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그런데 왜…….’
이토록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걸까.
7년 전, 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산산조각이 났다. 직후에는 아닐 거라는 미약한 희망을 붙잡고 있었지만, 그녀의 배신을 확인한 후에는 그마저도 놓아버렸다. 헤르트는 더 이상 테사를 사랑하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애당초 그녀를 향한 이 감정들은 사랑일 수가 없었다. 배신으로 얼룩져 증오가 들끓고 비참함이 섞인 이 앙분은 감히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날것의 감정은 그 형태조차 온전하지 못해서 헤르트를 괴롭히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혼란스러웠다.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왜 이렇게까지 자신이 그녀를 신경 쓰고 있는지 결론조차 내릴 수 없었기에.
그 수순으로 헤르트는 테사가 누워있는 내내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은 테사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그녀에게 복수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지옥과 같은 과거에 대한 보상으로 삼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의 마음은 시시때때로 바뀌었으니까.
어쨌든 오랫동안 생각한 결론은 그랬다. 애석하게도 도돌이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을 통해 분명해진 것이 하나 있었다. 헤르트는 테사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가 살아 있기를 원했다.
적어도 제 앞에서는.
***
랑그는 전 영주의 여섯 번째 부인이 방금 전 깨어났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상관이 직접 그녀의 식사를 준비하라 지시했다는 것 또한 병사가 보고했다. 그는 손가락끝으로 책상 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톡톡 두들겼다. 책상에는 그의 상관이 부탁한 정보가 놓여 있었다.
‘테사 유테르트.’
7년 전, 세테비얀 남작의 고명딸을 대신하여 유테르트 후작의 여섯 번째 부인이 된 여자.
남작영애의 대용품이라는 것을 안 후작이 그녀를 무시함에 따라 이곳에서의 입지가 단번에 줄어들었으며, 초반에는 탈출과 자살을 시도하는 등 온갖 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얌전해지더니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그 외 부분은 소후작에게 주기적으로 학대를 당해왔다는 것.
랑그는 탈출 및 자살 소동과 소후작의 학대 부분에 길게 첨부된 주변인들의 인터뷰 자료를 훑어보며 시선을 조용히 내리깔았다. 어딘가 매번 움츠러든 기색이 역력하다 싶었더니 이런 사연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제 상관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그보다…… 경과 비슷하네.’
랑그는 다시 첫 번째 장으로 돌아와 테사의 기본적인 정보를 훑어봤다.
역시나 그녀도 제 상관처럼 7년 전의 행방에 대해서는 불분명했다. 세테비얀 남작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테사 세테비얀’ 이전의 ‘테사’라는 여자에 대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출신지도 부모도 모두 공백이었다.
하지만 랑그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상관과 같은 출신일 테니, 아마도 고아원 출신일 테지. 그리고 7년 전 헤어졌던 원인이 현재 상관이 부인께 가지는 감정의 원인일 터였다. 물론 현재 상관의 반응이나 행동을 보아서는 그녀가 그에게 잘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역시 원인은 경이 고아원에서 검투사노예로 넘어갈 때 벌어진 일인가?’
므슈 왕국은 노예가 합법이긴 하지만, 정작 그 수는 드문 나라였다. 평범한 사람이 노예가 되는 일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노예의 9할은 경범죄자가 형량만큼 노예로 살다 면천받는 공노비였고 나머지 1할이 여러 가지 이유로 대가를 받고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 사노비였다.
그러나 그 누가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처할까. 변제할 수 없을 만큼의 빚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노예가 되는 것을 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노비와 다르게 사노비의 대우는 그다지 좋지 않은 탓이다.
사노비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검투사노예가 그랬다. 그 대우가 어찌나 가혹한지 사형이나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감옥에 가는 대신 투기장으로 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 상관처럼 평민에서 바로 검투사노예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인께서 경을 검투사노예로 팔 수가 있나? 애당초 노예 계약서는 본인이 직접 지장을 찍지 않고서야 효과가 없는 것인데.’
랑그는 미간을 좁히며 다시 한번 손가락끝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들겼다. 그러다 이윽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뭐, 제 할 일은 여기까지였다. 7년 전에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해결할 일이었다. 자신은 명령받은 것만 이행하면 된다. 물론 어딘가 뒤가 구리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지만.
‘그리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각하께서 해결하실 테지.’
헤르트 샤인은 보르웬 후작이 꽤나 아끼는 사냥개였으므로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문제를 후작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제 상관이 최단기간에 고지에 설 수 있었던 건, 그의 실력이 뛰어난 것도 한몫했지만 기본적으로 후작이 뒤를 봐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각하께 보고는 해야겠는데.’
랑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들었다. 오늘의 업무는 여기서 끝이었다. 이제 동이 트는 대로 상관에게 부인에 대한 정보를 넘기고 보슈 경과 교대를 하는 일만 남았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의 일정은 그랬다.
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자 동이 트기까지 아직 서너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잠시 눈이라도 붙일 생각으로 방을 나선 랑그는 머지않아 그를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와 마주했다.
“얼굴 한번 보기 힘들어. 그렇지 않나요, 제프리 경?”
아, 잠시 잊고 있었다. 저 여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귀찮게 됐네.’
랑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으시네요, 벨로뎀 영애.”
***
“요즘 뭐 하고 다녀?”
열여섯은 되었을까. 침대에 누운 채 책을 만지작거리던 어린 소녀는 제 하나뿐인 자매를 쳐다봤다. 남자 못지않게 커다란 장신의 자매는 낭창한 팔다리를 뽐내며 아까부터 줄곧 창밖만 주시하고 있었다.
“리.”
어린 소녀가 다시금 제 자매를 불렀다. 그제야 여자,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돌려 유약한 이 나라의 왕비, 쟌과 시선을 마주했다. 검은 눈동자를 품은 눈매가 가늘게 벌어졌다.
“제가 뭘 하고 다니는지 그렇게 궁금하세요?”
“언니는 요즘 궁에서 언니에 관해 떠도는 소문이 안 좋은 건 알아?”
“언제는 좋았나요.”
베아트리체가 낮게 웃음 지었다. 그녀는 창가에서 멀어져 왕비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부산스레 흩어진 동생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자신과 똑 닮은 보랏빛 머리카락은 전보다 색이 옅어져 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걱정 마세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뭐 하는데?”
“글쎄요, 악당 놀이?”
누군가에게 들었던 것을 말하며 베아트리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에 쟌이 대놓고 미간을 좁혔다.
“그게 뭐야. 이상한 짓 하지 마.”
“그럼요, 제가 어떻게 우리 왕비님의 뜻을 거스르겠어요.”
저를 달래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에 왕비가 오히려 입을 비죽이며 못 미더운 얼굴로 자신의 자매를 쳐다봤다.
“가벼이 넘기지 말고. 정말 그치들의 동태가 이상해서 그래. 람스는 멍청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 눈에는 다 보여. 분명 조만간 일 하나가 터질 거야. 이를테면…….”
“찰디웨우스의 탄광 파업 같은 거?”
돌아오는 대답에 쟌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쟌이 언니에게 말해 주려던 것은 아직 극소수에게만 풀린 정보였다. 그녀도 남편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서재에서 엿듣게 된 것으로, 왕을 살살 구슬리려는 간사한 혀놀림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뭐야, 어떻게 알아? 설마 언니가 주도한 거야?”
“그건 아니고요. 그보다 왕비님께서 저를 너무 얕잡아 보시는 거 아닌가요?”
“내가 리를? 그럴 리 없잖아.”
“그렇죠. 왕비님이 저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건 제가 누구보다 잘 알죠. 그냥 해본 말이에요.”
베아트리체가 동생과 눈을 마주치며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쟌은 불안을 아직 다 떨치지 못했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그동안 생각을 좀 해봤는데……. 왕비가 책을 흔들며 말을 이어갔다.
“테헤라와 손을 잡고 철도를 들여오기로 한 게 재작년이잖아. 공사는 이제 마무리 단계고. 적어도 몇 달 후에는 벤샨과 루디렌을 잇는 철로가 개통되겠지. 그럼 이 시점에 찰디웨우스의 파업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게 되지 않아? 석탄의 가격은 당연히 천정부지를 찍을 테지만 우리는 약속에 따라 동결된 값으로 물건을 날라야 할 테니까.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야. 석탄은 웬만해선 모든 것과 연계되어 있어. 모든 게 연쇄적인 거라고. 하다못해 이 책까지. 이 책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수백 개의 석탄이 필요하다는 건 알아? 석탄의 공급이 중단되면 테헤라와의 거래도 거래지만 원가부터 상승하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물가가 폭등할 거야. 그리고 그건 그치들이 원하는 상황일 테고.”
“음, 궁 안에서만 계시는데도 많은 걸 파악하고 계시는군요.”
쉬지 않고 쏟아지는 말에 베아트리체가 대견하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왕비가 놀리지 말라며 그녀를 향해 책을 휘둘렀다. 진지하게 들어보라니까! 있는 힘껏 휘두른 게 무색하게도 책은 베아트리체에게 금방 잡혔다.
베아트리체는 동생에게서 뺏은 책을 휘리릭 훑어봤다. 그리고는 낙서가 되어 있는 부분을 펼쳐 보이며 쟌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쟌이 딱밤을 맞은 이마를 감싸며 낮게 소리쳤다.
“아파!”
“수백 개의 석탄으로 만들어진 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벌이에요.”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저하께서 놓친 부분이 있어요. 첫 번째, 테헤라와의 약조는 무효가 될 겁니다. 두 번째, 찰디웨우스의 파업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세 번째,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 거랍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