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성에서 별관으로 돌아오자마자 테사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온몸이 무거웠다. 일주일 가까이 계속 이어진 헤르트와의 정사는 그녀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계까지 몰아갔다. 그렇다고 헤르트에게 힘든 것을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는 순간이었다. 창문 근처에서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테사가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마니? 마니예요?”
이 방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테사와 그녀의 시중을 드는 하녀, 마니 한 명뿐이었다. 그러나 마니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자 이상한 것을 눈치챈 테사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 때 창가 앞으로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테사는 깜짝 놀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도 못하고 느닷없이 나타난 손을 바라봤다. 그녀가 머무는 방은 2층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외부의 창문을 통해 안쪽으로 침입하려 하고 있었다.
누, 누구……. 테사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서 몸이 굳었다. 머리로는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하, 진짜…… 개새끼들…….”
얼마 후 침입자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남자는 힘겹게 창문을 타고 넘어와 바닥에 엎어지듯 발을 디뎠다. 테사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득한 공포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방을 침입한 남자는 다름 아닌 유테르트 소후작이었다.
‘도망, 도망 가야 해. 지금 당장 도망……!’
눈물이 반쯤 차오른 채로 테사는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보다 저자가 왜 이곳에? 분명 갇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숨이 막혔다. 페르데일을 보자마자 두려움과 공포가 음습했다. 테사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다리를 끌고 엉금엉금 침대를 기어 문가 쪽으로 향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그 때였다.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머리채가 잡혔다. 입도 살려달라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틀어 막혔다. 억센 손아귀 힘에 테사가 미약하게 발버둥 쳤으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에서 힘이 죽 빠지고 말았다.
“시발, 네년일 줄 알았어.”
저를 보고 허옇게 질린 테사를 향해 페르데일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여기서 만날 줄은 예상 못 했지만 이왕 잘 만났다는 얼굴이었다. 테사는 그런 남자의 얼굴을 잘 알았다.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우연히 저를 만날 때마다 하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분풀이와도 같은 학대가 이어졌었다.
‘싫어, 싫어……!’
테사는 저도 모르게 제 입가를 틀어막은 페르데일의 손을 꽉 깨물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용기였다. 그만큼 절박했다. 아악! 페르데일이 소리를 지르며 테사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테사는 그 틈을 놓지 않고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이 개 같은 년이!”
짜악-!
뺨 한쪽이 불이 붙은 양 화끈거렸다. 테사는 어느 순간 자신이 바닥에 엎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바닥의 나무판자를 쳐다봤다. 방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다시금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올리는 손길이 있었다. 우악스러운 손속이었다. 아픔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하, 씨발, 진짜 아파죽겠네. 야, 너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페르데일이 험악한 얼굴로 테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테사의 머리채를 잡고 방 안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테사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에게 끌려갔다.
“미친년이 남자랑 붙어먹더니 간덩이도 부었나.”
페르데일은 벽 쪽으로 테사를 던지듯 잡았던 머리채를 놓았다. 때문에 테사는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머리부터 얼굴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제야 울음이 입 밖으로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누가 내 손 깨물래? 좋게좋게 가려고 했더니만……. 시발, 여기에 발 묶여서 가뜩이나 짜증 나는데 별게 다 짜증 나게 하고 있어.”
페르데일은 아까부터 꼬이기 시작한 상황에 몹시도 화가 난 상태였다. 별 볼일 없었던 별관의 경비는 그의 예상을 뛰어넘어 상당히 엄했고, 그로 인해 그는 이곳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별관 안에서도 경비가 삼엄하여 이리저리 방을 떠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썅,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페르데일은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우는 테사를 내려다봤다. 왜 별 볼일 없는 별관에 병사들이 이리 많은가 싶었더니, 영지를 공격해 온 기사 나부랭이와 붙어먹은 여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였다. 고로 그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모두 이 앞에 있는 년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탈출은 거의 물 건너갔고…….’
페르데일은 테사를 살펴봤다. 그에게 얻어맞은 뺨 한쪽을 제외하면 나름 멀쩡해 보였다.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상태가 더 양호해진 것도 한몫했다. 특히 살짝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뽀얀 살결은 조금 동하기도 했다. 그는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가 이윽고 몸을 수그려 테사와 최대한 눈높이를 맞췄다.
“야, 그 새끼 좆은 맛있었냐? 꼴 보니까 완전히 팔자 폈는데?”
“…….”
“어떻게 꼬셨어? 궁금해서 그래. 진짜 궁금해서. 그 새끼가 좀 대단한 놈이냐? 보르웬 후작의 이거잖아.”
페르데일이 킬킬 웃으며 테사 앞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세간에는 보르웬 후작과 그녀의 종기사였던 헤르트의 사이에 대해 소문들이 무성했다. 온갖 도박장을 쏘다녔기에 페르데일은 그런 소문들을 심심치 않게 주워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 봤다고 입을 터는 놈들도 있었고.
그래서 페르데일은 처음에 그런 놈이 제 아버지의 부인 중 한 명과 붙어먹었다고 했을 때 쉽게 믿지 못했던 것이었다.
“뭐, 됐고……. 거기 아래가 죽여주나 봐? 그 새끼가 널 이리 대우해 주는 거 보면 대충 각이 나오는데. 하여간 얌전해 보이는 년들이 벗겨놓으면 생각보다 쩔어준다니까.”
페르데일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테사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테사는 그 불순한 눈빛에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내가 갑자기 궁금해지는 게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
“…….”
“응? 맞춰봐.”
페르데일이 손을 뻗어 흐트러진 테사의 머릿결을 옆으로 넘겨주었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테사가 흠칫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머지않아 소후작은 머리카락 속에 숨겨진 올리브빛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저 눈빛을 만들기 위해 장장 몇 년이 걸렸다.
“여기서 내가 널 따먹으면, 그 새끼가 어떻게 나올까?”
테사가 숨을 들이켰다. 페르데일이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궁금하지 않아? 어?”
“하, 하지…….”
“시발, 네년 때문에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는데 재미 좀 보자. 어차피 아버지도 뒈졌는데 알 바야? 옛날부터 네년 존나 꼴려서 한번은 따먹어 보고 싶었어. 너도 알잖아.”
알다마다.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저 눈빛을 어떻게 잊을까.
그렇기에 테사는 더더욱 페르데일이 무섭고 두려웠다. 그는 그녀를 개 패듯이 패는 주제에 때때로 그녀에게 욕정했다. 그는 언제라도 테사를 강간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러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의 아버지인 유테르트 후작 때문이었다.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이미 따먹는 건데. 아무튼 이젠 아버지도 없으니까 상관없잖아. 너도 궁금하지 않아? 그 새끼가 어떻게 나올지? 더러워졌다고 뱉을까, 아님 그래도 삼킬까.”
페르데일의 손이 이제는 테사의 옷자락을 들추고 있었다. 테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할딱거렸다.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도망칠 수 없는 막다른 길이었다.
그러나 일순 별관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페르데일은 움직임을 멈추고 창 너머를 바라봤다. 그를 쫓던 수색조가 어떻게 알았는지 별관까지 들이닥쳐 있었다. 페르데일은 아깝다는 듯 욕을 지껄이며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계획 바뀌었어.”
그는 단검을 테사의 코앞으로 들이대며 말했다.
“새 영주가 얼마나 널 아끼는지 한번 시험해 볼까?”
***
뿌리 깊은 개국공신 가문인 만큼 유테르트 성의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새로 꾸려진 수색조는 바위 하나까지 살펴보며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 때 하늘 위로 까마귀들이 돌연 까악거리며 날아올랐다. 헤르트는 저 멀리 한 병사가 다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병사는 헤르트 앞에 도착하자마자 한쪽 무릎을 구부려 몸을 숙이며 소리쳤다.
“급고드립니다!”
“말해.”
“현재 유테르트 소후작이 별관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귀부인 한 분을 인질로 삼아…….”
병사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헤르트는 말고삐를 휘둘렀다. 어디서 쥐새끼마냥 숨어서 나오지 않았나 싶었더니 별관일 줄이야. 이곳에서 별관까지라면 늦어도 10분 내로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그보다 소후작이 귀부인 한 명을 인질로 잡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갑자기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온다. 헤르트는 말을 재촉했다.
그가 별관에 도착했을 때, 별관 뒤쪽에서는 소후작으로 추정되는 이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헤르트는 말에서 내려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턱짓했다.
“안내해.”
뒤뜰로 갈수록 고함 소리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몇 발자국 더 움직이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소후작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한쪽 팔에는 헤르트가 내심 아니기를 바랐던 여자가 인질로 잡혀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헤르트는 잠시 멈춰서서 소후작을 주시했다. 페르데일이 쥔 단검이 테사의 바로 목까지 들이밀어지고 있었다. 자칫 잘못 움직였다간 날카로운 칼날이 테사의 살결을 파고들 수도 있었다. 때문에 소후작과 대치 중이던 기사들은 난감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상태였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다치면 여러모로 문제가 불거질 테니까.
“시발, 다 꺼져! 꺼지라고! 다가오기만 해! 이 여자 죽여버릴 거야!”
“해봐.”
그 때 헤르트가 기사들을 헤치며 소후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