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화
“…….”
“어때요? 예쁘죠?”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자 테사는 거울 속의 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거울 속에는 처음 보는 듯한 여자가 서 있었다. 한참을 보고도 그 여자가 자신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 테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향유를 머금은 진저빛 머리카락은 컬이 들어가 위에서 아래로 차분하게 구불거렸고, 뽀얗게 흰 피부는 생기가 돌며 반짝거렸다.
눈썹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속눈썹은 꼬이지 않고 길게 쭉 뻗어나가 눈을 더 크게 만들어주었다. 입술 또한 체리같이 붉은빛으로 촉촉하게 반들거렸다.
자넷이 입혀준 초록색 드레스는 가냘픈 테사의 몸을 보완해 주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엇보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차르륵 떨어지는 광이 더욱 테사를 돋보이게 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테사에게 어울리는 옷이었다.
“뭐야, 이렇게 예쁘게 꾸며주었는데 왜 그런 얼굴이에요?”
자넷은 테사의 오묘한 얼굴을 보고 고개를 주억였다. 크게 감명받거나 좋아할 줄 알았는데 테사는 그저 조용했다. 이윽고 테사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역시 저와는 어울리지 않아요.”
“왜 그래요? 완전히 잘 어울리는데.”
“저, 저 같지 않아요. 너무…… 이상해요.”
테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부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테사는 다급히 거울에서 벗어나 구석으로 향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예쁘다니. 놀리는 거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가면을 쓴 기분이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분에 맞지 않는 걸 흉내 내려는 허황된 여자처럼 보였다.
“저, 그냥 다시 제 옷 입으면…….”
“이렇게 힘들게 꾸몄는데 다시 갈아입겠다고요?”
“여, 영주께서 별로 안 좋아하실 거예요. 저는 이렇게 입을 자격이…….”
초조한 마음에 테사가 횡설수설하는 동안 문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니가 급히 나가 방을 찾아온 손님을 확인했다.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병사가 아닌 기사복을 입은 기사였다. 기사는 테사와 자넷에게 고개를 정중히 숙여 보였다.
“영주님께서 부인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테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대로 갈 수는……. 테사가 급히 옷을 갈아입으려 가림막 너머로 향하려는 차였다. 자넷이 그런 테사를 붙잡아 방 밖으로 떠밀었다.
“다녀와요, 테사.”
잠깐만요, 자넷. 옷을, 옷을 갈아입어야……. 그러나 기사가 코앞에 있자 테사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하려 마니를 쳐다보았지만 마니마저 테사에게 잘 다녀오라며 웃어 보일 뿐,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그리하여 테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없이 기사를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가는 내내 불안에 휩싸여 손에 땀이 흥건했다.
이런 모습으로 헤르트와 만나야 한다니. 헤르트가 같잖은 짓을 한다며 비웃으면 어떡하지? 꼴에 별걸 다 한다고, 벌써부터 이렇게 차려입고 남자를 유혹한다고…….
역시나 이런 건 제게 어울리지 않았다. 분수에도 맞지 않았다. 고작 하룻밤짜리 여자가 이런 옷을 입다니, 모두가 비웃을 노릇이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테사는 제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드레스자락을 내려다봤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근처에서 소란스러운 소동이 벌어지더니 누군가가 테사와 기사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시발, 비켜!”
남자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무언가에 쫓기는 모양새였다.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기사와 테사가 거슬린다는 듯이 고함을 지르던 남자는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한 테사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게 누구신가?”
테사는 고개를 들자마자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남자는 다름 아닌, 죽어버린 유테르트 후작의 아들인 소후작이었다. 지난 7년 동안 그녀를 학대해 온 주범이기도 했다.
저, 저 남자가 여기에 어떻게……. 테사는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부인, 제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테사를 훑어보는 페르데일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기사가 테사를 제 등 뒤로 보내며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여차하면 검을 뽑아 들겠다는 기세에 페르데일이 코웃음을 쳤다.
“넌 또 뭐야. 그것보다…….”
“…….”
“그 새끼랑 붙어먹었다는 게 네년이었어?”
페르데일은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여섯 번째 부인을 향해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여자의 꼴은 가관이었다. 사용인들이나 입을 법한 옷들을 주워 입으며 정신 사납게 머리를 흩트리고 살던 여자가 지금은 정말로 귀부인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깔끔하게 치장까지 한 상태였다. 덕분에 평소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나 그 외모가 잘 보였다.
‘시발년, 전에도 볼 만했는데 꾸며놓으니까 더 그럴싸하잖아?’
이어 페르데일은 저를 보자마자 덜덜 떠는 여자와 그녀를 지키고 서 있는 기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호위까지 있어? 붙어먹어도 단단히 붙어먹었군.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에 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은혜도 모르는 년.”
처음에는 이상한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이 영주가 될 자가 전 영주의 부인 중 한 명과 붙어먹었다는 건 어디 막장 궁중소설 같은 곳에나 나오는 소리 아닌가. 하지만 성에 갇혀 있는 동안 그 소문이 헛소문이 아닌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성안에는 새 영주와 그의 여자에 대한 얘기가 파다했다.
새것이나 따먹지. 이미 따먹힌 년을 따먹는 그자도 그자이지만, 페르데일은 아버지를 배신하고 홀라당 새 영주와 붙어먹은 계모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계집이 감히 지아비를 두고 딴 남자와 배를 맞대? 그년이 누군지만 알아내면 내 가만두지 않겠다 생각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였는데…….
그게 가장 천대받던 아버지의 여섯 번째 부인이라니.
페르데일은 제 눈으로 둘이 붙어먹는 걸 직접 보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저 여자가 저리 차려입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명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값비싼 드레스를 저 여자가 무슨 수로 구해다가 입었겠는가. 당연히 그녀와 붙어먹은 그놈이 마련해 주었겠지.
‘개 같은 년. 언젠간 네년이 이럴 줄 알았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자였다. 꼿꼿하게 치켜뜬 눈이나 바락바락 대드는 몸짓이나. 그래서 그 버릇없는 자태를 고쳐준다며 직접 벨트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 벌써 7년 전이었다. 지금은 그나마 행동이 교정되었지만 간혹 저 흐리멍텅한 녹색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반항심은 아직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는 했다.
페르데일은 비웃음을 터트리며 과장되게 박수를 쳤다.
“대단해, 아주. 아버지가 죽으니 살판났군? 왜, 이제는 그놈한테 다리를 벌려서 목숨이라도 구걸하려고?”
“그, 그렇지…….”
“그자는 아나? 네가 간사하게 이리저리 붙어 몸을 팔고 다니는 창녀 같은 계집이라는 걸?”
앞을 기사가 막고 있지만 페르데일이 제 앞으로 다가오려 하자 테사는 심장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반사적인 공포였다. 몇 년간 지속되었던 학대에서 기인한 학습 효과. 저 남자가 저리 웃으며 저를 비꼴 때마다 테사는 방 밖으로 기어 나오지도 못할 만큼 얻어맞았다.
그 악몽이 지금 다시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네 꼴을 봐. 이미 매춘부가 따로 없군. 그렇게 꾸며봤자 본질적으로 너는 창녀,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야.”
“저, 저는…….”
“너 같은 년 때문에 우리 유테르트 이름이 더러워지는 거야. 감히, 신성한 내 가문의 성에서…….”
“유테르트 소후작, 물러서십시오!”
보다 못한 기사가 검을 뽑아 들며 경고했다. 그러나 페르데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기사 앞으로 다가와 성을 내며 욕을 내뱉었다.
“시발, 네까짓 게 뭔데!”
섬뜩한 칼날이 눈앞에서 움직이는데도 페르데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페르데일은 기사가 자신을 해치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해를 가하면 그의 입장에선 더 좋았다. 공식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으니까.
영지쟁탈전으로 영지를 빼앗겼을 뿐, 페르데일은 여전히 유테르트 소후작이었다.
“뭐 어쩌려고? 날 베기라도 하려고? 웃기는군. 꺼져! 난 저 여자한테 볼일이 있으니까.”
자신을 가로막는 기사를 밀치며 페르데일이 테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년의 머리채를 잡고 이전처럼 때려야 지금 이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감히, 하찮은 년 따위가……. 그러나 그의 행동은 시도에서 멈추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팔목을 잡아 뒤로 꺾었기 때문이었다.
“아악!”
“뭐가 이리 소란스러운가 했더니, 또 소후작입니까?”
“제프리 경!”
랑그가 몹시 귀찮아 하는 것이 명백한 얼굴로 페르데일의 다른 한쪽 팔도 뒤로 꺾어 눌렀다. 양팔이 포박되자 페르데일이 몸을 마구잡이로 흔들며 소리를 질러대었다.
“악! 시발, 넌 또 뭐야! 이거 놔! 이거 놓으, 익!”
“여기에 보슈 경이 아니라 제가 온 걸 감사히 여겨야 할 겁니다. 소후작은.”
대체 또 언제 탈출하셨대. 랑그는 웃는 얼굴로 소후작의 무릎 뒤편을 발로 차 손쉽게 그를 바닥으로 엎어트렸다. 페르데일은 속수무책으로 엎어져 버둥거렸다. 페르데일을 쫓고 있었던 기사들이 도착해 땅에 엎어진 페르데일을 속박했다.
“끌고 가세요.”
“이거 놔! 개새끼들아! 이거 놓으라고!”
이번에도 악을 쓰며 기사들에게 끌려가는 페르데일을 보며 랑그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보름 새 보슈 경이 힘들 만하셨네. 그는 이윽고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은 채 벌벌 떨고 있는 테사를 발견했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테사는 제 앞으로 남자의 구두코가 보이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일전에 집무실에 잠시 보았던 남자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가 절제된 동작으로 천천히 테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의 한 동작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부인. 현재 지휘관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랑그 제프리입니다. 편하게 제프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