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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41화 (41/138)

041화

유테르트 소후작이 실종된 지 나흘. 페르데일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수색조에 차출되는 병사 수가 매일 조금씩 늘어나자 모두가 자연스럽게 말을 아꼈고 행동거지를 조심했다. 유테르트 영지 내 분위기는 그렇게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단 한 곳만 빼고.

“세상에, 테사! 이것 좀 봐요. 정말 멋지지 않나요? 왕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에요. 아니, 잠깐만……. 이건 신상 중 신상!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테사, 이건 어때요? 테사에게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

테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방 안을 둘러봤다. 응접실 전체가 상인들이 들고 나른 물건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이런 광경은 난생처음이었고 그녀는 아까부터 제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시작은 그날이었다. 별관에 있는 방이 아닌 성내의 방에서 깨어난 날. 그날 이후로 테사에게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테사의 시중을 드는 하녀가 마니를 포함해 서너 명으로 늘어났고,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헤르트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으며, 성내의 모두가 그녀를 극진히 대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늘은 방물장수와 포목상 등 많은 상인들이 테사를 위해 유테르트성까지 직접 발걸음하여 찾아온 상태였다. 그리고 현재 자넷까지 자문이라는 역할로 테사를 돕기 위해 나선 상태였다.

다만 자넷은 테사의 자문과는 별개로 방 안을 가득 채운 패물과 옷감에 신이 난 듯싶었지만.

“맙소사, 이건 새로 유행하는 옷감인데. 동방에서 들여와 요즘 왕도에서 잘 나간다지?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구하기 어렵다고 들었어.”

자넷이 넓게 펼쳐진 천 하나를 들어 보이며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포목점 주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맞장구를 쳤다.

“아이구, 안목이 높으십니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예, 요즘 왕도를 휩쓸고 있는 그 옷감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수량이 한정적이라 아무나 가지지 못하는 물건이랍니다. 저희도 하나 빼내오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이를 알아봐 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

자넷은 곧장 테사에게 천을 흔들어 보였다.

“테사, 이걸로 옷 한 벌 맞추는 건 어때요? 테사에게도 잘 어울릴 거예요. 옷감 자체가 무겁지도 않고 가벼워서, 날이 좋아지면 입기 적당하고요.”

“……글쎄요, 저는 잘…….”

“제가 장담하는데, 색이 노랗고 밝은 게 테사에게 딱이에요. 놓치면 분명 후회할 걸요? 이 옷감에 어디 보자…….”

자넷이 매의 눈으로 패물들을 살펴봤다. 나중에 옷을 만들었을 때 함께 걸칠 장신구들을 찾는 중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초록빛이 도는 에메랄드 귀걸이와 목걸이를 골라내었다.

귀걸이는 물방울 컷팅으로 된 에메랄드를 작은 다이아들이 촘촘하게 감싸고 있었고, 목걸이는 커다란 사각형의 에메랄드가 다이아로 만들어진 줄에 걸려 있었다. 상당히 고가로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입는 거예요. 꼭 봄의 요정 같지 않아요?”

“아니, 부인! 정말로 훌륭한 매치입니다. 저 같은 막눈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화네요. 부인의 말대로 그렇게 맞추신다면 정말 아름다우실 겁니다.”

옆에서 보석을 팔러 온 상인이 냉큼 자넷의 말을 거들었다. 하지만 테사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아까부터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옷과 패물을 고르고 결정할 정신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이 물건들의 값을 치루는 것은 테사가 아니었다. 헤르트였다.

소후작의 실종사건으로 인하여 분위기가 좋지 못한 마당에 자신만 이곳에 앉아 팔자 좋게 헤르트의 돈을 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제게 그럴 만한 가치도, 자격도 없을뿐더러, 애당초 테사에게는 이런 경험이 전무했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테사의 안색이 굳어 표정이 좋지 못하자 자넷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싫어요? 그럼 다른 걸 골라볼까요?”

“아뇨, 그게 아니라…….”

“테사도 참. 이럴 때는 말이죠. 그냥 다 고르고 보면 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이 자리가 마련된 거라고요.”

자넷이 테사에게 다가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뭘 망설여요. 각하께서 보내주신 거잖아요. 우리가 언제 이런 거 해달라고 요구했어요? 자기가 해주겠다고 한 걸 왜 거부하려고 해요. 아깝게. 뽑을 수 있을 만큼 뽑아야지.”

“하지만, 자넷. 저는 이런 걸…….”

“말이 길어요. 자자, 옷감 고르고 치수도 재고, 그에 맞는 패물도 고르려면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해요. 그러니 어서 골라봐요. 테사한테도 취향이 있을 테니까.”

자넷이 테사에게 많은 옷감과 패물들을 가리켜 보이며 웃었다. 그러나 테사는 역시 그녀처럼 마음 편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막막함만 밀려왔을 뿐이다.

도대체 이게 다 뭔지.

‘헤르트는…… 무슨 생각인 걸까.’

요 근래 헤르트는 정말 이상했다. 부쩍 친절해졌을 뿐만 아니라 테사를 정말 귀부인답게 대우해 주고 있었다. 그건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자신을 배신한 여자를 위해 아끼지 않는 편의라니.

심지어 테사는 이곳에 온 뒤로 처음으로 귀부인다운 대우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말도 안 되잖아.’

자신을 귀부인으로 만들어준 것은 죽어버린 유테르트 후작인데, 정작 그 대우는 그녀의 늙은 남편을 죽인 헤르트가 해주고 있다니.

현재 테사가 받고 있는 대우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줄 알 터였다. 그렇게 말고는 딱히 설명할 수 없었다. 덕분에 이곳을 찾은 상인조차 테사를 영부인이라 호칭하고 있었다. 그건 누가 들어도 안주인을 칭하는 명칭이었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는데…….’

사실 오늘 벌어진 일은 작은 해프닝에서 시작되었다.

요 며칠 동안 테사는 침대에만 누워 안정을 취하느라 잠옷 외에는 딱히 옷을 차려입을 필요가 없었다. 오늘에서야 케니스에게 움직여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서야 침대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헤르트가 옷을 차려입은 테사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옷이 그런 것밖에 없어?’

‘…….’

처음에 테사는 헤르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별다를 게 없는 옷이었으므로. 볼품없긴 했지만 평소 그녀가 입고 다니는 옷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테사와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찾아온 헤르트가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 그리 물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하녀들을 불러 테사의 옷을 몽땅 꺼내어보고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번에 그 옷은?’

‘……자넷, 아니, 다른 부인께서 빌려주신 거라…….’

‘네 건?’

‘…….’

‘빌어먹을, 당장 옷부터 사. 아니, 다 준비하라 해야겠어.’

그리하여 이렇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헤르트는 자넷을 불러 테사를 돕게까지 했다.

테사는 오늘 제 옷 대신 급하게 빌려 입은 자넷의 옷을 내려다봤다. 저번처럼 보석과 금수가 화려하게 들어간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질 좋은 옷감으로 꼼꼼하게 박음질하여 만들어진 값비싼 드레스였다.

하지만 제 것이 아닌지라 군데군데 옷이 잘 맞지 않아 불편했고, 입어선 안 되는 것을 입은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그날 헤르트가 직접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회상‘다음부턴 이딴 옷 입고 오지 마.’

그런데 이제 와서 왜…….

테사는 손가락을 문질러대었다. 이런 상황은 제게 익숙하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자리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벗어났을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자넷에게 모든 걸 다 맡기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저보다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자넷은 고개만 수그린 채 말을 하지 않는 테사에게 강경책을 내놓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지부진하여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새 영주에게 단단히 언질을 받기도 했고.

“테사, 자꾸 그렇게 아무것도 안 고르고 가만히 있으면 내 마음대로 다 질러버릴 거예요. 이 모든 물건을 이 자리에서 다 사버릴 수도 있다고요. 그러면 제 아무리 각하라 해도 값이 상당할 걸요?”

거짓말이었다. 이곳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사들인다 하여 사내의 재산이 휘청일 리가 없었다. 보르웬 후작 밑에서 그가 긁어모은 재화만 해도 한 가문의 재산과 비견된다는 것쯤은 자넷도 알았다. 더군다나 이번에 갖게 된 유테르트가의 가문 재산만 헤아려도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자넷, 그러지 마요……!”

헤르트를 언급하며 거들먹거리자 그 효과는 대단했다. 테사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금세 안절부절못하자 자넷은 속으로 웃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골라봐요. 이렇게 옷감이 많은데 적어도 테사가 원하는 것으로 한 벌은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한 벌요……?”

“그래요, 한 벌.”

자넷의 말에 테사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벌 정도라면……. 사실 자신이 맞추지 않겠다고 해도 포기할 자넷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돈이 덜 나갈 것 같은 것으로 고르는 게 나았다.

‘그래, 한 벌만 고르자.’

테사는 헤르트의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제게 쓰이는 그의 돈이 아까웠다. 그가 힘들게 번 돈을 어찌 자신이 쓸 수 있단 말인가. 배신자인 자신에게는, 지금 이대로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이렇게까지 돈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럼 저는 이거…….”

테사가 흔해 보이는 옷감 하나를 고르자 자넷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그건 품질도 색도 별로예요.”

“제가 원하는―”

“앞에 있는 거 아무거나 고른 걸 제가 모를 줄 알고요? 원하기는 무슨! 다시 골라요, 다시!”

값싼 것으로, 아무거나 골라 이 상황을 끝내겠다는 테사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한 자넷이었다. 자넷은 제 눈에 만족스러운 것들만 추려 테사 앞에 밀어주었다. 테사가 그중 어떤 걸 골라도 기본은 할 수 있도록.

적어도 기본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문으로 이곳에 와 있는 제 체면도 있는데.

“나 화나게 하지 마요.”

테사는 자넷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값이 안 나갈 것 같은 옷감으로 골랐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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