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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44화 (44/138)

044화

‘기대하지 마. 네 주제를 알아야지…….’

이럴수록 해이해진 정신을 바짝 다잡아야 한다. 자신은 여전히 배신자에, 죽어버린 늙은 후작의 후처일 뿐이고, 헤르트는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었다.

자신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 이물질 같은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 지금처럼 헤르트의 발목을 잡는 일 없게 조심해야 했다.

테사는 반사적으로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뒤척이며 오랫동안 잠을 설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한 인영을 발견했다.

사내가 탁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다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나 때문에 깼어? 최대한 조용히 들어온 건데.”

“아 아니……. 어차피 중간에 잠이 깨서…….”

침대 밖으로 나오려는 테사를 헤르트가 저지했다. 그는 거의 다 타들어가는 초를 끈 다음에야 테사에게 다가왔다. 흘러들어 온 달빛만이 테사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헤르트는 가장 먼저 테사의 안색을 살펴봤다.

“저녁을 남겼다고 들었는데.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배가 불러서…….”

“그게 뭐가 많다고.”

헤르트는 자신과의 식사자리에서도 새 모이만큼―순전히 헤르트의 착각이다― 먹는 테사를 떠올렸다. 그런데 오늘은 그마저도 남겼다고 하니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여전히 마른 팔다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사내의 눈초리를 알아본 테사가 변명을 내뱉었다.

“낮에 자넷과 다과를 많이 먹어서…….”

실제로 자넷이 가져온 레몬타르트가 너무 맛있어서 저녁을 생각 못 하고 두 조각이나 먹은 탓에 저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네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보다 왜 이렇게 살이 느리게 차지? 매 끼니 먹이는데도 그대로네.”

자연스럽게 테사의 팔뚝을 쓸어 만지며 헤르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어딜 잡아도 살이 아니라 뼈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이걸 언제 살찌워서 잡아먹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약은?”

“아까 낮에 발랐는데…….”

헤르트가 말하는 약이 무엇인지 깨달은 테사가 얼굴을 붉혔다. 분명 케니스가 주고 간 약을 말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헤르트는 테사의 하체를 덮고 있는 이불을 거둬내며 말했다.

“어디 한번 봐봐.”

“……괘, 괜찮은…….”

“약도 제대로 바르지도 못하면서 괜찮은지는 네가 어떻게 알아. 다리 벌려봐.”

이따금씩 헤르트는 테사의 다리를 벌리고 들어가 직접 그녀의 음부에 약을 발라주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테사는 부끄러워 그 순간만큼은 기절하고 싶었다.

정사를 위해 그의 앞에서 다리를 벌리는 것과 단순히 치료를 위해 다리를 벌리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전자보다 오히려 후자가 더 노골적으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뭐 해, 다리 벌려보라니까.”

어느새 서랍에서 약까지 꺼내온 헤르트가 테사에게 턱짓했다. 할 수 없이 테사는 잠옷을 위로 걷어 올리고 그의 앞에서 다리를 벌려 보였다.

음부에 차가운 공기가 닿자 소름이 오소소 돋으면서 그와 동시에 부끄러워 얼굴에 열이 몰렸다. 머지않아 헤르트가 무릎을 꿇고 테사의 아래를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많이 나아졌네.”

차가운 액체가 소음순에 닿자 테사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고 손으로 이불을 뜯듯이 잡아 쥐었다.

사실 테사가 헤르트 앞에서 이런 식으로 다리를 벌리고 싶지 않아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의 두껍고 긴 손가락이 음부에 닿을 때마다 제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헤르트와 배가 맞닿을 때마다 그가 손가락으로 제 안을 쑤시던 게 기억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자신의 몸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음란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헤르트가 성적인 의미를 담아 제 음부를 만지는 것이 전혀 아닌데도 그가 약을 발라줄 때마다 이렇게 열이 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정말로 민망하고 창피했다. 손길이 닿는 족족 옴질거리는 제 아래를 보고 헤르트는 무슨 생각을 할까. 테사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은혜도 분수도 모르는 창녀 주제에.’

불현듯 소후작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해. 참지 말고.”

은연히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테사를 보며 헤르트가 말했다. 그는 최대한 조심히 손끝으로 약을 펴 발랐다. 여자의 음부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예민했다.

때문에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무턱대고 테사의 아래를 손가락으로 쑤셨던 것이 미안했다. 그녀를 불러 안을 파고들 때마다 괜히 음부가 퉁퉁 부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매번 여자의 몸을 돌아보기도 전에 박는 데에만 집중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짐승만도 못한 새끼.’

그 꼴을 보고도 좆질할 생각을 하다니. 헤르트는 자책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이렇게 약을 발라줄 때마다 자신이 테사에게 욕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친 새끼가 따로 없었다.

‘빌어먹을, 이쯤 되면 그냥 발정 난 게 분명해.’

실제로도 아까부터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요 며칠 매일 물을 빼내다시피 하다가 빼지 못하게 되니 테사만 보면 이 난리였다. 특히 그의 좆은 당장이라도 조개처럼 잘 다물어진 저 아래를 파고들어 싶어 했는데 그 안이 얼마나 뜨겁고 자신을 미치게 하는지 잘 알기에 더욱 그랬다.

‘정신 차려, 개 같은 새끼야.’

헤르트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일주일도 못 되어서 사고를 칠 수는 없었다.

물론 그가 테사를 안고자 한다면 테사는 기꺼이 그에게 다리를 벌리겠지만, 애당초 그녀는 거부라는 것을 몰랐다. 제 몸이 어떤 식으로 망가지는지도 모르고 그에게 깔려 울기만 할 터였다. 어쩌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먼저 해도 괜찮다고 다리를 벌려 올지도 모르지.

그러니 자신이라도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무엇보다 의사가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당분간 테사는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특히 그녀의 아래는 그에게 혹사당해 상처가 난 상태였다.

그러니, 테사를 이대로 안을 수는 없었다. 눈이 돌아가 저지른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물론 참는 입장에서는 정말 미칠 것 같았지만.

그렇게 헤르트는 오늘도 제 인내심의 한계를 돌파하며 약을 바르는 것을 마쳤다. 그는 약을 정리하는 척 부푼 아랫도리를 식히기 위해 테사에게서 등을 돌렸다.

“가,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그리고 내가 존대하지 말랬지.”

“아, 그게, 죄송해…….”

이윽고 테사는 입을 다물었다. 얼마 전부터 헤르트가 제게 존대하지 말라고 했지만 당황하거나 긴장하면 이렇게 간간이 존대가 튀어나왔다. 테사가 급히 헤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됐으니까 옷이나 정리해.”

헤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안 테사는 급히 허리 위로 말려 올라간 잠옷을 정리했다. 그래도 그가 이런 식으로 꾸준히 약을 발라주어서인지 이제는 음부가 그다지 쓰라리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금세 나아서 헤르트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굳이 나를 배려하지 않아도 될 텐데…….’

헤르트가 자신을 배려하여 잠자리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쯤은 테사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이전까지는 매일같이 몸을 겹쳐 왔으니까. 무엇보다 밤마다 그의 것이 매번 부풀어 올라서는 테사의 엉덩이에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모르는 듯했지만.

“저기…….”

테사가 힘겹게 입술을 떼어 헤르트를 불렀다. 이에 헤르트가 그녀를 돌아봤다. 테사가 우물쭈물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해도 괜찮은데…….”

헤르트에게서는 쉽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쯤에서 테사는 아차 했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때 헤르트가 어떤 식으로 나왔던가. 분명 자신이 아픈 사람에게 발정 나는 개새끼인 줄 아냐며 화를 냈었다.

그러나 이번에 헤르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다 낫지도 않았잖아.”

“그러면 제가…… 입으로라도…….”

아직 다 낫지 않은 아래가 문제라면 멀쩡한 다른 곳을 사용하면 될 일이었다. 테사는 그런 식으로라도 헤르트에게 조금이나마 갚고 싶었다. 계속해서 아무 대가 없이 이런 배려를 받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그 때 헤르트가 사납게 입을 열었다.

“그거 기분 나빠. 뒈진 네 늙은 남편한테도 해줬다고 생각하면.”

“아…….”

헤르트가 날카롭게 눈매를 치켜뜨자 테사는 당황했다. 후작에게 구음을 해주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뭐야, 부정 안 하네? 사람 기분 더러워지게.”

“그러면 손, 손으로…….”

별안간 헤르트가 성큼성큼 테사에게 다가와 그녀의 뒷목을 붙잡고 입술을 부딪혀 왔다. 테사가 급하게 빨아들이는 숨에 헐떡이며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자 헤르트는 그 손을 붙잡아 제 목을 감싸게 만들었다. 말캉한 혀가 테사의 입 안을 거칠게 휘젓기 시작했다.

뜨거운 숨과 타액이 서로의 입술을 통해 오고갔다. 테사의 입술이 온통 침으로 번들거리고 나서야 헤르트가 입술을 떼어냈다. 그가 테사의 얼굴을 제 커다란 손아귀에 가두며 말했다.

“나 자극하지 마.”

“…….”

“빌어먹게도 한계까지 참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지금 참고 있는 건…… 네가 못 버틸까 봐서야. 그 의사한테도 잔소리 듣기도 싫고. 그러니까 날 아픈 여자 붙잡고 성욕 하나 못 참는 병신 같은 새끼로 만들지 말란 소리야. 알았어?”

시발. 헤르트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말하면서 다시금 지난 자신의 행동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욕하는 꼴이었다. 이 얼마나 병신 같은 짓인지.

헤르트는 저를 올려다보는 테사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안 하겠단 소리 아니야. 네가 다 나으면 할 거야. 그러니까 자극하지 마. 후회하게 될 거니까.”

그 말이 끝나고 나서야 헤르트는 테사를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낮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내가 다른 데서 자는 게 낫겠어. 이만 자.”

테사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헤르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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