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물론 현재 그들의 관계가 육체에 치중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헤르트는 아픈 여자를 붙잡고 허리를 흔들 생각은 없었다.
심지어 테사가 아픈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직접 간호까지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결단코 이런 식으로 그녀를 대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옷을 벗기만 하면 내가 옳다구나 하고 곧장 박을 그런 새끼로 봤냐고, 내가 지금 묻잖아.”
“……그, 그게 아니…….”
“그러면 뭔데. 왜 갑자기 내 바지춤에 손을 대?”
헤르트의 사나운 물음에 테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헤르트가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최대한 억누르려고 했던 감정들이 저 다문 입을 보자 조금씩 솟구치려 하고 있었다. 꼭 이렇게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만 입을 다무는 테사가 가증스러웠다.
“또 말 안 하지. 너는 진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데 일가견 있어.”
“그렇지, 아, 않……!”
“그럼 똑바로 말해.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인데. 내가 언제 너한테 섹스를 요구했다고 그래?”
아까부터 계속 머리를 굴려봤지만, 헤르트는 단 한 번도 테사에게 성적인 신호를 보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몸에도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오히려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했다.
“대답하라고.”
헤르트가 짓씹듯 말을 토해내자 테사가 파리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것 때문에 제게 잘해주시는 거잖아요…….”
“……뭐라고?”
예상치도 못한 테사의 대답에 헤르트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얘가 지금 뭐라고 말한 거야? 그는 제 귀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더 기가 차는 것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이었다.
“이, 이게 아니라면, 저를 살려둘 이유가 없잖아요……. 저는 영주님께 죄를 저질렀고, 벌을 받는 거라고……. 그러니 제게 벌을 주시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지껄이지 마!”
결국 헤르트는 참지 못하고 낮게 소리쳤다.
살려둘 이유가 없다고? 벌을 받는 거라고? 점점 받아들일 수 없는 테사의 말에 헤르트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헤르트는 얼굴을 왈칵 찌푸리며 말을 빠르게 이어갔다.
“감히 내 앞에서 그딴 말을 지껄여? 벌을 달라고……? 너 제정신이야? 설마 이 관계를…… 내게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인내했던 거야? 다시 말하지만, 이 관계를 먼저 시작한 건 너야. 너였다고!”
테사는 윽박지르는 헤르트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 분명했다.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그날 이후로 헤르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몸을 떨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죄, 죄송해요……. 저는 단지……. 영주님을…… 화나게 해드리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저…… 제 쓸모가…… 이것뿐이니까…… 당연히 그걸 원, 원하시는 줄 알고…….”
“하, 그래서 내 바지춤에 손을 대었다? 벌을 받으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내가 집어치우랬지.”
“…….”
“빌어먹을, 어떻게 하면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야?”
헤르트는 진심으로 테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혼자 생각하다 이상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걸까. 자신이 그녀에게 잘해준 게 모두 섹스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제 죄에 대한 벌이라고? 어이가 없었다.
“적어도 네 죄가 뭔지 알기는 해?”
“……아, 알아요.”
“그런데도 이딴 식으로 나온다고?”
“죄송해요…….”
“말뿐인 사과는 필요 없어. 네가 그렇게 네 죄를 잘 안다면 정작 나한테 해야 하는 말은 따로 있잖아. 난 처음부터 그걸 원했어. 몸 따위는 내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고!”
좆질에 미친놈으로 보이는 것도 억울한데 지은 죄를 뻔히 알면서도 제 물음에 답해 주지 않는 테사 때문에 헤르트는 반쯤 이성이 나갈 것 같았다. 날 가지고 노나, 지금?
“넌 대체……!”
언성을 높이려던 헤르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테사를 발견했다. 그녀는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때문에 첫날의 그녀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진창에 구르는 느낌이었다.
왜 또 그런 모습이야. 네가 뭘 잘했다고 피해자인 척 구는 건데. 정작 피해자는 네 앞에 있는 나라고.
분노로 떨리는 손을 간신히 쥐며, 헤르트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네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
“…….”
“왜 너답지도 않은 짓을 해? 너 원래 이런 애 아니었잖아. 그 당당한 성격은 다 어디로 갔는데. 왜 이제 와서 그리 불쌍한 척 구냐고. 그런 식으로 굴면 내가 널 용서해 줄 것 같아서?”
지금의 테사는 보면 볼수록 헤르트가 알고 있던 테사와 거리가 멀었다. 고아원 시절의 테사는 늘 하염없이 밝고 당당하기만 했는데, 지금의 테사는 한없이 움츠러들고 남의 눈치를 보기만 했다.
그것이 헤르트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차라리 헤르트는, 테사가 예전과 같은 모습이었다면 벌써 그녀를 용서했을지도 몰랐다. 그 시절의 테사를 보았다면 약해지고 싶지 않아도 약해졌을 테니까.
어쩌면 단 한 마디의 사과만으로도, 그녀에게 괜찮다며, 다시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애정을 갈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테사를 상대로는 아니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올 때마다 정말로 네가 테사가 맞는지 의심이 가. 왜, 늙은 남편을 얻었더니 당당하게 구는 것보단 불쌍한 척을 하는 게 더 잘 먹혔어? 그래서 나한테도 이러는 건가? 이제 이곳의 영주는 나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
“그럼 뭔데. 어려운 일 아니잖아. 똑바로 말을 해봐. 네가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
“…….”
“또 시작이네. 네가 불리할 때만 그 입 다무는 거.”
헤르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머리가 아까부터 지끈지끈거렸다. 사실 화를 내는 것도 그것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의 앞에 있는 테사처럼, 상대방이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은 화를 낼 기력조차 사그라들기 마련이었다.
“됐어, 너랑 내가 무슨 대화를 하겠어. 애초에 대화가 통했다면 말 한마디도 없이 날 팔아버리고 튀지는 않았겠지.”
헤르트는 방 한쪽에 기대어놓은 제 검과 외투를 챙겨 들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저 여자와 계속 함께 있다가는, 자신이 미쳐서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몰랐다.
그 때였다.
테사가 이전보다 더욱 큰 목소리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편지를, 편지를 남겼잖아요……. 분명 편지를…….”
테사는 헤르트가 등을 돌리자마자 초조해졌다. 그가 이대로 나가서 저를 영영 보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를 붙잡고 과거에 자신이 남긴 편지를 언급했다.
헤르트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니, 자신이 고아원을 떠나오기 전 남긴 편지도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 편지에 테사는 모든 것을 적어놓았다. 비록 원장에게 속아 거짓을 말한 셈이 되어버렸지만. 자신이 남작영애의 하녀로 일하기로 했고 그 대가로 헤르트는 기사가 될 수 있게 되었다고……. 거기서 만나자고……. 그러나 머지않아 적나라한 비웃음이 쏟아졌다.
“무슨 편지? 나 버리고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절대 너를 찾지 말아달라는 그 편지?”
“그게 무슨…….”
“그 밑에 미안하다는 말 달랑 한 줄 적어놓으면, 내가 아, 그렇구나 하고 날 팔아먹은 널 이해해 줘야 해?”
“그, 그렇지…….”
헤르트의 비아냥 어린 어조에 테사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 편지 또한 원장의 도움을 받아 쓰여졌다는 것을. 테사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가를 막았다. 비명이 쏟아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가 있지? 잊어선 안 되는 게 있고 되는 게 있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이 헤르트를 우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건 안 돼. 빨리 오해를 풀어야…….’
“그 편지는…… 제가, 제가 쓴 게…….”
“왜? 이제 와서 네가 쓴 게 아니라고 잡아떼려고? 뭐, 상관없어. 그 편지가 네가 직접 썼든 아니든 그 진의는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중요한 건 네가 날 배신했다는 거야.”
“…….”
“변하는 건 없어.”
헤르트가 성큼성큼 문가로 다가갔다. 이 방을 나서면 그 순간부터는 테사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접어버릴 생각이었다. 잘해줬다가 좆질에 미친놈으로 오해받기는 싫었으니까. 이거 순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다.
자신이 잠시나마 미쳐 버린 게 틀림없었다. 저 여자가 누구인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존재를 팔아넘긴 것도 모자라서 찾지 말라고 매몰차게 부탁하던 여잔데 눈물 하나 내비추었다고 이리도 쉽게 마음이 허물어지다니.
‘병신 같은 새끼.’
헤르트는 왜 테사 앞에만 서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왜 껄끄러운 것을 삼킨 듯 입 안이 텁텁해지는지도. 됐어, 그만 생각해. 이제 만날 일 없는 여자야. 그가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뒤에서 우당탕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테사가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졌는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울음소리와 더불어 앓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흑…….”
그 이후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헤르트는 어느새 테사에게 달려가 그녀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봐봐, 다친 곳은 없어?”
“죄, 죄송해요…….”
“몸도 아프면서 계속 누워나 있지, 침대 밑으로는 왜 내려와?”
테사가 다친 곳은 없는지, 몸은 괜찮은지, 그 모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헤르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제 행동에 스스로 어이없어졌다. 등신 같은 새끼. 머저리도 이런 머저리가 따로 없었다. 호구를 스스로 자청하고 있다니.
헤르트는 뒤늦게 붙잡았던 테사의 팔을 놓았다.
“시발, 내가 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