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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배신을 알지 못하여-30화 (30/138)

030화

‘나약한 소리 좀…….’

그녀가 눈을 떴을 때에는 한참 늦은 밤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 켜놓은 촛불도 거의 타들어 가 불안하게 빛을 일렁이는 시간.

테사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방 안을 둘러봤다. 구조나 가구들이 익숙하다 싶었더니 별관에서 그녀가 머무는 방 안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소후작에게 억지로 끌려나가 인질이 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부터는 머릿속이 가물가물했다. 중간에 누군가에 안겨 이동된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테사는 일단 마니를 찾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려다 침대 머리맡 근처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어둠에 반쯤 가려진 채로 헤르트가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요한 숨결 소리에 테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가 왜 여기에 있지?

헤르트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별관까지 온 적이 없었다. 성에서 테사를 부를 때면 그는 언제나 자기 휘하에 있는 병사나 기사들을 이용했다. 그는 별관 근처에는 일절 발걸음하지 않았다.

테사는 헤르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붕대가 단단하게 감긴 목이 불편했고, 온몸이 쑤시듯 아파 왔지만 이대로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목도 말랐고 배도 조금 허기졌다. 마니를 찾아야만 했다.

“어디 가.”

바닥에 발을 붙인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몸을 커다란 손이 받쳐 주었다. 어느새 헤르트가 눈살을 찌푸린 채 테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가냐고.”

“그, 그게…….”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갖다줄 테니까.”

“괘, 괜찮아요. 제가 하면 되는, 아!”

헤르트가 테사를 가뿐히 들어 올려 다시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졸지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테사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헤르트를 올려다봤다. 그제야 어둠에 가려진 헤르트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한층 날카로워진 눈매.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짙은 금발과 거칠게 물어뜯긴 듯 일어난 입술. 평소 주름 하나 없이 각 잡혀 있던 셔츠는 무엇을 했는지는 몰라도 주름이 잔뜩 생긴 채 단추 한두 개가 풀어헤쳐져 있었다.

“잔말 말고 말해. 의사가 너 안정 취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물 줘?”

헤르트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앞으로 다가가 물 잔을 집어 들었다. 쪼르르, 물 잔에 물을 채우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테사는 제 앞에 물 잔이 내밀어질 때까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헤르트를 쳐다보기만 했다. 헤르트가 내게 왜 이러지?

“뭐 해, 안 받아?”

“영주님께서 어떻게 여기에…….”

“난 여기에 있으면 안 돼? 내가 이 성내에서 못 갈 곳이 있었나.”

“그건 아닌데…….”

“그러면 네 공간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게 싫어?”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마셔.”

헤르트가 재차 테사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할 수 없이 테사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자 갈라질 것처럼 아팠던 목이 조금 괜찮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도 헤르트가 제게 왜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른 건. 더 필요한 건 없어?”

물 잔을 도로 건네받으며 헤르트가 물었다. 이에 테사는 고개를 저었다.

“배는.”

“……네?”

“배는 안 고프냐고.”

“괜…… 괜찮은 것 같아요.”

테사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사실 조금 배가 고프긴 했지만 참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새벽이었다. 다들 자는데 저 하나 때문에 괜한 사람들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고픈 배야 동이 트고 나서 채워도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까.

반면에 헤르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홀쭉해진 여자의 배를 빤히 쳐다봤다. 사실 배뿐만 아니라 뼈만 남은 것 같은 그녀의 팔다리도 찬찬히 살펴봤다. 저런 몸으로 잘도 움직였다 싶다. 식사를 하긴 하는 걸까? 아무래도 제 두 눈으로 평소 얼마나 먹는지 봐야 할 것 같았다.

사람을 부르기 위해 헤르트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지금 간단히 요깃거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하지.”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저는 괜찮…….”

그 순간 헤르트가 테사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깃들어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까닭에 테사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는지 애써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는 딱히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머지않아 헤르트가 거칠게 말문을 뗐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 안 해. 날 미워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싫다는 티는 내지 마.”

“……네? 그게 무슨…….”

“그 빌어먹을 괜찮다는 소리 좀 집어치우라고.”

헤르트의 낮은 음성에 테사가 입을 다물었다. 헤르트는 할 말이 몹시 많은 얼굴이었다가 이내 작은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렸다.

“……됐어, 네가 싫다고 해도 가져오라고 할 거니까.”

밖으로 나가 사용인을 부른 헤르트는 테사가 먹을 수 있게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사용인이 사라지고 나서 헤르트는 문을 닫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테사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그녀는 헤르트가 다시 나타나자 더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디 좀 봐.”

헤르트가 테사의 이마로 손을 불쑥 뻗었다. 사내의 뜨거운 손이 테사의 작은 이마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차가웠던 몸에 어느새 열기가 돌고 있었다. 그녀가 자는 내내 난로에 불을 지폈던 것이 도움이 된 듯싶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헤르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편한 곳은.”

“……어, 없어요.”

“아프면 숨기지 말고 바로 말해. 의사를 부르든, 하녀를 부르든 재깍재깍 치료받아. 매번 이렇게 픽픽 쓰러지지 말고.”

이마에서 손을 떼는 헤르트를 테사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올려다봤다. 이마의 열을 확인하는 모습이 오래전 밤새도록 그녀를 간호하던 소년의 모습과 겹쳐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의 헤르트에게 그 시절의 헤르트를 투영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자꾸만 그녀의 눈에는 다정했던 소년만이 보였다.

‘아니야, 이러지 마.’

테사는 눈물이 찡 하고 올라오는 것을 반사적으로 참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눈물이 계속해서 눈가에 차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이마의 열 한 번 확인해 줬다고 이리도 울컥하다니. 정작 헤르트는 아무런 생각 없이 했을 행동일 텐데 말이다. 제 눈물샘이 고장 난 게 틀림없었다.

‘의미 두지 마. 헤르트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걸.’

정신 차려. 네 앞에 있는 남자는 더 이상 네가 알고 있는 헤르트가 아니야. 무엇보다 네 주제를 알아야지. 아직도 그 마음을 못 접었어?

테사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 질책에 가슴이 비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 왔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다시는 헛된 꿈을 꾸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게 테사에게 주어진 현실이었으니까.

낮에 소후작이 벌였던 소동에서도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과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맞는 말이었다. 테사와 헤르트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어야만 했다.

테사는 헤르트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도 최대한 그에게 기대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그는 자신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소후작을 잡으러 온 것뿐이라고. 칼붙이에 목이 찔리면서도 몇 번이고 계속 그 생각만 반복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몸의 상태가 난조해서 그런지 결국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테사의 눈물을 발견한 헤르트가 짐짓 얼굴을 굳혔다. 당황스러웠다. 왜 울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그가 급히 테사의 얼굴을 가까이서 확인하려는 찰나였다. 테사가 먼저 고개를 푹 숙이며 웅얼거렸다.

“잠시―”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아무것도……. 그냥, 눈에…… 눈에 뭔가 들어간 것 같아서……. 죄송해요.”

테사가 서둘러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그럼에도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이러면 안 된다. 자신이 우는 모습 따윈 헤르트에게 보기도 싫은 것 중 하나일 터였다.

“빨리, 빨리 그, 그칠게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끊임없이 사과를 하며 테사는 두 눈을 꾹꾹 눌렀다.

“…….”

우는 테사를 앞에 두고 헤르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창가 너머를 바라보았다. 깊어진 밤이 아직 물러갈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테사를 향한 증오가 아주 잠시 허물어진 것은.

헤르트는 조심스럽게 테사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눈가를 문질러대는 여자의 두 팔을 제지했다.

“눈 비비는 버릇은 여전하긴.”

“…….”

“울지 마.”

헤르트의 뜨거운 손이 부드럽게 테사의 눈두덩이를 가볍게 만졌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적힌 눈물을 닦아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말없이 있었다.

헤르트는 제 눈길에 눈을 감고 서서히 진정하는 테사를 내려다봤다. 그의 손바닥보다 작은 얼굴이었다. 한때는 이 얼굴을 종일 바라만 봐도 좋았던 때가 있었다. 그건 부정할 수도 없고, 숨기고 싶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그만큼 그는 제 앞에 있는 이 여자를 좋아했다. 아니, 좋아하기만 했을까. 사랑했다.

‘헤르트!’

그 시절만 해도 테사는 늘 밝고 활기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상냥했고, 친절했으며 모두에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작은 천사였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당연히 테사를 좋아하며 잘 따랐고, 지도사들은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테사는 가지고 있는 재주도 탁월했다. 그녀가 부르는 노랫소리는 작은 종달새처럼 청아했고, 춤을 추는 몸의 선은 누구라도 혼을 쏙 빠지게 만들었다.

맑고 파란 하늘, 살랑이는 바람결과 그에 나풀거리는 진저빛 머리카락. 모두가 테사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을 좋아했다.

헤르트 또한 단 한 번도 그 순간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걸 다 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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