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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39화 (39/138)

039화

사내의 커다란 손바닥이 테사의 가는 다리를 주물주물 마사지했다. 생각보다 그의 마사지 실력이 뛰어난 까닭에 테사는 긴장과 피로로 물든 제 몸이 점점 풀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사이에 하녀들이 준비를 끝마치고 방 밖으로 사라졌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뇨, 저는 아무거나…….”

헤르트가 테사의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물었다. 테사는 다시 방 안에 그와 단둘이 남게 되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젯밤부터 헤르트는 너무 이상했다. 너무 다정하고, 친절하다. 지금도 갑자기 방을 그의 옆방으로 바꾸지 않나, 다리를 주물러 주지를 않나, 지금은 제 식사 시중까지 들려고 하는 그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그럼 이거부터 먹어.”

헤르트가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테사 앞에 놓아주었다. 하지만 테사는 차마 그 고기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이제는 고기까지 직접 잘라서 준다고? 당황한 테사가 먹지 않고 가만히 고기를 바라보기만 하자 헤르트가 눈짓했다.

“뭐 해? 안 먹어?”

“……아, 아뇨, 먹을게요.”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지켜볼 거니까.”

“…….”

“대답해.”

“네…….”

일단 테사는 포크로 고기를 찍어 입 안에 넣었다. 부드러운 고깃결이 입 안에서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맛있었다. 주방장이 식사를 준비하는데 신경을 기울인 것이 느껴졌다. 별관에서 했던 식사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곳의 식사는 완벽함이 더해졌다.

테사는 자신이 이런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금세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그러다 헤르트가 전혀 먹지 않는 것을 보게 된 테사가 기겁하며 입을 열었다.

“여, 영주님도 드세요.”

“알아서 먹고 있어. 자 이것도 먹어봐.”

이 뒤로도 헤르트는 모든 음식들을 하나하나 잘 손질하고 먹기 좋게 잘라서 테사의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테사가 먹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테사는 부담스러워 목이 막힐 것 같았다. 이런 섬세한 시중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남자가 해주는 시중은.

“저, 더, 더는 못 먹어요…….”

원래도 식사량이 남들보다 조금 적은 편에 본래 아침은 적게 먹는 터라 테사의 배는 금방 찼다. 그러나 그런 테사의 말에 헤르트가 눈썹을 까닥였다. 더 먹으라는 뜻이었다.

“반도 안 먹었어. 새 모이만큼 먹고서는 왜 배부르다고 그래?”

“원래 아침은…… 적게 먹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마르고 픽픽 쓰러지지. 더 먹어.”

헤르트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다시 잘 손질된 생선살을 테사의 앞 접시에 내려놓았다. 안 먹으면 노려볼 기세라 테사는 할 수 없이 다시 포크를 들고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한계는 금방 다가왔다. 억지로 먹는다고 원체 작은 위가 갑자기 늘어날 리가 없었다.

“……저, 정말로 더는 못 먹겠어요.”

테사가 진심으로 힘겨워하는 기색이자 그제야 헤르트도 음식을 나르는 것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것만 먹고 살 수 있냐는 얼굴이었다.

“예전에 그것보다 더 먹었잖아.”

“그건…… 성장기였으니까…….”

“넌 아직도 작아. 더 커야 해.”

헤르트의 말에 테사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성장기가 자기 마음대로 시작했다가 끝나는 것도 아니고. 고아원 시절에 자란 키가 끝이었는지 그 이상으로는 한 뼘도 커지지 않았다. 반면에 헤르트는 고아원에서 제일 덩치 좋고 키가 컸는데 지금은 더 했다. 그의 커다란 덩치는 마치 곰을 연상케 했다.

그런 헤르트를 보고 테사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영주님은…… 많이 크셨네요.”

“뭐……. 근데 아까부터 느낀 건데 왜 날 자꾸 영주님이라 불러?”

헤르트의 물음에 테사가 눈을 껌벅였다.

“네? 그야…… 영주님이니까…….”

“헤르트.”

“……네?”

“전처럼 이름으로 부르라고. 헤르트.”

헤르트가 커다란 고기를 썰어 입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테사는 이에 조금 얼이 빠진 상태였다.

이제는 이름까지 불러달라? 정말로 무슨 생각인 거지?

바뀌어도 하룻밤 사이에 많은 게 바뀐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다정했던 예전의 헤르트가 생각났으니까.

문제는 자신이 그런 그를 보고 좋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테사는 혼란스러운 낯으로 헤르트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이에 헤르트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제가 그래도 되는지 몰라서요.”

“못 할 건 뭐가 있어. 원래 이름 부르는 사이였잖아, 우리.”

“……그렇지만…….”

“이름 하나 부르는데 말이 너무 긴 거 아니야?”

“……죄송해요.”

“그 죄송하다는 말도 그만 좀 하고.”

거기에서 테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고 헤르트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 표정도 안 지을 수는 없어?”

“무, 무슨 표정…….”

“날 이상하게 바라보는 표정. 꼭 살아서는 안 될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보잖아.”

“죄송해요.”

테사가 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그 때 그녀의 머리 위로 헤르트가 짧게 중얼거렸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테사는 입 안이 바짝 말라갔다. 마른침을 삼키는데 헤르트가 채자 입을 열었다.

“너.”

“…….”

“나한테 존대하지 마.”

거슬려. 헤르트는 그 말을 끝으로 몇 번 손대지도 않은 식사를 끝마쳤다. 그리고는 하녀들을 불러 치우도록 했다.

그녀는 다시 헤르트의 품에 안겨 침대로 옮겨졌다. 때마침 케니스가 방을 찾아왔다. 그녀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여태 그러했던 것처럼 테사를 진단하기 시작했다.

테사는 순순히 그녀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다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 보면 제 온몸은 붉은 흔적으로 얼룩덜룩했고 누가 봐도 밤사이 헤르트와 뒹굴었던 여자였다. 그런 꼴로 하녀들 앞에서 헤르트에게 안겼으니 그들이 저를 무어라 생각할까.

“왜 그러세요, 부인? 어디 불편하세요?”

“아뇨……. 그게 아니라…….”

“편히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요? 그럼 불편한 게 있으시면 바로바로 말씀해 주셔야 해요.”

“네…….”

그 뒤로는 이전과 비슷한 진단이 내려졌다.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 푹 쉬고 약만 잘 챙겨먹으면 나을 수 있다는 것. 그리 말하는 케니스의 목소리에는 다른 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으란 마냥.

“더는 제가 봐드릴 건 없네요. 아참, 제가 전에 드린 약은 다 쓰셨어요? 다 쓰셨으면 새것으로 하나 더 드릴게요.”

“아, 네, 거의…….”

케니스는 가방에서 약 하나를 꺼내다가 이내 하나 더, 총 두 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하나는 테사에게, 하나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헤르트에게 건네주었다. 느닷없이 약을 받게 된 헤르트가 이게 무엇이냐는 얼굴로 약과 케니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곳에 바르는 약입니다. 아무래도 각하께도 하나 드리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하루에 한 번 내지는 두 번 발라주시면 됩니다. 소량의 양을 넓게 바르는 거예요. 안까지 바르지는 마시고요. 물론 이 약이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계속 그렇게 부인의 몸을 혹사시키시면 큰일 납니다.”

케니스의 뼈 있는 발언에 테사가 당황했다. 그녀는 헤르트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사의 예상과는 다르게 헤르트는 케니스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테사처럼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헤르트의 귀가 새빨갰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케니스가 나가고서 두 사람은 공평하게 약을 하나씩 들고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조용한 적막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적막을 깬 것은 다름 아닌 노크 소리였다. 헤르트는 약을 품에 집어넣으며 직접 문가로 다가가 문을 열고 방을 찾아온 자를 확인했다.

“제프리 경께서 보내 오신 겁니다.”

병사가 황갈색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헤르트는 그것을 받아 들고 테사가 있는 침실을 힐긋거렸다. 잠시 자리 정도는 비워도 되겠지.

그는 방 밖으로 나와 봉투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서류들을 꺼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가 욕설을 지껄이며 손에 쥔 서류를 무자비하게 구겼다.

***

“다른 건 안 바라. 시간만 대충 끌어주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경께는 어렵다고요. 기어코 제 머리통이 날아가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제 앞에서 둥글게 부푼 배를 쓰다듬고 있는 여자, 자넷을 노려보며 랑그가 이를 갈았다. 벌써 두 번째였다. 갑자기 찾아와 이런 식으로 통보를 하는 것이. 때문에 랑그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고래 싸움에 낀 새우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 남자가 너를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되면 각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텐데?”

“그러니까 몇 번을 말씀드리는 겁니까. 경께서는 그런 상식적인 것이 통하지 않는 분이시라고요. 제가 후작의 사람이든 아니든 결정적으로 경의 심기를 거스르면 정말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단 말입니다. 오죽하면 각하께서도…….”

“그래서 못 하겠다?”

자넷이 삐딱하게 고개를 틀며 랑그를 빤히 쳐다봤다. 젠장. 랑그가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이래서 이 여자가 싫었던 건데! 그는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고서 최대한 차분히 입을 열었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장담은 못 합니다.”

“그래,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았나요. 제프리 경. 사람 입 아프게만 하고. 임산부를 이렇게 대하셔도 되나요?”

질책 어린 자넷의 말에 랑그가 눈썹을 들썩거렸다.

“진짜 임산부도 아니잖습니까.”

“근데 사람들은 진짜 임신으로 알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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