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소후작이 탈출했습니다.”
랑그의 보고에 창으로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던 헤르트의 얼굴이 대번에 찌그러졌다. 상관이 딱딱하게 굳은 눈빛으로 저를 돌아보자 랑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땅을 팠답니다. 개구멍을 만들어서 거기로 탈출했다고…….”
“별 같잖은 새끼가.”
헤르트가 욕을 지껄이며 창가에서 벗어났다.
유테르트 소후작은 동관의 탑에 갇힌 후에도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번이 몇 번째지? 미수에 그쳤던 것까지 합하면 곧 다섯 손가락을 채우고도 남았다.
영지쟁탈전 중에도 어떻게 그 철통같은 방어막을 뚫고 도망을 갔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바퀴벌레처럼 끈질긴 놈이었다. 그 의지 하나는 높이 살 만했다.
“보슈 경은.”
“2소대를 동반하여 동관과 숲으로 이어진 북쪽 길목을 수색 중입니다.”
“언제부터.”
가운을 벗은 헤르트는 미리 준비된 셔츠를 집어 팔을 꿰어 입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랑그는 그 옆에서 자연스럽게 제 상관의 시중을 들며 보고를 이어갔다.
“……이제 두 시간 정도 되었습니다.”
“두 시간? 그 새끼도 도박쟁이에 약쟁이라며. 그런 놈팽이 하나 제대로 못 잡아?”
버클을 잠그던 헤르트가 다시 한번 랑그를 쳐다봤다. 일반인에 가까운 소후작 하나를 두고 벌써 두 시간째 고전하고 있다니. 제 죄를 아는지 랑그가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라…… 대처가 미흡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만만하게 봤단 소리를 잘도 지껄인다. 그러다가 뒈지면 누구 탓을 하려고.”
됐다, 말을 말자. 전쟁에도 나가본 적 없는 새끼가 뭘 안다고. 헤르트는 귀찮음이 다분한 얼굴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보다 소후작이라는 놈이 심히 거슬렸다. 초반의 탈출 시도는 제풀에 못 이겨 하다 말겠지 싶어 가만히 내버려 두었건만, 현재 정말로 탈출한 이상 이대로 두면 문제가 생길 터였다.
헤르트는 물 잔을 단숨에 비우고선 책상 앞으로 다가가며 지시했다. 이 일대의 지도가 책상 위로 펼쳐져 있었다.
“성내 경비 늘리고, 특히 별관 쪽에는 신경 써서 투입해. 지금 기본 병력을 제외하고 남아 있는 인력이 몇이지?”
“기사 다섯과 소대 넷 정도 남아 있습니다.”
“기사 두 명과 소대 둘을 차출하여 나도 움직인다. 이번에야말로 다리 하나는 분질러놔야겠어. 그래야 도망을 못 칠 거 아냐.”
그리 말하면서도 헤르트는 이곳이 전쟁터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아쉬워졌다. 국가간의 전쟁터라면 이유 불문하고 소후작의 머리통을 반쯤 으깨어 까마귀의 먹이로 주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지쟁탈전은 일반적인 전쟁과는 다르게 손도 신경도 많이 갔다.
‘어차피 다 뺏을 거면서 후계자는 왜 꼭 살려놓으라 해서는.’
사실 마음만 먹으면 헤르트는 언제든지 소후작을 처리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소후작의 시체 따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드는 것도 별일 아니었다.
다만, 지금 왕국법까지 끌어와 여러 이유를 대며 소후작을 살려두고 있는 것은 이 모든 일을 계획한 보르웬 후작 때문이었다.
보르웬 후작이 유테르트 소후작만큼은 목 성히 살려두라 직접 지시했다.
“……오늘 내로 잡을 수 있을까요? 아직 잡히지 않은 걸 보면 이미 성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끼가? 조력자 없인 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나가더라도 관문까지도 못 갈 거고.”
“하지만 이렇게 탈출한 것부터 저희의 예상을 벗어났지 않습니까. 언제나 의외인 상황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랑그가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헤르트는 그런 랑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 잘 아는 놈이 소후작이 탈출하는 동안 뭐 했대? 그러나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어 따져 묻지는 않았다. 소후작이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헤르트,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으니까.
요 근래 헤르트는 대부분의 일들을 랑그에게 떠맡겨놓은 상태였다. 전쟁이 끝났으니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은 핑계일 뿐이고, 사실은 7년 만에 만난 여자에게 좆질하는데 신경이 쏠렸기 때문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애석하게도 사실이 이랬으니, 서로 네 탓이니 내 탓이니 따지기보다는 지금 당장 소후작을 잡으러 나서는 게 재빠른 해결책이었다.
“그럴 일 없으니까 수색할 준비나 마쳐 놔.”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경례하는 랑그를 뒤로하고 헤르트는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에서 별관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아직도 그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가 있었다. 진저빛의 머리통을 보며 헤르트는 막 방 밖으로 나가려는 랑그를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저번에 내가 말했던 건?”
상관의 물음에 랑그가 잠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떤……. 그러다 헤르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해 있는 것을 본 그는 곧바로 상관이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아, 그건 지금 취합 중에 있습니다. 조만간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 중으로…….”
“이번 주 안으로 해 와.”
“……네.”
헤르트의 낮고 무거운 어조에 랑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지난 1년간의 부사관 생활로 그는 목소리만 들어도 상관의 심기가 어떤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고분고분 대답해야 할 때였다. 랑그는 빠르게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랑그가 나가고서도 헤르트는 창밖을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느리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테사 유테르트.
현재 그가 차지한 본 영지의 주인, 죽은 유테르트 후작의 여섯 번째 부인이자 7년 전 그를 배신한 여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와 집무실에서 수시로 몸을 겹치는 사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되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나?’
테사를 쫓는 눈길에는 어느새 짜증이 스며들어 있었다. 헤르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곰곰이 그녀에 대해 곱씹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 동안 헤르트는 테사에게 철저히 선을 긋고 그녀를 험하게 대했다.
침실이 아닌 집무실로 매일같이 호출해 아무렇게나 몸을 섞고 그 안에 만족할 때까지 제 씨물을 실컷 뿌렸다. 정사가 끝나면 부러 혼자 내버려 두고 망설임 없이 자리를 뜨기까지 했다.
예고했던 것처럼 철저히 섹스만 하는 관계로 마음껏 그녀를 이용했다.
그럼에도 테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가 오라면 오라는 대로 집무실에 와서 순순히 다리를 벌리고 그의 밑에 깔렸다.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바라지도 않았다.
한 번쯤은 수치스럽고 힘들다며 그의 앞에서 싫다고, 못 하겠다고 울 줄 알았는데 그런 것 하나 없었다. 심지어 매일 거듭되는 정사에 몸이 아플 테니 하루 이틀 정도는 눈감아 주려 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음부가 부어 있어도 그녀는 착실히 그의 앞에서 치맛자락을 들추어 올렸다. 한 번도 그의 부름에 뺀 적이 없었다. 이에 헤르트는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기가 찼다.
‘저 조그마한 머리통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정말로 자신의 죄를 제 몸으로 다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애당초 지금 그녀가 스스로의 처지가 어떤지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지도 의문이었다. 아니, 안다면 이렇게 행동할 수는 없을 터였다. 자신의 몸도 이토록 아무렇게나 쓰지도 못할 것이다.
‘대체…….’
테사는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었다. 헤르트가 더 이상 그녀의 몸에 관심이 없어지는 순간, 그날이야말로 그녀의 죗값을 치루는 날이 되는 것이다. 헤르트는 그때까지 테사에 대한 처분을 잠시 미루었을 뿐이지, 고작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로 지금 테사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남은 몸뚱이 하나로 헤르트의 관심을 최대한 끌어 기간을 늦추는 것이 살아남을 길이었다. 먼저 정사를 요구했던 것도 다 시간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걸 생각하면 지금 그녀는 이렇게 함부로 몸을 혹사시켜선 안 되었다. 헤르트를 질리게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테사는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신경 쓰고 있지 않는 듯했다.
그 순간 그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냥…… 저, 절 죽이세요.’
일순 헤르트의 눈매가 잠시 가늘어졌다. 정말로 죽고 싶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몸을 이리 막 굴리는 거고? 자신이 죽여줄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아니지, 아닐 거야. 헤르트는 반사적으로 이제는 한참 멀어진 여자를 노려봤다.
정말 죽을 생각은 아니지? 그렇게 쉽게 죽어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뻔히 알면 그러면 안 되지.
하지만 그게 맞다면?
“……빌어먹을.”
헤르트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다시금 목구멍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목울대를 긁었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꼭 배신자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죽든지 말든지.”
어차피 자신이 살아 있는 한 테사는 마음대로 죽을 수 없었다. 아마 이는 테사,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은 반드시 헤르트가 쥐어야 하고, 그는 제 인생을 망친 여자에게 조금이라도 휘둘리기 싫었으므로.
헤르트는 테사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이내 창가에서 고개를 돌렸다.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애초부터 자신이 이렇게까지 생각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저 가지고 놀다가 버릴 배신자였다.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저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든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모순되게도 욕밖에 없었다.
“씨발, 거지 같은…….”
헤르트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