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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34화 (34/138)

034화

다시 등을 돌려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작은 손이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헤르트는 이번에는 또 뭔가 싶어 짜증이 다분한 얼굴로 테사를 돌아봤다. 그녀가 우물쭈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다, 답을 하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뭐?”

“저는…… 영주님을 배, 배신……했고,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잖아요……. 여기서 이유를 말한다고 해서…… 뭐가, 뭐라도…… 달라지나요?”

테사는 말을 하는 내내 코가 찡했다. 기껏 용기를 내어 한다는 말이 이런 것밖에 없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사실은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나도 속은 거라고. 그들에게 여기로 끌려온 거라고. 내 억울함을 알아달라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세상사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리기만 했다면 애당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헤르트만 보면 목소리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숨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 맞잖아……. 내가 그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잖아.’

아무리 자신도 피해자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도, 자신은 결국 헤르트에게 있어선 가해자일 뿐이었다. 자신이 무지하지 않고 신중했더라면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일은 없었을 테고, 헤르트가 검투사노예로 팔려가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테사는 역시 말할 수가 없었다.

“맞아요, 저……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 여기 왔어요. 무엇을 더 말해야 하죠? 이미 다 보셨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 다 아셨잖아요…….”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눈가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헤르트의 앞에서는 울지 않겠다 다짐했는데도 이번에도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비참하고 참담해서. 결국 이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원통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냥, 저한테…… 벌을 주세요. 다 감내할게요. 영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 할 수 있어요. 어차피 제 몸 하나로 죗값을 모두 치룰 수 있다고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어요.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니까…….”

헤르트에게 제 몸 하나 내어준다고 해서 그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헤르트의 마음이 풀린다면, 그가 만족해 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감사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래서 테사는 헤르트가 저를 매섭게 다뤄주었으면 했다. 아무 생각이 들 수 없도록. 더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이 생겨나지 않도록.

모진 말과 매서운 폭력도 상관없었다. 학대는 늘 겪어온 것이다. 지금 와서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이 소후작에서 헤르트로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테사는 헤르트와 몸을 섞을 때가 가장 낫다고도 생각했다. 그가 거칠게 저를 몰아붙이면 그때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자신을 아무렇게나 대해주었으면 했다. 방에 가두어도 괜찮고, 지하감옥에 가두어도 괜찮았다. 아니면 여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아무 때나 저를 불러 욕구를 풀어도 상관없었다.

“때려도 좋고, 아무렇게나 대해도 괜찮아요……. 어차피 제 목숨은 영주님에게 달려 있는 걸요. 그러니 벌을 모두 주고 그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저를 죽이셔도…….”

“너 미쳤어?!”

별안간 헤르트가 크게 소리쳤다. 이에 테사가 질겁하며 고개를 더욱 떨구었다. 씨근덕거리는 남자의 거친 숨결이 바로 위에서 느껴졌다.

“죽이라고, 너를? 또 그 소리. 너는 네 목숨이 무슨 여러 개인 줄 아나 본데……!”

허리춤에 매달았던 검을 헤르트가 거세게 내동댕이쳤다. 무거운 검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테사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내가 왜 널 죽여줘야 해? 죽고 싶으면 네가 직접 죽어. 내 손은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까.”

그 말에 테사는 멍하니 헤르트가 던진 검을 쳐다봤다. 직접 죽으라고? 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만 저런 날붙이가 배를 관통하면 죽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테사가 천천히 검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사내의 발이 검을 찼다.

“아…….”

검이 순식간에 저편으로 굴러가자 테사는 놀라 헤르트를 올려다봤다. 그가 테사의 멱살을 다급하게 잡아 쥐었다.

“너…… 정말 죽으려고 작정했어?”

“…….”

“말해, 정말 죽으려고 했어, 안 했어?!”

사내의 물음에 테사는 말없이 입만 벌렸다. 제게 화를 내는 헤르트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지? 그는 소후작이 제 목을 단검으로 찔렀을 때도 눈 한 번 깜짝이지도 않던 사람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여기서? 기분이 이상했다. 목구멍이 너무나도 따끔거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젠장!”

테사가 아무 말이 없자 헤르트가 욕설을 지껄였다. 그리고는 그 어느 때보다 험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 죽지 마.”

“…….”

“재수 없으니까, 내 앞에서 죽지 말라고.”

“…….”

“알겠다고 말해. 아니……. 죽지 않겠다고 말해.”

말끝에 제발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테사는 여전히 말없이 헤르트를 쳐다봤다. 그 와중에도 눈가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때문에 시야가 물기로 젖어 점점 가물가물해진다. 남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를 내고 있는 건 확실했다.

“네 말대로 네 목숨은 내 거잖아. 그러니까 죽지 않겠다고 어서 말해!”

그게 아니라면 저 모습은 괴로워하는 것일 텐데, 헤르트가 저 때문에 괴로워할 리 없으니까.

테사는 자신이 또다시 헛것을 본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죽지 않을게요.”

“분명 네 입으로 말한 거야. 죽지 않는다고. 한 번이라도 내 허락 없이 죽으려고 하기만 해봐. 절대 용서 안 해. 두고두고 괴롭힐 거야.”

“…….”

“알겠어? 알겠냐고.”

“……네.”

테사가 대답하고 나서야 헤르트는 잡았던 그녀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두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이따금 그의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욕이 마구잡이로 흘러나왔다. 얼마 후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는 것을 멈춘 헤르트가 테사를 향해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울지 마.”

“…….”

“그만 울어.”

뜨거운 손이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이번에도 테사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또다시 그가 다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르겠다.

섹스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웬만한 이유로는 배신자에게 다정할 필요가 없다. 테사는 헤르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헤르트는 내게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

차라리 몸을 원했다면 생각하기도 쉬웠을 텐데. 테사는 헤르트의 행동에 자꾸만 선을 넘볼 생각을 하는 자신이 미웠다.

아니야, 헤르트는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아. 그는 날 증오해. 네가 그에게 한 짓을 생각해. 어떤 남자가 자신을 팔아넘긴 여자를 계속 좋아하겠어?

테사는 끊임없이 그럴 리가 없다고 되뇌면서도 마지막 하나 남은 기대는 놓질 못하고 있었다.

혹시…… 헤르트가 나를 아직 좋아한다면?

덜컥 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염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멈출 수가 없어서.

테사는 자신을 안아 들어 침대로 데려가는 헤르트의 소맷자락을 꽉 잡았다. 차라리…… 해보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제게서 검을 주었다가 도로 뺏은 그 저의가 뭔지. 왜 죽지 말라고 하는지.

“……요.”

“안 들려.”

“……안아주세요.”

침대 위에 저를 내려놓는 헤르트를 테사는 용기를 내어 쳐다봤다. 헤르트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발요……. 안아주시면 안 돼요? 엉망진창이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 답을 알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핑계고 자신은 그저 헤르트를 원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플 때마다 저를 꼭 안아주던 그 소년의 품이 아직 건재한지 궁금해서. 그때처럼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사내의 품도 따뜻할지도.

“저 좀 안아주세요…….”

“…….”

“제발…….”

눈물로 젖은 올리브빛 눈동자가 애원했다. 여자의 가냘픈 손도 헤르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헤르트는 한참 말이 없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 테사의 입술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

“바쁘신 모양이에요?”

통통 튀는 목소리에 하녀와 대화 중이던 엘레나가 뒤를 돌아봤다. 문가에 갈색 곱슬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자넷이 서 있었다. 잠옷 위로 가벼운 검은색 로브 하나만 걸친 그녀는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왜 왔어?”

“이거 봐, 여긴 손님이 와도 대접이 영 별로라니까. 저 안 보고 싶었어요?”

“그제 봤잖아.”

엘레나가 하녀에게 이만 가보라고 손짓하며 자넷이 앉아 있는 곳으로 휠체어를 드르륵 끌어 다가왔다.

자넷은 외투를 챙겨 나가는 엘레나의 하녀를 힐긋거리며 다리를 꼬았다. 그녀가 올라올 때는 삐끄덕 삐끄덕 소리를 내던 낡은 계단이 하녀가 내려갈 때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자넷은 설핏 웃으며 입을 열었다.

“준비는 다 해놨어요. 일은 무사히 진행될 거예요.”

“그래야지.”

“그것보다 당분간은 못 올 것 같아서 들렸어요. 절 탐탁지 않게 보는 사람이 한 명 있어가지고.”

끈질긴 놈. 짙은 회색 머리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자넷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반면에 엘레나는 평온한 얼굴로 한쪽에 놓아둔 뜨개질을 집어 들었다.

“그거, 잘됐네. 앞으로 여기에 오는 거 자중해. 네가 여기 드나드는 거 사람들이 알면 좋을 거 없으니까.”

“흥, 지난 2년간 드나들었지만 들킨 적 한 번도 없었거든요.”

자넷이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주변을 둘러봤다. 저 멀리 창 너머로 환한 달빛에 유테르트 영지가 보였다. 유서 깊은 개국공신 가문답게 유테르트 영지의 규모나 입지에 대해선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저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이곳은 쑥대밭이 될 예정이었다.

자넷은 다시 제 앞의 후작부인을 쳐다봤다. 상처와 주름이 가득한 손은 아까부터 뜨개질에 집중하고 있었다. 몇 코를 뜨지 않아도 점차 그 형태를 잡아가는 게 신기했다.

“그거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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