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다 제 불찰입니다. 용서하시길. 그보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불편한 곳이 있다면 바로 의사를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지금 제게는 부인을 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이니까요. 그러니 저를 어렵게 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 자주 만나게 될 겁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 집무실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방긋방긋 웃어 보이는 랑그를 테사는 조금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곳에 와서 랑그만큼 그녀에게 잘 웃어주는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면 비웃거나 얼굴을 찌푸리기 바빴는데. 그게 아니라면 그녀를 어떻게 해보려는 불순한 눈빛이 다였다.
그래서일까. 랑그 또한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그의 앞에서 무서움이나 몸이 움츠러드는 것이 덜했다. 테사는 잠자코 랑그를 따라 움직였다. 랑그도 아까부터 테사의 보폭에 맞춰 걷는 중이었다.
“아 참, 소후작에 관해서라면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이제 밖으로 나오기도 힘들 테니 말입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지요.”
“그, 그렇군요…….”
테사는 랑그의 말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오늘따라 더 아름다우십니다. 전에 뵈었을 때보다 안색도 훨씬 좋아지신 것 같고요. 이곳에 머무는데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가는 길 내내 배려인지 아니면 원체 성격이 그러한지 랑그는 테사에게 쉼 없이 말을 건네며 혼자서 열심히 떠들었다. 물론 대개 가벼운 대화라 부를 만한 것들이라 그리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테사는 더욱 랑그가 신기했다.
이렇게 말 많은 남자도 그가 처음이었다…….
“샤인 경께서는 오늘 막 먼 길에서 돌아오셨기 때문에 상태가 조금 난조합니다. 다른 때보다 말이 세게 나가더라도 그러려니 하십시오.”
“아, 네…….”
“다 도착했네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랑그의 말에 열심히 대답해 가며 걷자 어느 순간 본성의 4층이었다. 전에 한 번 와봤다고 나름 익숙해진 공간이기도 했다.
랑그가 문을 두드리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그가 테사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하자 테사는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발을 디뎠다.
고즈넉한 집무실은 이전과 비슷했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좀 더 깔끔해졌다는 것? 전에는 어수선했지만 지금은 각 잡힌 듯 물건들이 제 자리에 정리되어 있었다. 더불어 벽면에 있던 유테르트 후작의 초상화도 사라져 있었다.
집무실 안에서 헤르트는 다른 기사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랑그와 테사가 들어오기 무섭게 그들의 대화도 거기서 멈추었다. 헤르트가 고개를 까닥이자 기사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럼 저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헤르트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랑그는 익숙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후 자리를 벗어났다. 가는 길에 테사에게도 짤막하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랑그는 곧바로 앞선 기사를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 안에 헤르트와 자신, 단둘만 남자 테사는 우물쭈물거리며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때 책상 쪽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 사나우니까 서 있지 말고 앉아.”
“죄, 죄송해요…….”
급히 근처의 아무 소파에나 앉은 테사는 그제야 조금씩 헤르트를 힐긋였다. 그는 테사가 왔음에도 기사가 나간 직후부터 무언가를 하느라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있었다. 가만 보니 남자의 커다란 손에 들린 깃펜이 막힘없이 유려한 필기체를 그리고 있었다.
불현듯 테사는 헤르트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점에 놀라고 말았다. 테사가 알고 있었던 소년은 그녀처럼 까막눈이었으니까. 언제 글을 배웠을까. 테사는 글을 떼지 못했다.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거니와, 테사 본인도 글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자신은 종이와 펜, 책과 서고가 널려 있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도 글을 배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수없이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헤르트는 그 와중에도 글을 배운 것이다.
테사는 언젠가 소후작이 말했던 대로 자신이 식충이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창피해, 그동안 나는 대체…….’
뭘 하며 살아온 거지? 테사는 얄팍하기 짝이 없는 제 의지와 노력에 신물이 날 것 같았다. 하루하루 절망에 빠져 하는 일도 없이 식량만 축내던 자신과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완벽한 귀족이 된 헤르트.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다.
테사는 제 손등을 북북 긁었다. 낯부끄러워 고개 또한 들 수가 없었다.
이래놓고 죽고 싶었다고? 헤르트만큼 발버둥 쳐보지도 않았으면서.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짓이기고 두 손을 꾹 말아 쥔 채 바닥을 내려다봤다.
더더욱 확연해진다. 자신은 도대체 헤르트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울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제 자신이 모든 걸 망쳐 놨다는 생각을 하면 눈물이 마구잡이로 솟아올랐다.
‘멍청한 년.’
원장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원망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테사 본인이었다. 처음부터 헤르트의 말대로 신중하게 결정했더라면, 아니면 중간에라도 헤르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하다못해 끝까지 발버둥 치고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헤르트가 포기하지 않고 당당히 승전보를 울린 것처럼, 자신도…….
‘좋아해.’
그 순간 오래전 과거가 떠올랐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 수줍게 고백하던 소년의 모습. 함께 미래를 꿈꿔 나가자고 했던 약속까지.
테사는 이전부터 헤르트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리는 이유를 이제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헬.’
헤르트를 좋아한다. 자신은 아직도 헤르트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헤르트는 이곳에 없는데도, 그녀가 죽여버렸음에도 테사는 제 앞의 그에게 지난날의 소년을 투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테사는 그와 동시에 저를 짓누르는 자괴감을 막을 수가 없었다.
‘염치도 없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잖아…….’
테사는 제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스스로를 비난했다. 자신에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아직도 헤르트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죄를 저질러놓고 아직도 그를 좋아한단다.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이 세상에 그녀보다 이기적이고 낯짝이 두꺼운 여자는 없을 터였다.
테사는 여전히 헤르트를 좋아하는 제 자신이 역겹게만 느껴졌다. 제 자신이 용서도, 이해도 되지 않았다.
‘은혜도 모르는 년.’
저를 비난하던 소후작의 말이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그의 말도 틀린 거 하나 없었다. 어쩌면 소후작은 오래전부터 그녀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테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분수도 모르고 쓸모도 없다는 것을.
……아무짝에도 필요 없다는 걸.
‘사람이 어떻게 이래…….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그를 좋아하면…… 뭐 어쩔 건데.’
테사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다. 모든 걸 되돌려놓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들이 만났던 그 처음으로. 그때로 돌아가서 헤르트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헤르트는 자신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면 이렇게 그의 인생이 꼬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테사는 옷자락도 차마 쥐어뜯지 못해 제 손을 아무렇게나 쥐어뜯었다. 손이 금세 시뻘게지고 손톱으로 긁은 부위는 부어오르기까지 했다. 옅게 피가 배어 나오는 곳도 있었다. 누가 봐도 엉망진창이었다. 자신의 모습처럼.
그 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작은 손을 낚아챘다.
“뭐 하는 거야, 너.”
어느새 헤르트가 굳은 얼굴로 테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표정이었다. 테사는 저도 모르게 숨을 헐떡였다.
“……헤, 헤르…….”
“자해하는 게 취미야? 아니면 나한테 지금 시위하는 건가? 불만 있다고.”
“그, 그게 아니…….”
“그럼 뭔데.”
헤르트의 물음에 테사가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답할 수가 없었다. 아직 너를 좋아하는 내가 너무 역겨워서 그랬노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시선까지 돌리자 헤르트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또 입을 다무시겠다? 너는 대체…….”
헤르트는 도저히 제 앞에 있는 여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집무실 문이 열릴 때는 웃고 있더니, 이곳에 들어오고부터는 어두워진 얼굴로 자해를 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심지어 자신의 질문에는 답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를 피하는 게 역력했다.
‘왜? 내가 자신을 무시해서?’
아까부터 줄곧 테사를 무시했던 것은 단순한 심술이었다. 제 앞에서는 단순한 웃음 한 번 보여주지 않았으면서 겨우 두 번째 만나는 제 부하에게는 방긋거리며 웃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랬다. 그래도 안절부절 서서 종종거리기에 신경이 쓰여 앉으라고 지시까지 내렸는데.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이제는 애꿎은 제 손을 쥐어뜯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이제 와 후회하나? 몸으로 갚겠다고 한 선택을? 앞으로도 자신과 몸을 섞는다는 사실이 역겨워 손을 저따위로 헤집어놓은 걸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귀부인이었고 전 영주의 아내였으니까. 이따위 기사 나부랭이에게 몇 번이고 몸을 대줘야 한다는 생각에 저 홀로 끔찍해 하는 것이다.
하기야 귀부인이 되겠다고 저를 검투사노예로 팔아넘기기까지 한 여자이지 않은가.
헤르트는 입가를 비틀었다. 그는 남은 한 손으로 테사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쥐어 저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여기서 확실하게 말해 두는데, 네 몸은 이제 네 것이 아니야.”
“그, 그런 거…….”
“마음대로 하라며. 나한테 먼저 몸으로 죄를 갚겠다고 한 건 너야. 벌써 잊었어?”
헤르트의 시선이 잠시 테사의 옷차림에 닿았다. 한껏 차려입은 모양새에 그는 그녀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어 내려갔다. 하나하나 모든 걸 제 눈에 똑똑히 담겠다는 듯이.
이윽고 그가 드러난 여자의 쇄골 아래로 이어진 가슴골을 응시했다. 가냘픈 몸체에 비해 꽤 커다란 가슴이 보였다.
“이것도 그 때문 아닌가? 먹어달라고, 예쁘게 포장한 것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