사이에는 대화가 필요해.”
사내의 곧은 시선에 테사가 숨을 들이켰다. 대화라니……. 배신자와 할 대화가 어디 있다고. 그는 아직도 제게서 배신한 이유를 듣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걸까?
테사의 몸이 서서히 굳으며 고개가 수그려졌다. 그러다 이어지는 헤르트의 말에 우뚝 멈췄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
“그 새끼한테 두드려 맞아온 거. 네 등 상처 말이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말할 수 있었잖아.”
반쯤 벌어져 있던 테사의 입이 잠시 벙긋거리다 다시 다물렸다. 테사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급격하게 목이 조여 왔다. 헤르트의 입에서 맞아왔다와 등 상처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자 심장이 마구잡이로 쿵쾅쿵쾅 뛰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등의 상처와 흉터가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 모른 척해 주기를 바랐는데…….’
테사는 헤르트가 제 학대에 대해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기를 바랐다. 하다못해, 제 앞에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이유야 많았다. 필시 헤르트는 자신을 동정할 터였고, 테사는 그것이 싫었다. 배신자 주제에게 동정을 받는 것은 가당치 않았으니까. 또한 헤르트에게 폐를 끼치는 기분이기도 했다.
이 유테르트 성에서 여섯 번째 부인이 소후작에게 학대당하는 것은 모든 이의 침묵 아래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다.
이곳의 모두가 그녀가 학대당한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만약 입 밖에 내어 말하면, 아들이 아버지의 부인을 때리는 파렴치한 작태를 인정하는 꼴이었으니까. 물론 누가 봐도 눈 가리고 아웅이었지만 직접 인정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선명했다.
특히 유테르트 후작은 체면치레를 중요시했기에, 성의 모든 이가 테사가 처한 상황을 모르는 척 덮으려고만 했다. 테사도 자신이 소후작에게 잔인하게 학대당한다는 것에 입을 다물었다.
웃기게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자,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테사도 소후작에게 맞지 않는 날에는 학대받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사실 그러지 않으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이는 나름대로 그녀만의 방식으로 얻은 작은 평화였다.
그래서 테사는 헤르트도 말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소리 내어 직접 말하는 순간, 망각으로 얻은 볼품없는 평화는 깨지고 테사 유테르트는 ‘배신자면서 멍청하게도 학대까지 당한 모자란 년’이 되는 것이기에.
이것 또한 눈 가리고 아웅이었지만 테사는 헤르트에게 온전히 제 바닥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냐고 제게 물어보면…….
‘도와주세요!’
그 순간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테사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심장을 온몸으로 느끼며 주춤 뒷걸음질을 했다. 제 몸을 덮는 사내의 커다란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네가 처음에 말만 했더라도 내가 널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때보다는 좀 더 배려했을 거라고.”
“……”
“사실 나는 아직 네가 나를 배신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나한테 말해 봐. 왜…….”
“놔, 놔주세요.”
결국 테사는 참지 못하고 몸을 떨며 헤르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테사, 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